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175화
36. 성스러운 봄(1)
마틴이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얘기해 줄래?”
쉽게 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감정을 어느 정도 정리한 지금 돌이켜보면 사촌 케이를 사랑했지만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몰랐다.
생각을 정리하느라 대답이 늦어지자 마틴이 먼저 말을 꺼냈다.
“난 두 사람과의 일화가 반 고흐를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단다.”
“……왜요?”
“그가 사랑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으니까.”
마틴이 스마트폰을 꺼내 무엇인가를 찾았다. 턱을 당기고 자세히 살핀 후 편지를 보여주었다.
내가 태오에게 보냈던 문장이다.
사랑에 빠질 때 그것이 이뤄질 가능성을 미리 헤아려야 할까? 그렇게 할 수 있는 문제일까? 어떤 계산도 있을 수 없는 문제며 그렇다 하더라도 그래서는 안 된다. 우리는 사랑하기에 사랑하는 거니까.
이 말은 지금도 공감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그는 누구보다도 정열적으로 사랑했지만 정작 타인을 어떻게 사랑하는지에 대해선 서툴렀단다.”
“…….”
“오죽했으면 새벽에 기차를 타고 찾아갔겠니.”
“그, 그만.”
“기록에 따르면 저녁 무렵 즈음 도착했다고 하더구나. 멀리 사는 조카가 갑자기 찾아왔으니 이모와 이모부가 얼마나 놀랐겠어.”
케이를 만나게 해달라고 했던 당시 일이 떠올라 더는 버틸 수 없었다.
“이모부가 돌아가라고 하니 그 뜨거운 등불에 손을 갖다 댔다지. 당장 데려오지 않으면 등불을 집어 던지겠다고.”
“아아아아.”
이모는 케이가 내게 부치려던 편지를 주며, 내가 오는 것을 보고 뒷문으로 도망쳐서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했다.
케이는 편지로 나를 사랑하지 않음을 밝혔다.
부모님이 반대하시기에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며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다고 편지도 보내지 말라고 했었다.
“불쌍한 사람이지. 등불에 손을 대서 화상을 참아가며 협박하는 것밖에 몰랐던 거야. 사랑은 순수했지만 나누는 법은 몰랐단다. 서툰 사람이지.”
“그만…… 해요. 제발.”
음식을 더는 먹을 수 없었다.
* * *
고수열은 마틴과 점심을 먹은 뒤 줄곧 쓰러져 있는 손자가 걱정되었다.
“왜 그래? 응? 속이 안 좋아?”
“아니요…….”
“그럼. 어디 아파?”
고훈이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미술사에 크나큰 족적을 남긴 빈센트 반 고흐로서 여러 일이 자세히 기록됨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아주 개인적인 일까지 잘 알려졌을 거라곤 생각지 못한 탓에 충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감정 표현에 서툴고 타인을 배려하지 못했던 지난날의 자신이 부끄러워 어쩔 줄 몰랐다.
고훈이 침대를 팡팡 두드리자 고수열이 눈을 깜빡였다.
“이 녀석아, 할아버지한테 못할 말이 어디 있어. 뭔데 그래.”
“…….”
얼굴을 파묻고 고민하던 고훈이 그대로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는 부끄러운 일한 적 있어요?”
“그럼. 당연히 있지.”
“그럼 그게 영화로 되면 어떨 것 같으세요?”
“안 되지. 안 돼.”
고훈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고수열로서는 추측해 볼 수밖에 없었다.
빈센트 반 고흐를 좋아하는 손자가 그의 부정적인 모습을 알게 되어 혼란스러워한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훈아, 반 고흐도 사람이란다.”
고수열이 손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역사 속 인물이라서 조금은 신격화되고 위인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미치광이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 그도 평범한 사람이었어. 사람이 살면서 어떻게 실수 한 번 안 하고 살겠니.”
“…….”
“다만 마틴 할아버지는 반 고흐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를 좀 더 자세히 알리고 싶었던 거야. 그런 일화조차 반 고흐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지. 비난하거나 놀리려고 하는 게 아니야.”
