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180화 (135/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180화

36. 성스러운 봄(6)

저녁 식사는 오스트리아식 굴라시와 타펠슈치프로 정했다.

양쪽 모두 처음 먹어보는데, 굴라시는 소고기와 양파, 감자, 콩 같은 게 들어간 매운 스튜였다.

유럽 음식에 물린 할아버지는 빨간 국물을 보고 기뻐하시다가 얼큰하지 않다며 고춧가루를 찾으셨다.

통을 받아들고 굴라시를 덜어낸 앞접시에 고춧가루를 잔뜩 뿌리자, 점원이 깜짝 놀라 그렇게 하시면 안 된다며 할아버지를 말렸다.

어느 정도로 매워야 매운 음식이라고 생각하시는지 감이 안 잡힌다.

“그렇게 드시면 속 아파요.”

“하나도 안 맵다. 먹어봐.”

할아버지가 고춧가루를 잔뜩 뿌린 앞접시를 밀었다.

“전에 라면도 안 맵다고 하셨잖아요.”

“안 맵다니까.”

“방금 고춧가루 엄청 넣으신 거 다 봤어요.”

“헝가리산 고춧가루는 몸에 좋아.”

“몸에 좋아도 매울 수 있잖아요.”

할아버지가 한술 크게 떠먹곤 작게 감탄했다.

“봐라. 할아버지도 먹잖니.”

속이 풀린다며 연거푸 드신다.

무슨 맛일지 궁금해서 나도 굴라시를 조금 덜어내 맛을 봤다.

역시 맵다.

함께 나온 하얀 크림(테이푈: tejföl)을 덜어서 섞어 먹어야 좀 낫다.

“이거랑 같이 먹으니까 맛있어요.”

“할아버진 국물에 사워크림을 섞어 먹고 싶진 않구나.”

“맛있는데.”

이것저것 맛을 보던 중 할아버지가 클림트 이야기를 꺼내셨다.

“베아트리체 어떻더냐.”

돔홀로 가는 계단 위 벽화를 말씀하시는 거다. 나중에 클림트 특유의 황금 패턴을 찾아볼 수 있었던 그림이다.

“역시 하늘에서 뚝 떨어진 천재는 없구나 싶었어요.”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렇지. 많은 사람이 클림트를 두고 전에도 후에도 클림트와 같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없었다고 하는데 그 말이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란다.”

예술가라면 사회 현상과 환경 그리고 다른 예술품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특유의 금을 활용하는 기법도 세공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던 거야. 또 미술원에 들어가 여러 작품을 그려봤던 덕에 키스 같은 작품을 그릴 수 있었던 거란다.”

나쁜 장르, 기법은 없다.

르네상스, 바로크, 고전 모두 나를 채우는 소중한 요소다.

그들을 답습한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그것을 기반으로 더 많은 선택지를 얻을 수 있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한 사람의 힘에는 한계가 있으나 여러 사람이 영향을 주고받으면 가능성은 무한해진다.

구스타프 클림트가 그러했던 것처럼.

“내일은 제체시온 가요.”

여러 나라와 오랜 역사 속에서 자신을 찾아내길 바랐던 구스타프 클림트와 그 동료들이 어떤 작품을 만들었는지 보고 싶다.

“그러자꾸나.”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태호 아저씨예요.”

전화를 받았다.

-훈아, 잘 지내고 있어?

“네. 빈 미술사 박물관 구경하고 밥 먹는 중이에요.”

-크으. 부럽다. 선생님도 건강하시지?

“음식이 입에 안 맞으신가 봐요.”

눈을 마주하자 할아버지가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이신다.

-그거 큰일인데. 아마 나슈마르크에 한인 마트가 있을 거야. 라면 같은 건 살 수 있을걸?

“나슈마르크란 곳에 라면 같은 거 판대요.”

호텔 방이었으면 스피커폰으로 해둬서 할아버지와 같이 들었을 텐데 개방된 곳이다 보니 신경 쓰인다.

“그래?”

할아버지가 반가운 소식에 스마트폰을 꺼내셨다.

나슈마르크에 대해서 찾아보시는 것 같은데, 내일은 제체시온을 구경하고 나슈마르크에 들러야겠다.

-그건 그렇고 휘트니 비엔날레 끝났잖아.

“네.”

마르소 갤러리에서 난동이 났던 날에 뉴욕에서는 휘트니 비엔날레 폐막식이 진행되었다.

