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177화
36. 성스러운 봄(3)
사정을 모르는 입장에서는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을 거다.
“아무튼 그래서요?”
“그렇게 주류 미술계에 성공적으로 정착했지만 클림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어. 뜻있는 사람을 모아 빈 분리파를 만들었지.”
예술의 새로운 길을 연 사람들이라고 들은 적 있다.
왕과 귀족의 요구를 들어주어 큰 성공을 거둔 남자가 그 견고하고 안락한 울타리에서 스스로 벗어나다니.
그와 동료들의 용기가 가상하다.
구스타프 클림트가 오직 본인에 의한 예술을 시작하게 된 과정이 흥미롭다고 말씀하신 할아버지와 같은 생각이다.
“첫 전시회 포스터만 봐도 재밌지.”
할아버지가 스마트폰으로 빈 분리파의 첫 전시회 포스터를 보여주셨다.1)
보자마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과연 새로운 예술을 시작하겠다는 사람들의 첫 전시회를 장식할 만한 포스터다.
신화를 모티프로 한 그림인데, 상단은 아마 미노타우로스와 테세우스를 표현한 것이리라.
이야기 속 테세우스는 크레타 왕국의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처치하기 위해 미궁에 들어간다.
길을 잃지 않고자 실타래를 풀며 미궁을 탐색한 테세우스는 미노타우로스와 혈전을 벌여 끝내 괴물을 물리치고 영웅이 된다.2)
굳이 그 이야기를 포스터에 표현한 이유는 기존 주류 미술계를 미노타우로스에 비유하고 클림트 본인과 분리파를 테세우스에 빗댄 것이리라.
“재밌네요.”
“알아보겠어?”
“네. 그런데 굳이 테세우스에 투영한 건 의아해요.”
할아버지가 좀 더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 호응해 주었다.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을 처치하는 데까지는 이해할 수 있는데 이후 이야기는 슬프잖아요.”
미노타우로스를 죽인 테세우스는 자신을 도왔던 공주 아리아드네와 함께 조국 아테네로 돌아가려 한다.
하지만 술의 신 디오니소스가 끼어들어 공주를 두고 가도록 했다.
사랑을 잃은 테세우스는 극심한 상실감에 아버지와 한 약속을 잊고 만다.
살아서 돌아오면 흰색 돛을, 죽었다면 검은색 돛을 걸기로 한 아들의 배가 검은 돛을 달고 돌아오자 그것을 본 테세우스의 아버지는 절망한 나머지 그대로 바다에 뛰어들어 죽고 만다.
테세우스는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쳐 영웅이 되었지만 사랑하는 사람 둘을 잃은 것이다.
“알고 그린 건 아니지만 불행히 끝나는 건 비슷하군.”
마르소가 말했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말년이 그리 순탄치는 않았던 듯하다.
“이 방패도 재밌어요.”
“그렇지.”
포스터 우측에 서 있는 문명의 신 아테나가 든 방패가 눈에 띈다.
아이기스(Aegis: 제우스가 딸 아테나에게 준 청동 방패)에 붙여진 머리는 메두사.
위엄과 신성함으로 신의 권위를 표현했던 여러 작품과 다르다.
구스타프 클림트가 이 포스터를 무슨 생각을 하며 구상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뱀처럼 꼬불꼬불한 머리만 남기고 얼굴은 익살스럽게 표현한 것은 아마 기존 화풍에 대한 도전이자 조롱일 것이다.
조금 귀엽다.
“전시회는 잘 됐어요?”
“그럼.”
“14번째 전시회는 58,000명이 찾았어.”
마르소의 부연 설명을 믿을 수 없다.
교통도, 홍보 수단도 마땅치 않았던 당시에 주류 미술을 벗어난 작품을 보러 그 많은 사람이 다녀갔다니.
현재 미술계가 침체기라곤 해도 당시에 비할 바는 아니다.
인구수부터 차이가 난다.
19세기 오스트리아의 인구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나, 유럽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사는 프랑스의 인구가 3,800만 명 정도였다.
현재 프랑스에 7,000만 명이 넘게 사는 것을 감안하고.
지금처럼 누구나 미술을 즐길 환경이 아니라 귀족과 일부 부르주아에 한정되어 있었음을 고려하면, 구스타프 클림트와 빈 분리파의 전시회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 14번째 전시회가 베토벤을 기리는 자리였단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
음악은 잘 모르지만 오늘 오후에 9번 교향곡을 비롯해 몇 곡 들어본 적 있다.
빈센트로 살 적에도 그의 위명은 대단해서 그가 살았던 빈은 물론이고 전 유럽이 그를 사모했었다.
“1902년. 20세기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 열렸는데 뭔가 이상하지 않니?”
할아버지의 질문에 무엇을 놓쳤나 싶어서 고민해 보았다.
“아.”
할아버지가 평소와 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 생각을 먼저 말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다.
“과거 예술가들에게서 벗어난다고 했었잖아요.”
