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178화
36. 성스러운 봄(4)
“앞으로 어떤 그림을 그릴지 생각해 봐.”
다음 날 아침 앙리 마르소에게 배웅을 받아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으로 향했다.
직항 티켓을 구하지 못해서 경유해서 가야 했는데, 고맙게도 비행기를 빌려주었다.
돈이 얼마나 많으면 비행기를 가지고 있을까 싶고 또 비용이 만만치 않을 것 같아 걱정하니, <사랑7>을 받은 것에 비하면 별일 아니란다.
망할 놈인지 고마운 사람인지 한쪽만 했으면 좋겠다.
아무튼 마르소의 전용기답게 안락한 공간이다. 의자도 널찍하고 푹신해서 편하다.
마음에 드셨는지 할아버지는 이미 깊이 잠드셨다.
‘앞으로 어떤 그림을 그릴지라.’
구스타프 클림트를 염두에 둔 말이리라.
앙리 마르소는 나와 클림트를 특별하게 여기는 듯하다.
확실히 어제 나눈 대화를 떠올려 보면 닮은 구석이 없지 않아 있다.
정통 회화에 능했고 어린 시절부터 성공했으며, 주변에서 따르는 인물이라는 점은 나와 다르나 결국에는 자신을 표현하는 데 이르렀다는 점은 유사하다.
그런 행적이 앙리 마르소에겐 큰 의미로 다가간 듯싶다.
“…….”
나 역시 다르지 않다.
다시 태어난 후로 줄곧 팔기 위한 그림을 추구했다.
다시는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기에 어떻게 하면 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까 고민했었다.
반면 구스타프 클림트는 황제와 귀족, 대중을 위한 그림을 내지 않겠다고 선언했으니 나와는 방향이 다르다.
다만 매력적인 답이라는 걸 부정할 수 없다.
<키스>와 같은 황금 시기 작품이 도리어 그의 이름을 더욱 값지게 했음은 분명하다.
클림트가 만약 본인을 담아낸 작품을 내놓지 않았더라면 지금과 같은 거장으로 추앙받진 않았을 것이다.
나 또한 비록 생전에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결국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이름을 남겼으니, 고유함을 추구하는 것이 옳은 걸까?
아니.
이 문제의 답은 이분해서 내릴 수 없다.
나도 클림트도 결국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었기에 역사에 기록될 수 있었다.
나로서 존재하되 사람들이 따라올 수 있을 정도로 매력적이라면 고민할 이유가 없으나 그런 일이 쉬울 리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가갈 수 있을까.
앙리 마르소는 이러한 갈등 속에서 자신을 갈고닦기를 선택했다.
강박증처럼 보이는 수백 점의 자화상은 아마 자신을 가꾸고 단련하는 과정이었으리라.
이해를 구하지 않더라도 남들이 우러러보도록 하는 아주 힘든 길 말이다.
나는?
작품을 팔고 싶다고 해서 나를 배제하지도 않았으니 나름 균형을 맞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으로 만족하는가 싶으면 고개를 끄덕일 수 없다.
더 멋진 그림을 그리고 싶다.
더 많은 사람과 대화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까.
답은 결코 하나가 아니다.
클림트도, 마르소도 나름의 기준을 세워 선택했을 뿐.
그들이 위대한 화가로 존재할 수 있음은 각자의 답을 우직하게 밀고 나간 덕이다.
그때의 나처럼 끊임없이 고민하고 좌절하고 다시 일어서길 반복한 결과다.
무슨 선택을 했는지는 크게 중요치 않다.
“…….”
약 410억 원.
환율, 주가 변동 등의 이유로 정확하진 않지만, 변호사 토마스 아서가 정리해 준 자료에 따르면 부모님은 내게 상상도 못 할 만큼의 재산을 물려주셨다.
상속세를 제해도 내 돈을 합하면 대충 410억 원이라는 액수가 나온다고 한다.
훗날 할아버지가 내게 재산을 물려주실지는 모르나 그러지 않는다고 해도 이미 먹고 살 걱정을 할 시기는 아니라는 거다.
생계 걱정을 안 해도 된다니.
평생 돈을 벌기 위해 일하지 않아도 된다니.