시간이 제법 흘렀으니 출품했던 <가면>이 돌아온 모양이다.

-가면이 도착했는데. 놀리기엔 너무 아까우니까 전시할 만한 곳 추려 봤어. 메일로 보냈으니까 시간 날 때 선생님하고 한번 살펴봐.

“아저씨 생각은 어떠세요?”

방태호라면 좋은 조건만 골라서 안내해 줬겠지만 개중에도 가장 마음에 드는 방법이 있었을 거다.

참고하고 싶어서 물었다.

-음. 아무래도 방문객이 많은 곳이 좋겠지. 보안도 철저해야 하고. 보수도 따지지 않을 수 없고.

“네.”

-또 단발성 이벤트보다는 일정 기간 상시 전시되는 쪽이 좋아. 작품 관리 측면에서도 그렇고.

짧은 시간 이곳저곳 옮겨 다니다 보면 여러모로 신경 쓸 일도 많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고 말이다.

-그런 걸 생각하면 난 뉴 테이트 모던이 제일 좋다고 생각해.

“처음 들어요.”

-런던에 있어. 전시품 확보에 적극적이고. 네 작품 전시 문의도 해서 그쪽이 좋지 않을까 싶네.

“먼저 연락이 왔어요?”

-거기뿐이겠어?

기분이 좋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해서 웃었다.

-차근히 살펴봐. 다른 곳도 조건이 나쁘지 않아.

“다 확인해 볼게요.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이게 내 일인데. 그럼 저녁 맛있게 먹고. 선생님께도 안부 부탁해.

“네.”

전화를 끊자 할아버지가 한결 나아진 얼굴로 말씀하셨다.

“훈아, 여기 김치도 판단다. 내일 점심은 여기서 먹을까?”

지도를 확인하니 빈 의과대학 근처 식당이다. 숙소에서 30분 정도 걸릴 것 같다.

“좋아요.”

그렇게 좋아하진 않았는데 막상 안 먹다 보니 아삭하고 시원한 김치 맛이 그립기도 하다.

* * *

다음 날.

개관 시간에 맞춰 호텔을 나섰다.

10월이 다가와서 그런지 포근한 편이었던 어제와 달리 날이 제법 쌀쌀했다.

“날씨가 확확 변하는구나. 춥지?”

“네.”

가지고 온 옷으로는 걸어 다닐 때 추울 것 같다.

“안 되겠다. 가기 전에 옷부터 사야겠어.”

할아버지가 인근 옷가게에서 재킷을 사 주셨다. 두툼한 옷감의 회색 옷인데 할아버지와 세트로 살 수 있었다.

“가자. 가자.”

2번 트램을 타고 어제 들렀던 마리아 테레지아 광장과 빈 미술사 박물관을 지나, 국립 오페라 극장 앞에서 내렸다.

음악의 도시라 그런지 아니면 요제프 황제의 강요 때문인지 몰라도 오페라 극장마저도 위용이 대단하다.

고딕 양식의 건축물 2층과 지붕 위에 음악가로 보이는 이들의 청동상이 세워져 있다.

세 블록 정도 지나쳤을까?

하얀 외벽의 단순한 건물이 나왔다.

링슈트라세의 위엄 넘치는 다른 건물과 달리 단순하지만 인상적인 특징을 가진 건물이다.1)

“저기가 제체시온이죠?”

“그래. 분리파 예술가들의 신전이지.”

할아버지가 씩 웃으셨다.

어제 구경한 빈 미술사 박물관을 포함해서 링슈트라세에 있는 여러 건축물이 과거 예술을 총망라한 르네상스적 신전이었다면, 이곳은 새로운 역사를 써나간 이들을 위한 신전이라는 말씀이시다.

확실히 구스타프 클림트도 그렇게 생각했던 모양.

지붕 위의 황금 구가 꼭 월계관처럼 보인다.

“여기 사는 사람들은 양배추라고 부른대.”2)

“양배추?”

“처음에는 황금 양배추라고 비웃었는데 지금은 애칭으로 된 거지.”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며 할아버지의 설명을 들었다.

“분리파의 정신적 지주였던 헤르만 바는 삭막한 일상과 하찮은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자고 했단다.”3)

“집착이요?”

“그래. 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예전 미술에 대한 거부는 아니었어. 미술계를 좀먹는 사람들에 대한 저항이라고 분명히 했지.”