가만히 듣고 있던 고훈이 고개를 들었다.
“뭐, 본인이 알게 되면 창피하겠지만 말이다.”
다시 얼굴을 파묻었다.
고수열이 끌끌 웃으며 손자의 엉덩이를 다독였다.
“베토벤 교향곡 듣고 싶다고 했잖으냐.”
“네.”
“연말이면 많을 텐데 지금 당장은 하는 곳이 없어서 직접 듣진 못할 것 같아.”
고수열이 TV를 조작해 20세기 최고의 마에스트로,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루체른 페스티벌에서 지휘한 베토벤 9번 교향곡을 틀었다.1)
부끄러움에 엎드려 있던 고훈이 아침을 비추는 여명과도 같은 선율을 느끼다가 위대한 행진을 알리는 힘찬 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한편.
미셸을 도움으로 치료를 받은 비다 라바니는 마르소 갤러리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미셸이 나을 때까지 꼭 찾아오라고 했지만, 정말 그래도 되는지 의문이었다.
어제 어머니로부터 의료보험료도 내지 못하는데 나라에서 공짜로 치료해 줄 리 없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
무엇보다 앙리 마르소가 한 말이 잊히지 않았다.
첫 만남에서 그는 그림을 제대로 그리려면 만 번은 그려야 한다고 했었다.
당장 새 파스텔조차 살 수 없었던 소년은 그 말에 좌절했었다.
포기하라는 말처럼 들렸고 주제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앙리 마르소는 어제, 그리고 싶다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리라고 말했다.
좋아한다면 포기해선 안 된다고.
아무리 무시를 당해도 본인만은 그 가치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했다.
‘파스텔?’
‘네.’
‘비다, 너도 이제 15살이잖니. 그런 거에 낭비할 돈이 없다는 건 알 나이 아니야?’
어머니와 삼촌은 파스텔 따위에 2유로나 낭비하지 말라며 그림은 먹고 사는 데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고 하지만.
비다 라바니는 돈을 벌어서라도 파스텔을 사고 싶었다. 스케치북을 사고 싶었다.
“왔구나?”
“아! 안녕하세요.”
아르누보 공모전 관련 일로 외부 일을 마치고 들어오던 미셸이 비다 라바니를 발견하곤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공손히 인사하는 소년을 기특하게 보았다.
“어때? 아픈 건.”
“많이 좋아졌어요. 이젠 별로 안 아파요.”
심한 화상이 하루 만에 나아질 리 없었다.
“다행이네. 그래도 의사 선생님이 다 나았다고 할 때까지는 조심해야 해. 안에서 조금만 기다려 줄래?”
“아, 네. 저…….”
소년이 머뭇거렸다.
미셸이 자세를 숙여 소년의 얼굴을 살폈다.
“왜?”
“그. 어머니가 치료비 대신 내주신 거라고. 그렇게 말씀하셔서…….”
“죄송하긴. 미안해. 거짓말해서.”
비다 라바니가 고개를 들었다. 설마 사과받을 거라곤 생각지 못한 탓에 당황했다.
혹시나 비다 라바니가 자존심에 상처를 입을 것이 걱정되어 최대한 말을 조심했는데, 병원에 데려가기 위한 거짓말이 금방 들킬 줄은 몰랐다.
“그렇게 말 안 하면 병원 안 갈 것 같아서 그랬어. 기분 상했지?”
“아니요. 아니에요. 정말로요.”
“그럼 다행이다.”
“저 때문에 괜히. 죄송합니다.”
미셸은 병원조차 마음 놓고 가지 못하는 소년이 안쓰러웠다.
“그거 다 나을 때까지만이라도 다니자. 누나가 해주고 싶어서 그러니까 부담 가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저, 저. 그래서요.”
“음?”
“저 청소 잘하거든요. 곰팡이 많이 지워봐서 정말 잘해요. 병원비 내주신 만큼 여기서 일해도 될까요?”
거절하려 했다.
