다시 태어난 반 고흐 181화
36. 성스러운 봄(7)
아르누보 공모전 관련 회의를 마친 미셸 플라티니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비서 빅투아르는 지난 한 달간 쉴 틈 없이 일한 미셸 플라티니가 안쓰러운 한편, 세계 최대 규모의 공모전을 위해 분투하는 그녀가 존경스러웠다.
차에 오른 미셸이 소파에 등을 파묻었다.
“고생하셨어요.”
“고생은.”
“오늘은 진전이 있었나요?”
“아니. 확신할 수 없대.”
아르누보 공모전 위원회는 관람객이 모든 작품을 감상하도록 유도해야 했다.
심사위원이라면 의무적으로 모든 작품을 확인하겠지만, 일반 관람객은 그렇게 오랜 시간 작품을 감상할 수 없었다.
입선이 투표로 결정되는 만큼 공모전을 준비하는 입장에서는 작품 노출도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결론은 불가능.
1,700여 점의 작품을 동등한 조건으로 전시할 순 없었기에 논의가 계속되고 있었다.
“전 대표님의 접근법이 옳다고 생각해요.”
비서 빅투아르의 격려에 미셸이 피식 웃었다.
“따지고 보면 관람객 모두가 심사위원인 거잖아요. 새로운 예술을 선택하는 주인공으로 사명감을 가져야죠.”
“사명감이라.”
미셸이 눈을 감고 고민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게 거창한 감정으로 부담 주고 싶진 않아. 단지 본인들이 예술계에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려주고 싶어.”
그녀는 모든 작품을 동등한 조건으로 전시할 수 없다면, 관람객이 스스로 찾도록 하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들 개개인이 예술계의 흐름을 바꾸는 주역이라고 인식시켜 주는 일이 필요했다.
“한 가지 방법으로는 안 돼.”
비서 빅투아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셸 플라티니를 신뢰하고 그 뜻에 동조하지만 그녀의 바람은 쉽게 이뤄질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몰랐다.
불가능하지만 지향해야 하는.
“심사위원이라는 인식을 심어줘야 해. 본인 선택에 따라 앞으로 어떤 예술가가 조명받을지 결정된다고.”
“흥미를 느끼지 못하면 어떡하죠?”
“……예술가들 몫이지.”
완벽한 동선을 잡고 작품에 집중하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일은 큐레이터의 역할이었다.
그러나 작품이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지 못한다면 어떤 기획이라도 의미가 없었다.
“어렵네요.”
빅투아르의 말에 미셸이 씩 웃었다.
“어려워도 해야지.”
그녀는 기획서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윽고 마르소 갤러리에 도착한 그녀는 화단에 물을 주는 비다 라바니를 발견했다.
“대표님!”
비다 라바니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한결 밝아진 소년의 얼굴에 미셸의 기분도 덩달아 나아졌다.
“어때? 할 만해?”
“네! 근데…….”
“응?”
“날이 추워져서 걱정이에요.”
“따뜻해지면 다시 자랄 거야.”
“그래도…….”
비다 라바니가 정원을 둘러보며 말했다.
겨울이 되면 정성스레 가꾼 꽃이 시들 테고, 정원에 물을 주는 일도 계속할 수 없을 터였다.
소년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이해한 미셸은 안타까웠다.
한창 성장할 시기에 끼니를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소년에게 하루 한 시간 일하여 번 10유로가 얼마나 소중한 돈인지 알고 있었다.
“겨울에는 안에서 사람들 안내해 줄래? 우산 받아주거나 눈 치워줄 사람이 필요하거든.”
“아, 네! 시켜만 주세요!”
“지금보다 일할 시간이 늘어나는데 괜찮겠어?”
“괜찮아요!”
그래도 씩씩함을 잃지 않는 모습이 기특했다.
“어디 보자. 6시간 정도 일하면 하루에 60유로 줘야겠네.”
비다 라바니가 입을 크게 벌렸다.
휘둥그레 뜬 눈이 몹시 흔들렸다.
“그렇게나 많이 안 주셔도 돼요.”
“안 그러면 잡혀가. 법이 그래.”
미셸 플라티니를 올려다보던 비다 라바니가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뭘. 일한 만큼 버는 건데.”
