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174화 (129/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174화

35. 에로이카(10)

[또 총기 사건? 총기 규제 강화에 목소리 높이는 시민들]

[대낮에 벌어진 아찔한 인질극]

[범인은 전 SNBA 사무처장]

[두 영웅이 수많은 생명을 살렸다]

9월 17일 오전, 마르소 갤러리에 괴한이 침입해 인질극을 벌였다.

범인은 TV 방송 및 여러 매체를 통해 알려진 전 SNBA 사무처장이자 예술인 제롬 케르비엘(46)로 알려졌다.

그는 갤러리에 있던 소년을 인질로 삼아 협박 및 위협 사격을 벌인 혐의로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최근 앵테르미탕 수혜 대상 선정 과정에서 부정을 저지른 혐의로 기소된 제롬 케르비엘은 이를 문제 삼은 모 언론사로부터 계약 해지 및 위자료를 청구받은 것으로 파악되었다.

경찰은 이에 그가 앙리 마르소에게 원한을 품고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추측하고 조사를 시작했다.

프랑스 예술인들은 오늘 저녁, 앙리 마르소는 앵테르미탕의 정상화를 이룬 영웅이라며, 그를 해하려고 한 제롬 케르비엘에게 법이 허용하는 한 최고 형량을 부여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한편 자칫하면 큰 테러 사건으로 번질 수 있었던 일을 몸소 나서 막은 두 사람이 화제를 모으고 있다.

현장에 있던 사람과 범인이 켠 인터넷 방송을 통해 상황을 지켜본 이들은 앙리 마르소와 고훈의 용기 있는 행동을 높이 샀다.

천재 화가 고훈은 또래 소년이 인질로 잡히자 침착하게 나서서 시간을 확보했고, 범인이 총격을 가했을 때에는 뒤에서 달려들어 앙리 마르소가 범인을 제압할 수 있도록 도왔다.

총을 든 괴한을 제압한 앙리 마르소의 용기와 격투 솜씨도 화제가 되고 있다.

관계자에 따르면 어렸을 적부터 신변에 위협을 받아 온 앙리 마르소는 본인을 보호하기 위해 복싱, 유도, 주짓수, 사격술 등을 상당 수준 익혔다고 한다.

그가 보여준 이타적 행동과 범인을 꾸짖는 말은 그가 왜 프랑스 예술계에서 영웅으로 추앙받는지 잘 알려주는 대목이다.

고훈과 앙리 마르소는 병원에서 간단한 검사를 마치고 특별한 문제 없이 귀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마르소 갤러리 총기 사건은 사건 당일 유럽 전역과 대한민국에 특보로 전해졌다.

현재 가장 주목받는 두 예술가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용감히 대처한 일화에 많은 이가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천만다행이다 진짜로.

└미친 거 아니야? 대체 뭔 생각으로 저런 짓을 해? 앙리한테 사과하라고 했다며?

└동영상 보면 미친 새끼 맞음. 지가 앵테르미탕 이용해 먹은 거 합리화 오짐.

└그러니까. 화가로 인정 못 받았는데 그것도 못 하게 하냐는 게 말이야 방구야.

└똥인 듯.

└진짜 개멍청한 게 인방 틀어서 앙리가 사과하면 자기 잘못 없어지는 줄 알았나 봄ㅋㅋㅋㅋㅋ

└그건 아닐걸? 어차피 재판 앞두고 있어서 다 밝혀질 일이었음. 아마 이미 다 끝났다고 생각하고 앙리 자존심에 상처 주려고 했던 것 같음.

└그렇겠지. 자존심 없으면 시첸데.

└이상하다.

└뭐가?

└우리 형이 저럴 사람이 아닌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렇게 착한 일 하는 형 아니란 말이야 ㅠㅠ

└근데 진짜 언론에 비치는 모습이랑 다르더라. 기자나 평론가 대할 때는 뭐 저런 애가 다 있나 싶은데, 앵테르미탕 정상화로 돌리고 오늘 애기들 도우러 나온 거 보면 진짜 심성은 고운 듯.

└애 이야기 나오니까 생각난 건데 인질로 잡힌 애 다룬 기사는 코빼기도 안 보이네?

└터번 쓴 무슬림?

└ㅇㅇ.

└괜한 동정론 만들지 마라. 역겨운 무슬림.

└예전이었으면 종교 차별한다고 욕했을 텐데 요즘엔 그럴 마음도 안 든다.

└ㄹㅇ 테러하는 놈들 다 죽어야 해.

└앙리가 진짜 속이 깊더라. 자기 재능이나 환경을 인정 안 하는 게 아니라 다 갖춘 자기도 필사적인데, 넌 뭔데 그리 쉽게 생각하냐고 다그치는 거 보고 좀 반성함.