아마도 고전 미술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들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게 한 요제프 황제와 귀족들을 비난하는 말이리라.

“권력을 향한 힘없고 가난한 예술가들의 투쟁이었지.”

“…….”

이 얼마나 숭고한 이들인가.

빈 분리파는 무엇이 문제인지 직시하고 있었다.

예술가가 예술가로 있으려면 무엇에서부터 벗어나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무엇에도 종속되지 않은 완전한 독립, 분리야말로 예술이 발전할 수 있다는 진실 말이다.

나 또한 그러기 위해 아카데미에서 벗어나 작품활동을 하고, 화가 공동체를 만들고 싶었다.

“건너자.”

신호가 바뀌었다.

“분리파는 정말 다양한 방향에서 노력했어. 베르 사크룸이란 잡지도 발간해서 많은 사람에게 뜻을 전했지.”

베르 사크룸(Ver Sacrum).

성스러운 봄이라는 뜻의 라틴어다.

삭막하기 짝이 없는 미술계에 봄이 오길 소망하는 그들의 바람이 잘 담긴 제목이다.

제체시온 건물 앞에도 황금색으로 적혀 있다.

“그런 활동을 통해 모은 기금으로 이곳 제체시온을 만든 거란다.”

할아버지의 설명을 들으며 제체시온 건물을 올려다보니 감회가 새롭다.

이런 일을 해낸 후대 예술가들이 자랑스럽다.

비록 프랑스 파리 화가들에 비하면 조금 늦었지만, 구스타프 클림트를 비롯한 빈 분리파 예술가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제국의 수도에 그들만의 안식처를 훌륭히 마련했다.

근대적?

아니. 시간대로 분류하지 말자.

진정 자유로운 미술이 시작된 곳에 발을 디디니 예전 생각이 나서 울컥한다.

화가 공동체가 좀 더 잘 되었다면 아를에도 이런 건물을 세울 수 있었을까.

폴 고갱과 로트렉, 안톤 같은 벗들과 좀 더 잘 어울렸다면 더 멋진 일을 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옛 생각이 난다.

* * *

프랑스 국립 예술 협회는 아르누보 공모전 준비로 한창이었다.

특히나 1,700여 명의 참가자가 출품할 작품을 어떻게 전시해야 하는지는 큰 과제였다.

진행방식이 급조된 탓에 초대형 공모전을 위해 모인 내로라하는 큐레이터들조차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후보에 오른 여러 안을 두고 토론이 이어지고 있었다.

“시청 앞 광장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공간이 부족한 건 마찬가지예요.”

“시간을 두고 교대로 보여야죠. 애초에 모든 작품을 한 공간에 전시하는 건 무리입니다.”

한 큐레이터의 지적은 옳았다.

너무나 많은 작품이 들어왔기에 모든 작품을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전시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그런 장소를 구한다고 하여도, 순서를 어떻게 배치하는지에 따라 노출도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르누보 공모전을 준비하는 11명의 큐레이터 모두의 고민이었다.

며칠째 이어진 토론.

반론에 반론이 거듭되던 중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미셸 플라티니가 입을 열었다.

“모든 작품을 볼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야 해요.”

“불가능해요. 누구도 강요할 수 없는 일이잖습니까.”

“그럴 수만 있다면 우리가 이렇게 고민하고 있지 않아도 되겠죠. 좋은 방법이라도 있습니까?”

미셸이 주변을 둘러본 뒤 차분한 목소리로 생각을 전했다.

“장소는 중요하지 않아요. 작품이 어디에 있든 사람들이 찾아가고 싶게끔 이야기를 들려줘야 해요.”

큐레이터들이 불신의 눈빛을 보내는 와중에도 미셸 플라티니는 흔들리지 않았다.

“봄이 오고 있다고 말이죠.”

* * *

1)사진 출처:

Secession building by Joseph Maria Olbrich, Donar Reiskoffer, 2008, CC BY 3.0

2)Krauthappel: 크라우트하펠

3)헤르만 바(Hermann Bahr): 우리는 메마르고 황량한 일상에 대하여, 완고한 비잔틴 제국에 대하여, 모든 악취미에 대하여 전쟁을 선언하려고 한다. 우리 제체시온은 구시대에 대한 현시대의 투쟁이 아니라 미술가를 자청하지만 이해관계를 갖는 이들을 상대하는, 미술의 발전을 위한 투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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