“……저 같은 걸 써주시는 분은 대표님뿐이니까.”
미셸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런 말 하면 안 돼. 저 같은 거라니.”
“아. 죄송해요.”
잘못한 일도 없는데 입에 밴 죄송하단 말이 가슴 아팠다.
이슬람교도들의 잔인한 테러 행위에 분개한 프랑스인들의 무슬림 혐오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되레 미셸 본인도 무슬림들이 프랑스 사회에서 배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어린 소년이 무엇을 잘못했기에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라이시테(laïcité).
프랑스는 정치와 종교를 철저히 분리해 두었다.
이슬람교를 포함해 모든 종교의 활동에 자유를 두나, 정치 활동에 종교가 개입해선 안 된다는 사상이었다.
미셸을 포함한 대다수 프랑스인은 이슬람교도가 공식적인 자리, 정치적으로 영향을 주는 장소에서 히잡을 고집하지만 않았다면 80년간 이어진 기나긴 갈등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했다.
“성실하게 일한다고 들었어. 네 나이에 열심히 일하는 게 얼마나 대단한데.”
소년은 쑥스러운 듯 고개를 숙이곤 머리를 긁었다.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 돼서요.”
“지금도 잘하고 있어.”
비다 라바니가 가방에서 작은 스케치북을 꺼냈다.
모두 바스티유 광장의 자유의 수호신 그림이었다.
조잡했지만 같은 그림이 반복되고 그 과정에서 조금씩 나아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림 그렸구나.”
“네. 마르소 작가님이 그러셨는데 만 장은 그려야 제대로 그릴 수 있대요.”
“마르소가?”
비다 라바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계산해 봤는데 13장짜리 스케치북이 1유로더라고요. 파스텔을 아끼면 20장 정도 그릴 수 있을 것 같고요. 2,000유로 정도 있으면 만 장 그릴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만 장을 어떻게 그리는지 걱정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그리기 위해 얼마가 필요한지 계산했단 말이었다.
앙리 마르소가 한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 같은 사물을 만 번이나 그리려는 생각은 또 얼마나 미련하고 순수한가.
미셸은 말문이 막혔다.
“그래서 하루 10유로씩 받으니까 200일 일하면 되겠구나 했는데, 60유로나 주신다고 하시니까. 그. 그럼 다른 것도 그릴 수 있으니까.”
비다 라바니가 웃었다.
“기적 같은 거 없는 줄 알았어요. 거짓말이라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비다 라바니의 어설픈 그림을 살피던 미셸이 물었다.
“화가 되고 싶어?”
“아니요. 제가 어떻게.”
“……그럼?”
“그냥요. 흐.”
미셸 플라티니는 앙리 마르소가 입에 달고 살던 말을 떠올렸다.
화가가 되려는 사람은 결코 화가가 될 수 없고 오직 그림을 그리는 사람만이 위대한 작품을 남길 수 있다던 말이 생각났다.
얼마 전 제롬 케르비엘을 꾸짖을 때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거짓말이 아니야.”
미셸이 비다 라바니에게 스케치북을 돌려주며 말했다.
“기적이란 말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실제로 일어나서.”
“네?”
“불가능한 일이 정말 일어나서 그걸 지칭하려고 만들어진 말이야. 그러니까 기적은 거짓말이 아니야. 일어나는 일이야.”
소년이 작게 입을 벌렸다.
“넌 멋진 화가가 될 거야.”
* * *
20유로를 내고 제체시온에 입장했다.1)
리플렛을 챙겨서 걸어가니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 제체시온을 작게 표현한 모형이 있었다.
지하에 여러 방이 있는 모양이다.
그 옆 벽에는 제체시온을 소개하는 문구가 사진과 함께 있다.
할아버지에게 충분히 설명을 들어서 직접 읽어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계단 앞에 구스타프 클림트의 이름이 붙어 있다.
Gustav Klimt
Beethovenfrieze(1902)
계단을 따라 내려가는 도중에 할아버지가 베토벤 프리즈가 처음 전시된 날을 설명해 주셨다.
“14번째 분리파전이었어.”
앙리 마르소가 58,000명이 방문했다고 말한 전시회다.
“구스타프 말러가 이곳에서 베토벤 9번 교향곡을 지휘했단다. 그야말로 종합예술이지.”