“그렇지.”
할아버지와 마르소는 줄곧 구스타프 클림트와 빈 분리파가 기존 권력, 기존 예술에 저항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100년 전에 활동했던 루트비히 판 베토벤을 기리는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왜 그랬어요?”
“권력으로부터 벗어난 최초의 예술가니까.”
“또 고전적인 음악 양식을 허문 사람이기도 하지.”
앙리 마르소가 대신 답했고 할아버지가 설명을 덧붙였다.
대단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처음으로 귀족에게서 독립한 음악가라는 건 몰랐다.
“그도 한때는 후원자로부터 도움을 받았지만 결국에는 악보를 팔고 공연이나 강의 같은 걸 해서 자기 힘으로 살아갔단다.”
모든 예술가가 후원자를 등에 업고 그들이 바라는 것을 만들던 시대.
기나긴 역사 속에서 예술가가 예술가로 존재할 수 있었던 시기는 얼마 되지 않는다.
그전까지는 교회 또는 귀족의 사용인일 뿐이었다.
그러한 역사를 깨부순 남자라니.
순간 점심때 들었던 그의 아홉 번째 교향곡 합창이 떠올랐다.
장대하게 시작된 대서사시는 굴곡 끝에 희망을 노래했다.
자신이 열어젖힌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듯 말이다.
“예술가가 예술가로 존재할 수 있음을 증명했으니 빈 분리파에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귀감이었지.”
“그는 특별해.”
앙리 마르소도 나섰다.
“구스타프 클림트가 권력자도 대중도 아닌 본인을 위한 예술을 하겠다고 했지.”
고개를 끄덕였다.
“베토벤도 마찬가지야. 그는 자신이 누군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곡에 담았어. 그리고 그것을 대중들에게 어떻게 전달해야 하는지 가장 잘 아는 음악가였고.”
“분리파는 베토벤의 그런 창조성을 높이 산 거란다. 비단 음악만의 일이 아니라 모든 예술에 영향을 끼쳤지.”
알면 알수록 대단한 인물이다.
지금에 와서는 예술품에 자신을 담는 일이 당연하게 느껴지겠지만 18세기와 19세기에는 전혀 그러지 못했다.
철저한 착취 구조로 인해 대중은 구매력을 갖출 수 없었고, 살기 위해선 신을 모방하고 귀족을 찬양해야 했다.
그런 환경을 변화시켰으니 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그 때문에 평범한 화가들도 무시했지만.”
“네?”
“1909년에 클림트가 파리를 들렀는데, 친구들이 물었어. 요즘 좋은 그림이 뭐냐고.”3)
1909년이라면 툴루즈 로트렉, 고갱 등 나와 함께했던 이들도 모두 죽은 뒤다.
클림트와 동시대에는 어떤 화가가 활약했을지 기대된다.
“뭐라고 했는데요?”
“쓰레기.”
잘못 들었나?
“쓰레기?”
“쓰레기.”
마르소가 농담할 리는 없는데 믿기지 않는다.
못 그려서 그런 말을 했을 수도 있지만 전시될 정도의 작품이 그럴 가능성은 적다.
추구하는 방향이 다름을 인정하지 않았던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마음에는 드는 화가가 없진 않았지. 아마 그 작가의 작품을 본 기억 때문에 더 실망했을 수도 있을 거야.”
구스타프 클림트를 재고하고 있을 때 할아버지가 의외의 말을 꺼냈다.
“그의 영향이 묻어난 작품도 그릴 정도로 좋아했단다.”
그 거만한 화가가 그렇게 좋아한 화가가 대체 누굴까.
“누군데요?”
“빈센트 반 고흐.”4)
“……왜요?”
할아버지는 언제나 그러했듯 답을 주지 않았다.
빈에 가서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을 직접 보면 자연스레 알 수 있을 테니 스스로 생각할 수 있게 배려해 주시는 거다.
내일이면 그를 만날 수 있으니 궁금함은 잠시 묻어두자.
“성격파탄자끼리 통하는 게 있었나 보지.”
앙리 마르소가 체육관을 나서며 말했다.
저게 오늘 싸우려고 날을 잡았나 보다.
* * *
셰리 가도가 멋진 저녁을 마련해 주었다.
마르소를 도와주어서 고맙다고 거듭 인사하는데, 사실 도움은 내가 받았던지라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니? 그래도 그러면 안 돼. 위험하니까.”
“네.”
“어쩜 이렇게 씩씩할까. 어떻게 이렇게 손자분을 너무 잘 키우셨어요?”
“하하. 감사합니다. 마르소 군도 다시 보았습니다.”
앙리 마르소란 이름만 들어도 불쾌해하셨던 할아버지가 무슨 일로 그와 평범하게 대화하나 궁금했는데, 날 도와줘서 그런 듯하다.
<사랑7>을 주신다는 것도 그렇고 두 사람이 더 이상 친해지지 않길 바란다.
