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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반 고흐-176화 (131/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176화

36. 성스러운 봄(2)

아르센이 고용주의 바람대로 고훈에게 전화를 걸자 차량 내부 스피커를 통해 발신음이 울렸다.

-마르소?

걱정했던 것과 달리 목소리가 밝았다.

“유모가 저녁 먹으러 오래.”

-정말요?

“어.”

-좋긴 한데. 갑자기?

“싫으면 말든지.”

-할아버지, 셰리 아주머니가 저녁 먹으러 오라는데 가도 돼요?

-안 될 것 있겠느냐. 할아버지 목욕할 테니 통화 끝나면 들어와.

-네.

고훈이 고수열과 대화를 마치고 전화기에 입을 댔다.

-갈게요.

“그래.”

두 사람 사이에 대화가 끊어졌다.

고훈은 그가 달리 할 말이 없는 거라 여겨 전화를 끊으려 했다.

-그럼 이따 봐요.

“너.”

앙리 마르소가 괜히 뜸을 들였다.

“나중에 후회할 짓 하지 마.”

다친 곳은 없냐, 무섭진 않았냐 같은 간지러운 말을 입에 담을 수 있을 리 없었다.

하여 돌려 말했거늘 고훈의 목소리가 갑자기 우울해졌다.

-……맞아요.

건방진 꼬맹이가 순순히 긍정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앙리 마르소가 내심 당황했다.

어제 일이 제법 큰 충격으로 남았던 것이 분명했다.

아드레날린이 분비될 때는 잘 몰라도 이성을 되찾은 뒤에 공포를 느낀 거라 생각했다.

“그러니까 왜 무턱대고 나서서 일을 복잡하게 만들어?”

베토벤 9번 교향곡을 듣고 환희에 벅차 마틴 얀센에게 기억 폭행 당한 일을 잠시 잊었던 고훈이 침울해졌다.

-……그러게요.

앙리 마르소가 턱을 당기며 고개를 비틀었다.

‘이런 놈이 아닌데.’

무슨 말만 하면 바득바득 기어오르던 녀석이 아니었다.

고분고분 나오는 걸 보니 상태가 예상보다 심각해 보였다.

“쓸데없는 생각 마. 원래 그러면서 크는 거야.”

아르센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뛰어난 성능의 차속감응형 조향장치가 없었더라면 핸들이 크게 돌 뻔했다.

“운전 똑바로 해.”

“죄송합니다.”

아르센이 식은땀을 흘렸다.

앙리 마르소가 고훈을 특별하게 여기는 줄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설마 위로할 거라곤 조금도 생각지 못했다.

-마르소도 조심해요. 나중에 이불 차지 말고.

“뭔 소리야?”

-아무리 좋은 뜻이라도 거지 같이 말하면 오해 산다는 거 이번 일로 알았을 거잖아요.

서로 말하려는 바가 달랐기에 앙리 마르소는 고훈이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사람들한테 뭐가 문제였다고 말하면 좋았잖아요. 그럼 시위대에 휘둘리는 사람도 없었을 테고.

“시끄러워.”

-그리고 조심 좀 해요.

“뭘.”

-어제 사람들 다 보는 데서 미셸이랑 그랬잖아요. 눈치 빠른 사람은 다 알아봤을 텐데.

“…….”

앙리 마르소가 어제 일을 떠올렸다.

놀란 미셸이 달려와 그녀를 달랬던 기억이 선명했다.

사적인 관계를 숨기기 위해 외부 활동은 물론 갤러리 직원과 저택 사용인 앞에서 철저히 업무적으로 서로를 대했고 그것은 두 사람과 고훈만의 비밀이었다.

그것이 차량 내부 스피커를 통해 생생히 전달되었다.

백미러를 통해 앙리 마르소와 아르센이 눈을 마주쳤다.

아르센이 황급히 시선을 피하자 앙리 마르소가 이를 갈았다.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으나 눈치챈 기색이었다.

“끊어.”

통화를 마친 앙리 마르소와 아르센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

아르센은 고용주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작가님.”

“…….”

“전 아무것도 모릅니다.”

“몰라야지.”

아르센은 마치 당장에라도 자신을 잡아먹을 듯한 앙리 마르소의 눈치를 보다가 이내 사실을 털어놓았다.

“실은.”

앙리 마르소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저택 내 어지간한 사람은 알고 있습니다.”

“뭘.”

“두 분 사이.”

“……뭐?”

“한 달에 한 번 휴가 보내실 때마다 플라티니 대표께서 방문하시니 다들 그럴 거라고…….”

앙리 마르소가 이마를 짚었다.

“또 이름을 그렇게 저장해 놓으셔서.”

미셸과 크게 싸운 뒤로 그녀의 전화번호를 아무르란 이름으로 고쳐 저장한 일을 떠올렸다.

앙리 마르소가 눈을 감았다.

핸드폰을 들고 다니기 귀찮아 아르센에게 맡기던 걸 간과한 자신을 탓했다.

“하트도 붙이셨고.”

“닥쳐.”

앙리 마르소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복잡한 머릿속을 대충 정리한 그는 인내심을 가지고 가장 중요한 일부터 확인했다.

“유모는.”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두 분이 숨기는 게 아마 가도 씨 때문일 것 같아서 다들 모른 척하기로 했습니다.”

앙리 마르소가 주먹을 폈다 쥐었다 반복하다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아르센.”