클림트와 같은 이름의 지휘자가 베토벤을 지휘했다니 조금 재밌다.
“실제 연주를 들으며 클림트가 그린 베토벤 프리즈를 볼 수 있었지.”
“생각만 해도 멋져요.”
왼쪽 측랑으로 빠지자 드디어 클림트의 벽화를 볼 수 있었다.
“…….”
높다.
가운데에 벤치가 있는 넓고 긴 방 벽면 위쪽에 그려져 있다.
어찌나 높은지 그림 제일 아랫부분이 할아버지가 목마를 태워주셔도 닿지 않을 만큼 높이 있다.
할아버지가 왼쪽 벽으로 향했다.
황금 갑옷을 입은 기사를 향해 깍지를 낀 나체의 남녀가 눈에 들어왔다.
삐쩍 마른 그들은 기사에게 무언가를 부탁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반면 황금 갑주의 기사 뒤에 두 여인은 평온하고 온화하다.
클림트가 줄곧 보였던 독특한 패턴이 눈에 띈다.
“기사 얼굴을 잘 보렴.”
할아버지 말씀에 시선을 옮겼다.
“꼭 베토벤처럼 생기지 않았니?”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클림트가 베토벤을 저 벌거벗고 야윈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해줄 초인적 인물로 표현했을지도 모르겠다.
“행복의 열망이라고 해.”
<행복의 열망>이라.
알 것 같다.
할아버지가 발을 옮겨 정면 벽화를 향하셨다. 목마를 탄 덕에 할아버지의 의도대로 시선을 옮기게 된다.
편하다.
“적대하는 힘이란 제목이란다.”
조금 전에 봤던 황금 갑주의 기사가 상대할 존재를 표현한 그림 같다.
“왼쪽에 있는 여자는 질병, 광기, 죽음을 상징한단다.”
아마 고르곤 자매를 뜻하는 것이리라.
“스테노, 에우리알레, 메두사라고 하는데 이름은 몰라도 돼.”
보통은 추한 괴물로 표현되는데, 클림트는 기이함과 아름다움을 적절히 섞어 표현했다.
“가운데 원숭이 같은 건 티폰이란다. 상반신은 인간이고 하반신은 뱀인데 어깨랑 팔에 뱀이 100마리나 있대. 그리스 신화에서 가장 센 괴물이지.”
티포에우스.
제우스조차 겨우 이긴 괴물이다.
할아버지 말씀처럼 상반신은 인간으로 알고 있는데, 고릴라처럼 그려두었다.
“그 옆에 빨간 머리 여성은 욕망, 금발은 불순, 배 나온 여자는 절제하지 않는 마음을 상징하지.”
정리하면 질병, 광기, 죽음, 욕망, 불순, 무절제다.
폭력적인 힘을 상징하는 티포에우스까지 그렸으니 황금 갑주의 기사, 베토벤이 싸워야 할 적이 얼마나 거대한지 명확하다.
살면서 부딪칠 수많은 역경 앞에 개인은 너무나도 무력하다.
가난이.
질병이.
이길 수 없는 거대한 힘 앞에 좌절하고 또 좌절하기 마련이다.
그때의 나처럼.
그러나, 그러나 베토벤은 당당히 맞선다.
100여 년 전 이곳에서 울려 퍼졌던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은 기나긴 시련 끝에 희망이 있을 거라고 말한다.
환희를 부르짖는 거룩한 목소리가 이끄는 대로 고통스럽고 외로운 싸움 끝에 희망을 얻을 것이다.
“자, 이다음이 온 세상을 향한 입맞춤이란다.”
<온 세상을 향한 입맞춤>.
이렇게 따뜻한 사람이 또 있을까.
이렇게 낭만적인 작품이 또 있을까.
어떠한 시련이 그대를 상처입혀도 참고 견디면 언젠가 광휘가 비추리란 희망의 찬가.
위대한 음악가가 목놓아 외친 거룩한 메시지가 클림트에 의해 재현되었다.
* * *
1)2021년 기준 제체시온 입장료.
성인 9.5유로(8명 이상의 단체 관람객은 8유로).
초등학생과 26세 미만 학생, 65세 이상 6유로(8명 이상의 단체 관람객은 4.5유로).
10세 미만 어린이 무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