이 얼마나 비현실적이고 가슴 벅찬 일이란 말인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붓을 놓을 순 없다. 돈은 그림을 그리기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될 순 없다.
단지 족쇄에서 벗어난 것이 중요하다.
생존에 간절했던 지난날과는 다른 입장이 되었으니, 이제 또 다른 길을 찾을 시간.
당장은 여러 사람과 문화를 접하며 소통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위대한 작품과 멋진 예술가들에게 감동하고 내 이야기를 펼치고 또 사람들이 내 작품을 감상하는 일이 너무나 즐겁다.
고립된 삶에서는 결코 느껴볼 수 없었던, 살아간다는 기분을 만끽 중이다.
“…….”
자꾸만 입술이 올라간다.
오늘은 클림트와 만나겠지만 내일은 또 누구를 알게 될지, 그다음 날은 어떤 작품이 감동을 줄지.
그 과정에서 난 또 어떤 그림을 그리게 될지 상상하면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래.
깊이 고민하지 말자.
대중을 향하고, 나를 위하고 그런 고민은 아주 표면적인 문제다.
시간이 아깝다.
그런 고민을 할 바에야 더 많이 그리고 더 많은 사람을 알아가자.
그것이 나를 찾는 길이고 동시에 외롭지 않은 길이다.
“후.”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도착까지 한 시간 정도 남은 듯.
달리 할 일도 없겠다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빈 관광 책자를 살폈다.
표지를 넘기자 첫 장에 링슈트라세(Ringstraße)가 소개되어 있다.
빈 중심부를 이루는 순환 도로라고 하는데, 환상 도로라고도 한단다.
19세기 오스트리아의 마지막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도시 계획으로 설립된 거리라고 설명되어 있다.
도로를 따라 주요 관광지가 이어진 모양이다.
내가 구경하고 싶은 곳은 구스타프 클림트와 동료들이 세웠다는 제체시온과 <키스>가 전시된 벨베데레 미술관.
두 곳 모두 순환 도로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다.
빨리 만나보고 싶다.
“드르렁. 쿠루르릅.”
할아버지가 코를 고시는 걸 보니 피곤하신 것 같다.
오늘은 한 곳만 보고 숙소에서 푹 쉬자고 말씀드려야겠다.
* * *
공항에서 빈 중심가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점심은 비행기 안에서 해결했기에 숙소에 짐을 풀고 곧장 링슈트라세를 찾았다.
“와.”
감탄이 절로 나온다.
황제의 위엄을 세우기 위해 계획된 거리답게 고딕 양식, 바로크 양식 등 화려하고 장엄한 건물로 가득하다.
“환상 도로답지?”
“네.”
오스트리아의 마지막 황제가 부린 노욕이라곤 해도 웅장하고 멋스러운 건 사실이다.
“제체시온은 저쪽인가 봐요.”
“할아버지 생각엔 미술사 박물관을 먼저 들르는 게 좋을 것 같구나.”
“거기도 클림트 작품이 있어요?”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셨다.
무슨 생각이 있으시겠지 싶어 군말 않고 걸었다.
자연사 박물관을 지나자 미술사 박물관 건물 사이에 널찍하게 자리한 광장이 눈에 들어왔다.
삐져나온 나뭇가지 하나 없는 걸 보면 조경사들이 공들여 관리한 모양이다.
“마리아 테레지아 광장이란다.”
광장 중심에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높은 탑이 있다.
그 위에 마리아 테레지아 동상이 있는데, 말을 탄 기사들이 그 주변을 지키고 있다.
자애로우면서도 위엄 넘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대단한 황제였단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으로 유명한 마리아 테레지아를 모르는 유럽인은 없을 것이다.
그 대단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에 맞서 큰 상처를 입지만 결국 나라를 지켜낸 위인이다.
그런데 다른 황제는 안 보인다.
“프란츠 요제프 1세가 링슈트라세를 만들 때 마리아 테레지아 동상은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두었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자랑이니까요.”
“그래. ……합스부르크 왕가도 알아?”
뭔가 설명하시려던 할아버지가 문득 고개를 돌리셨다.
잠시 당황했다가 둘러댔다.
“학교에서 배웠어요.”