“네.”

“잊어.”

“잊겠습니다.”

잊지 않으면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입을 틀어막겠다는 뜻이라 아르센은 조금도 고민하지 않았다.

* * *

할아버지와 함께 앙리 마르소네 집을 방문했다.

체육관에 있다고 해서 아르센의 안내를 받아 찾아가니 샌드백을 두들기고 있다.

뭐가 그리도 화가 나는지 때려서 터뜨릴 기세였다.

“자세가 좋군.”

“……좀 하십니까?”

“소싯적에 했었지. 팔꿈치를 좀 더 붙여보게.”

운동하는 사람들끼리 통하는 구석이 있나 보다.

할아버지에게 조언을 받은 마르소가 몇 번 더 샌드백을 때렸다. 소리가 좀 더 울리는 듯하다.

복싱에는 관심이 없어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내일 일정을 짜보던 중 마르소가 말을 걸었다.

“내일 간다고?”

“네.”

대화를 이어갈 생각이 조금도 없는 것 같다.

“클림트 좋아해요?”

물을 마신 그가 입가를 닦곤 말했다.

“아니.”

전에 통화를 나눌 땐 괜찮다고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에 대해서도 꽤 이야기를 나눠서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라니 의아하다.

“전에는 괜찮다고 했잖아요.”

“그림은.”

그림은 좋아하면서 작가는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작품과 작가를 완벽하게 분리해서 볼 수 있는 사람은 드물고 또, 그것이 가능할까 싶기도 하다.

모든 작품은 작가의 자화상이니까.

“그럼 싫어해요?”

“쉽게 말할 사람이 아니야.”

앙리 마르소가 수건으로 땀을 닦아내곤 말했다.

“개인으로 봤을 땐 저급한 난봉꾼이고 화가로서는 가장 이상적인 남자였지.”

앙리 마르소가 타인을 이렇게까지 극찬한 적은 처음이다.

아니, 욕인가.

“이상적?”

“반 고흐와 비교하면.”

왠지 불길하다.

“어떤 점이요?”

“그가 바랐던 일을 클림트는 전부 이뤘거든. 반 고흐가 가지지 못했던 걸 전부 가졌고.”

할아버지는 앙리 마르소가 구스타프 클림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신 모양이다.

팔짱을 끼고 묵묵히 들으려 하시는데, 난 듣고 싶지 않다.

“인상주의자들이 했던 것처럼 분리파 역시 기존 권력층에서 벗어나려 했어.”

인상주의자라고 하면 마네와 모네, 르누아르, 드가 정도를 말할 수 있다.

모두 내가 스승처럼 여겼던 이들이고 나 또한 그들처럼 프랑스 왕립 미술원의 가르침을 거부했다.

분리파라고 하면 그 창시자라고 하는 구스타프 클림트를 언급하는 것이리라.

“클림트는 대중적인 성공으로 그것을 완벽히 이뤘고.”

이미 굳건히 자리 잡은 권력에 정면으로 부딪쳐서 깨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그것을 넘어서 부를 틀어쥔 이들에게서 경제적으로 완전히 독립할 수 있었다면 역사의 방향을 틀어놓았다고 할 수 있다.

“혼자 활동했던 반 고흐와는 달리 따르는 사람도 많았지.”

“…….”

오늘따라 왜 자꾸 남의 아픈 곳을 찌르는 사람이 많은지 모를 일이다.

“또 차이기만 했던 반 고흐랑 달리 애인도 많았고.”

“아아악!”

“왜 이래?”

“그만해! 클림트 이야기하는데 왜 자꾸 빈센트를 들먹여요?”

“닮았으니까.”

마르소가 캐비닛에 기댔다.

“그렇게 대중적으로 사랑받던 사람이 더는 대중을 위한 예술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어.”

“……왜요?”

“글쎄. 아무튼 그때부터를 클림트의 황금시대라고 하는데.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그의 위상은 전혀 달랐겠지.”

“그게 빈센트랑 뭐가 닮았는데요?”

“순수한 자기표현. 기존의 권력층이 바라던 예술도 아니고, 대중이 바라는 예술도 아니고 오직 본인만을 위한 예술을 한 거야.”

클림트와 내가 닮았다고 한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김지우가 일전에 구스타프 클림트를 소개하면서 그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었던 화가라는 표현을 한 적 있는데.

온전히 자신을 표현하길 추구했다면 그럴 수밖에 없다.

나란 존재는 세상에 하나뿐이니까.

“그가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재밌단다.”

할아버지가 나섰다.

“처음에는 궁전이나 교회 벽화를 수주받아서 그렸어. 학교에서 배운 대로 그려서 클림트가 그렸다고 하지 않으면 전문가들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잘 복사했단다.”

할아버지가 굳이 복사라는 단어를 사용한 건 아마도 당시 화풍이 전형적인 형태였기 때문이리라.

화가의 개성은 배제되고 목적만을 위한 그림이었으니 복사, 복제라는 표현이 틀린 말도 아니다.

“그때가 고작 10대였지. 18살이 될 무렵에는 이미 크게 인정받아서 큰돈을 벌었단다.”

“그렇게나 빨리요?”

내가 몰라서 유명하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인제 보니 어릴 적부터 성공한 화가였던 모양이다.

“…….”

“…….”

할아버지와 앙리 마르소가 날 빤히 바라본다.

“왜요?”

“네가 할 말은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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