└예술이 쉬웠으면 그 많은 사람이 그렇게 고생하지도 않았겠지.

└난 자존심을 버리는 것보다 지키는 게 더 어렵다는 말이 와닿았음.

└그래서 대체 뭐였음? 독재자니 뭐니 한창 시끄러웠잖아.

└썩은 놈들 도려냈더니 지랄한 거. SNBA 소속 예술인들이 성명서 발표했더라. 앵테르미탕 심사가 공정하지 않았는데 이번에 전부 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

└믿을 수 있음?

└우리나라 예술인이 73만 명인데, 그중 72만 명이 서명했으면 사실 아니겠음?

└그러네.

그동안 프랑스 국립 예술 협회 집권층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았던 사람들이 들고일어났다.

착취당하고 있음에도 힘이 없어 대응할 수 없었던 이들은 마르소 갤러리 총기 사건에 분개했다.

자신들의 이권을 되찾아 준 앙리 마르소에게 총구를 겨눈 적폐 세력을 규탄하며, 앙리 마르소를 지키자는 운동을 벌였다.

거리로 나선 이들은 앙리 마르소야말로 영웅이라며 그의 이름을 연호했고 그 과정에서 앙리 마르소를 비난하는 목소리는 잦아들 수밖에 없었다.

* * *

-정말 의외의 모습을 보여주었죠?

-그렇습니다. 평소 움직이길 싫어하는 이미지가 있었는데 마치 잘 훈련받은 군인처럼 보이더라고요.

-CCTV에 찍힌 장면을 보실까요?

앙리 마르소가 TV 프로그램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제롬 케르비엘이 총을 쏘기 전에 깊이 파고들어 손목을 제압하고 엎어 매친 장면이 송출되고 있었다.

마르소 갤러리 내부 CCTV에 저장된 화면이었고 갤러리 관계자가 아니면 유출될 일도 없는 영상이었다.

“저거 네가 보냈어?”

“응.”

미셸이 어깨를 으쓱였다.

작품이 아니라 마샬 아츠 실력으로 주목받으니 마치 광대가 된 기분이었다.

앙리가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자 미셸이 그의 머리를 넘기며 달랬다.

“멋있었어.”

“…….”

“그러니까 다신 그러지 마.”

그를 잃을 수도 있었기에 미셸은 다시는 같은 상황을 겪고 싶지 않았다.

오늘 내내 반복했지만 노파심이 들어 자꾸만 강조하게 되었다.

“알겠으니까 그만해.”

두 사람이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꼬맹인?”

“라바니?”

“라바니가 누구야.”

“터번 쓴 애.”

앙리 마르소가 쓰레기에게 붙잡혔던 아이를 떠올리곤 고개를 저었다.

“걔 말고. 고훈.”

“응. 고수열 경이 와서 데려갔어. 다친 곳도 없어 보였고.”

앙리 마르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깜짝 놀랐어. 어른스러운 건지 무모한 건지.”

미셸은 고훈이 제롬과 대화를 시도해 시간을 끌었던 일을 떠올렸다.

어른도 나서기 힘든 상황에서 고훈은 범인과 차분히 대화를 시도했고 앙리가 위험할 땐 몸을 던져 막으려 했다.

경황이 없어 제대로 인사하지 못했는데, 조만간 자리를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무모한 거지.”

앙리의 말에 미셸이 피식 웃었다.

앙숙처럼 지내면서도 알고 보면 닮은 구석이 많았다.

“너도 마찬가지야.”

“무모한 건 그럴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나 하는 말이야.”

“그럴 능력이 있고?”

“당연하지.”

“흐응?”

“뭐.”

“너 나한테 지잖아.”

미셸이 고등학생 시절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때는 툭하면 싸워서 결국 스파링을 핑계로 링에 오른 적도 있었다.

“하.”

앙리가 헛웃음 지었다.

“한 번 봐준 걸 가지고.”

“그래? 아니었던 거 같은데.”

“봐준 거야.”

“들어와 봐.”

미셸이 자세를 취하자 앙리 마르소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고 그렇게 옥신각신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흘렀을까.

“앙리? 앙리?”

두 사람이 TV를 끄고 이불을 뒤척일 때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가 다급히 울렸다.

셰리 가도였다.

앙리 마르소와 미셸 플라티니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친구들과 노르망디로 여행 간 그녀가 왜 돌아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앙리? 어디 있니? 전화는 왜 안 받고.”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앙리가 서둘러 옷을 챙기려는 미셸을 이불로 덮었다.

미셸이 일어나려 했지만 앙리에 의해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

“앙리.”

뉴스를 통해 소식을 접한 셰리 가도가 앙리를 보자 울먹였다.