그러나 자신을 올려다보는 소년의 눈빛이 너무나 간절했기에 그 호의를 마냥 무시할 순 없었다.
전문 청소업체에 외주를 맡기고 있지만 찾아보면 소일거리는 있을 터였다.
“청소는 작품이 많아서 위험해서 어려워.”
“아…….”
“대신 안쪽에 화단 있는 거 알고 있지? 밖에도 있고.”
“네.”
“화단에 물 주면 하루에 10유로씩 줄게.”
비다 라바니가 입을 크게 벌렸다.
“그렇게나 많이요?”
“여기 엄청 넓어. 다 하려면 한 시간은 걸릴걸? 힘들 거야.”
겨우 한 시간 일하고 10유로를 받을 수 있다니, 비다 라바니로서는 꿈 같은 일이었다. 파스텔과 스케치북을 사고도 돈이 남았다.
“저, 어. 혹시 저 일 잘하면 계속 써주실 수 있으세요?”
화단에 물 주는 일을 잘하면 얼마나 잘하겠냐만은 미셸은 소년의 간절함에 고개를 끄덕였다.
매일 같이 찾아와 사탕으로 배를 채우고 앙리 마르소의 작품 앞에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을 바라보는 아이가 희망을 잃지 않길 바랐다.
“그래. 대신 열심히 한다고 물 너무 많이 주면 안 돼? 너무 많이 줘도 상하거든.”
“네!”
* * *
“앙리! 앙리!”
“앙리! 앙리!”
차를 타고 이동 중이던 앙리 마르소의 눈에 시위 현장이 들어왔다.
영웅 앙리 마르소를 칭송하기 위해 나온 이들은 사법부에 제롬 케르비엘과 앵테르미탕을 부당하게 이용한 사람을 강력히 처벌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저것들이 감히 누구 이름을 함부로 불러대?”
백미러를 통해 앙리 마르소의 의기양양한 미소를 확인한 아르센이 작게 웃었다.
“결국 작가님이 생각하신 대로 흘러가서 다행입니다.”
“흥.”
앙리 마르소가 나선 일은 없었다.
모든 일이 프랑스 예술가가 자발적으로 나서서 벌인 일이었고 덕분에 앙리 마르소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빌팽 재판관께서 한동안 괴롭히시겠습니다.”
시장, 장관, 총리까지 역임하고 헌법재판소 재판관까지 지냈던 빌팽은 앙리 마르소의 정계 입문을 적극적으로 요구해 왔었다.
프랑스의 앞날을 위해선 강인한 리더십과 지지도를 갖춘 젊은 정치인이 나서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에게 앙리 마르소보다 뛰어난 인재는 없었다.
“그 사람한테서 오는 연락 받지 마.”
“예?”
“네 말대로 귀찮게 굴 게 뻔해.”
아르센이 피식 웃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유럽 경제를 뒤흔들 수도, 프랑스 대권주자도 될 수 있는 그였으나 예술가로 살아가길 선택한 그다운 발언이었다.
창밖을 바라보던 앙리 마르소는 시야에서 시위행렬이 멀어지자 고개를 돌렸다.
“그놈 정말 괜찮은 거 맞아?”
“훈이 말씀이십니까?”
“어.”
“네. 어제 고수열 경께서 병원에 데려가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별다른 문제 없다고.”
“트라우마 같은 거 있잖아. 그런 게 그렇게 빨리 검사가 돼?”
“글쎄요. 행동이나 말하는 걸 봐서는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걸 어떻게 알아?”
앙리 마르소는 아주 어릴 적 기억을 떠올렸다.
경호원이 붙어 있었기에 아무 문제 없었지만, 성인에게 위협받았던 경험은 오랜 시간 그를 괴롭게 했었다.
“아직 파리에 있나?”
“……걱정되시면 직접 연락해 보심이 어떻겠습니까.”
“걱정은 무슨.”
앙리 마르소가 입을 다물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걸어 봐.”
고훈에게 전화를 걸라는 뜻이었기에 아르센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 * *
1)1954년 8월 22일 루체른 페스티벌 실황 녹음 음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