“합.”
가리비 관자를 작게 썰어 입에 넣었다.
버터 향이 은은하게 퍼지는 가운데 푹 익은 양파의 단맛이 관자의 야들야들한 식감과 어울린다.
씹을수록 향미가 깊어지니 마치 미뢰가 어디까지 예민해질 수 있나 시험하는 것 같다.
언제까지고 즐기고 싶지만 입속에서 녹아 사라지는 탓에 안타깝다.
그 마음을 달래려 자꾸만 손이 간다. 이대로라면 열 접시도 먹을 수 있겠다.
“맛있어?”
“네. 관자가 어떻게 이렇게 부드러워요?”
보통 관자라고 하면 쫄깃쫄깃한 식감이 각별하거늘 이토록 부드러우니 신기하고 또 새롭다.
“칼집을 냈지?”
정말 촘촘히 칼집이 나 있다.
어찌나 정교한지 누르거나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모르겠다.
이 접시 하나를 채우기 위해 이렇게 공을 들였으니 다른 음식은 또 어떠했을까.
“감사합니다. 정말 맛있어요.”
“많이 먹으렴.”
멋진 저녁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앙리 마르소의 를 한 번 더 보기 위해 그의 작업실을 찾았다.
차를 마시며 황칠의 깊은 멋을 감상하던 중 할아버지도 허 하고 감탄하셨다.
“이건 어디서 구했나.”
“아르센, 어디였지?”
“거문도란 섬입니다.”
“흐음. 천연기념물 아니었나?”
“전문적으로 재배하는 업장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식자재로 유통하던 걸 구입해 사용 중입니다.”
아르센이 황칠나무를 어떻게 구했는지 설명했다.
할아버지는 에서 눈을 떼지 못하신다.
“포기했었는데. 혹시 연락처를 알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평소에는 또 어떤 작업을 하나 궁금해서 그의 작업대를 살폈다.
한쪽에 종이가 한 무더기 쌓여 있다.
잘 정돈되어 새 종이인 줄 알았는데 들춰보니 전부 스케치가 되어 있다.
그가 구상에 얼마나 공을 들이는지 알 수 있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또 다른 한편에 쪽지가 붙어 있다.
꽤 오래전에 쓴 것처럼 번진 곳도 있고 얼룩이 묻어 있으나 글은 확실히 읽을 수 있다.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볼까.
보잘것없는 사람, 정신병자, 혹은 기분 나쁜 사람일지도 모르지.
앞으로도 어떤 성과도 내지 못할 사람, 바닥 인생으로 볼 것이다.
좋다. 그들의 생각이 옳더라도 상관없다. 정신병자, 밑바닥 인생을 사는 사람이 가슴에 무엇을 품고 있는지 그림을 통해 보여주겠다.5)
언젠가 내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다.
그것을 마르소가 옮겨 적은 것 같다.
‘다른 사람은 아니라 해도 너만은 믿어야 할 거 아니야!’
제롬 케르비엘이라고 했던가.
마르소가 마르소 갤러리에서 난동 부린 인간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힘들 때마다 이 문장을 보고 자신을 다독였을까?
오늘 여러모로 심기를 거슬렀지만 너그럽게 용서해주도록 하자.
* * *
1)Poster for the First Exhibition of the Vienna Secession, 구스타프 클림트, 1898, 석판화
2)구전된 신화인 만큼 미노타우로스를 처치하는 과정에는 여러 이야기가 있습니다.
또한 아리아드네와 떨어진 이유에 대해서도 제각각 이야기가 달라, 가장 널리 알려졌다고 판단한 이야기로 서술하였습니다.
3)당시 빈은 자국의 예술성을 보존한다는 명목으로 타국 예술품을 전시조차 하지 않는 경향을 보였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클림트에게 당시 유럽 미술의 수도나 다름없던 파리는 큰 충격을 주었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철학>으로 금메달을 수상하며 파리를 방문했고.
클림트가 기획한 마지막 전시회가 열린 1909년에도 가을 여행으로 파리를 들렀다.
한편 클림트가 파리에 전시된 작품을 비난했다는 이야기는 전원경 미술평론가, 예술작가가 클래식 클라우드에서 강의한 “황금빛 공간, 라벤나로 떠나다 with 전원경”의 내용 중 17분 19초부터 17분 28초까지의 발언을 참고하였다.
4)1906년 클림트는 빈센트 반 고흐의 전시회에 참석했고 그의 역동적인 붓 터치에 영향을 받았다.
출처: “Important Klimt Landscape Leads London Impressionist Sale”, Sotheby’s, Feb 10, 2017.
본문
“In 1906, Klimt attended an exhibition of works by Vincent van Gogh in Vienna, and his subsequent appreciation of van Gogh sparked a significant shift in his appreciation of paint. Drawing on this, the dynamic brushwork and vibrancy of Bauerngarten reflect this turning point in Klimt's style.”
5)1882년 7월에 보낸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