“음. 시현이도 그렇고 그 학교는 점점 더 공부하기 힘든 것 같구나. 아직 안 배워도 될 이야기를 가르치고. 괜히 보냈나.”
할아버지와 같은 생각이다.
유럽사를 배우진 않지만 한국 초등학교는 아이들에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과한 지식을 요구한다.
더 심각한 일은 그런 학교 수업으로도 부족하다고 여기는 분위기다.
사교육을 받은 아이들은 그런 학교 수업조차 시시하게 느낀다.
“학교 시험 점수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받지 않아도 돼.”
“네.”
할아버지와 함께 표를 끊고 빈 미술사 박물관에 들어섰다.
19세 미만은 무료로 입장할 수 있어서 할아버지만 20유로를 냈다. 어린 몸이 불편한 건 있어도 이런 점에선 이득이다.1)
어릴 때 많이 돌아다녀야겠다.
“…….”
맙소사.
할아버지와 함께 여러 미술관을 다녔지만 이런 곳은 또 처음이다.
웅장함은 물론이고 그 화려함은 비할 데가 없다.
원을 이룬 기둥은 아치형으로 이어져 천장에 돔을 이루었다.
가운데가 뻥 뚫려 있다.
건축학은 잘 몰라도 하중이 가장 몰릴 수밖에 없는 천장 가운데를 비워둘 정도로 정교하게 지어진 곳임을 알 수 있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다.
조명을 받은 천장은 은은한 황금빛으로 빛나며, 요소요소 빈틈없이 조각되어 이 공간 전체가 하나의 예술품이다.
계단 장식, 바닥, 기둥 모두 과하다 싶을 정도로 호화롭다.
중앙 계단 위를 올려다 보니 양쪽에 방패를 안은 사자가 용맹히 서 있다.
그 가운데 켄타우로스를 제압하는 테세우스를 표현한 대리석상이 빨리 올라오라고 손짓한다.2)
한달음에 계단을 올랐다.
“아.”
이 얼마나 역동적인가.
당장에라도 몽둥이를 내려칠 것만 같은 테세우스와 허리가 꺾인 채 저항하는 켄타우로스.
고전적인 스타일이나 저 섬세한 근육 표현과 역동적인 자세에 의한 조형미는 감탄할 만하다.
고전주의가 부정적으로 비치는 건 권력층이 그것만을 요구했기 때문이지, 작품 자체는 아름답기 그지없다.
“위에도 봐야지.”
“네?”
할아버지 말씀에 고개를 들곤 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
신이시여.
목이 아플 정도로 젖혀야 볼 수 있는 높은 곳에서 천사가 강림하고 있다.3)
천장화임을 감안해서 시점을 아래로 두어, 그러지 않아도 까마득히 높은 천장이 하늘처럼 느껴진다.
왼쪽 아래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라파엘로 산치오가 대화를 나누는 듯하고 고뇌에 빠진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도 보인다.
르네상스 시대의 세 천재를 마치 신적인 존재로 추앙하는 그림이다.
어마어마한 대작이다.
“미하이 문카치의 르네상스의 절정, 신격화란다.”
할아버지가 제목을 영어로도 알려주셨다.
Apotheosis of the Renaissance.
Apotheosis를 말씀하실 때 절정이란 단어와 신격화란 단어를 함께 말씀해 주신 이유를 알 것 같다.
한국어로 완벽히 대응하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숭상하다?
적절한 단어를 찾진 못했지만 확실한 것은 이 당시 오스트리아가 어떤 미술을 추구했는지 알 것 같다.
이곳을 비롯한 링슈트라세는 로마네스크,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고전주의와 같은 과거를 위한 신전이다.
* * *
1)2021년 기준 빈 미술사 박물관 입장료는 일반 16유로, 노인과 학생, 공무원은 12유로다(부가세 5% 포함).
19세 미만이라면 무료 입장.
노인의 경우 65세 이상 연금 수급자 및 연금 수급자 ID가 있어야 하기에 고수열은 일반 가격으로 입장했다는 설정.
2)테세우스와 켄타우로스, 안토니오 카노바, 1819, 대리석 조각, 높이 340㎝.
3)미하이 문카치(Mihaly Munkacsy), 르네상스의 절정(Apotheosis of the Renaissance), 1888, 프레스코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