“뭐야. 여행은 어쩌고.”

“지금 여행이 중요하니? 괜찮아? 다친 데는 없고?”

“안 다쳤어. 빨리 돌아가.”

“얘는.”

셰리 가도가 방을 둘러보았다.

침대 아래 실내화 두 짝과 묘하게 튀어나온 이불. 평소와 조금 다른 태도에 슬며시 미소 지었다.

“으이구. 말을 하지.”

“뭐, 뭘?”

셰리 가도가 당황한 앙리의 볼을 톡톡 두드렸다.

아들처럼 키운 아이가 이제는 남을 위해 행동할 줄도 알고 여자친구도 데려오니 기특하기 그지없었다.

“나중에 인사해요.”

“인사는 무슨!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호홍홍. 그럼 내일 봐.”

한바탕 폭풍이 지나가고.

이불 속에서 빠져나온 미셸 플라티니와 앙리 마르소는 죄책감에 이마를 짚었다.

* * *

할아버지가 이렇게 화내신 적은 처음이다.

아무 말도 안 하시고 부리부리한 눈으로 노려보실 뿐이라 눈을 마주하기 힘들다.

“……죄송해요.”

“뭐가.”

“위험한 짓 해서요.”

할아버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위험한 거 알면서 어쩌려고 그랬어. 응?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나 같아도 할아버지가 위험한 일을 하면 걱정했을 거다. 그 마음을 너무나 잘 알아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할아버지가 나를 끌어안았다.

“훈아, 네가 잘못해서 이러는 게 아니야. 널 잃을까 봐 무서워서 그래.”

나도 꽉 안았다.

“죄송해요. 저도 그랬어요.”

도덕적으로 생각하면 틀린 행동은 아니다.

도리어 많은 문명이 오랜 시간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가르쳐 왔다.

하물며 고작 13~14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가 위협받는 상황.

도와야 하지만, 그 위험을 생각하면 무모한 행동이었다.

할아버지를 홀로 둘 수도 있었을 일이고 겨우 얻은 기회를 걷어찰 수도 있었던 일이다.

놀라고 걱정하고 서운했을 할아버지에게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말하면서 잠들었다.

다음 날.

다큐멘터리 작업을 돕기로 약속한 마틴 얀센과 만났다.

“훈아!”

“마틴.”

할아버지 못지않게 건장한 마틴이 보자마자 날 번쩍 들었다.

“하하핳하! 멋있던데?”

“멋있긴 뭐가 멋있어.”

할아버지가 어제 일을 추켜세워주는 마틴을 나무랐다.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돕는 게 어디 쉬운 일이야? 아주 용감했다.”

마틴이 날 내려주고 머리를 잔뜩 헝클었다.

“그래도 너무 위험한 일은 하지 마. 할아버지가 얼마나 걱정하셨겠어. 그치?”

“네.”

마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걱정을 끼친 모양이다. 아침에는 방태호와 장미래, 차시현에게 연이어 연락이 와서 혼났었다.

“자, 자. 밥부터 먹으면서 이야기하자고.”

간단히 양파 수프랑 햄 요리를 먹으며 다큐멘터리 이야기를 듣던 중 의외의 제안을 받았다.

“네?”

“알다시피 변색된 작품이 많이 있잖니. 지금까지 여러 시도도 있었지만 이번에 제대로 한번 해보고 싶어서.”

마틴이 의지로 가득한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네가 반 고흐 해바라기를 복원하는 장면을 넣어보고 싶다고 말하는 거야. 재밌지 않겠어?”

“…….”

내 그림을 내가 복원하는 일은 생각도 안 해봤다.

“의미가 있을까요?”

“그럼. 있지. 다큐멘터리를 보는 사람이 반 고흐가 그렸던 황금색 해바라기가 어떠했는지 상상해 볼 수 있게 돕는 일이니까.”

할아버지도 고개를 끄덕인다.

“추측해서 그린 복원도라고 명시해야겠어.”

“그래야지. 훈이가 다른 작가들 해바라기랑 비교해 주는 것도 좋겠구나.”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조건이 있어요.”

“조건?”

“네.”

“하핫. 이 녀석아, 내가 돈 떼먹을까 봐? 넉넉히 챙겨줄 테니 그 걱정은 하지 마라.”

“돈이 아니라.”

“음?”

“케이랑 시엔 이야기 빼주세요.”1)

* * *

1)반 고흐가 사랑했던 사람들이다.

케이는 이모의 딸로 반 고흐보다 일곱 살 연상이었다.

반 고흐가 ‘시엔’으로 부른 크리스틴 클라지나 마리아 후르닉은 세 살 연상의 매춘부로 반 고흐와 동거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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