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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반 고흐-173화 (128/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173화

35. 에로이카(9)

순식간에 보안직원들이 달려들어 남자를 제압했다.

“무슨 짓이야!”

앙리 마르소가 벌떡 일어나 얼굴을 들이밀었다.

“도우려고 한 건데.”

“돕기는 무슨! 너 때문에 맞을 뻔했잖아!”

총을 쏘려고 해서 밀쳤거늘 그게 더 위험했던 모양이다.

“다친 곳은 없어요?”

“흥. 저런 놈에게 당할 내가 아니지.”

앙리 마르소는 별일 아니라는 듯 손을 털었다. 더러운 거라도 묻은 듯 불쾌한 표정으로 외투를 벗어서 버렸다.

그가 손을 내밀자 아르센이 물티슈를 넘겨주려 했고, 그와 동시에 미셸이 달려들었다.

“무, 무슨 짓이야!”

마르소가 놀라 밀치려고 했으나 미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처음에는 당황한 마르소도 이내 그녀의 등을 쓸어내렸다.

관계가 드러나도 괜찮을까 걱정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얼마나 마음을 졸였을까 싶어서 마음이 따뜻해진다.

“괜찮다니까.”

마르소가 어디 다치진 않았는지 살피는 손길과 눈빛이 애틋하다.

다정해 보인다.

“억!”

사랑스러운 손길을 달래던 마르소가 복부에 클린 히트를 허용하고 말았다.

미셸이 복서인 줄은 몰랐다.

깔끔한 바디 블로우다.

“미쳤어? 네가 뭐 되는 줄 알아? 나서긴 왜 나서! 다치면 어쩌려고!”

“야…….”

마르소가 신음하며 기대자 미셸이 눈물을 보이며 그를 안아주었다.

그나저나 총을 든 남자를 단숨에 제압할 정도로 실력 있는 그가 왜 내 박치기와 미셸의 주먹은 피하지 못했을까 의문이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구속되어 바닥에 엎드린 남자가 발악한다.

“가만있어!”

“뭘 잘했다고 성질이야? 성질이긴.”

“어린애가 불쌍하지도 않아?”

“쳐죽일 놈.”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어.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갤러리에 있던 사람 모두 한마디씩 내뱉었지만 증오로 가득한 눈은 오직 앙리 마르소를 향할 뿐이다.

“모두 저놈 탓이야!”

남자가 외쳤다.

“저놈은. 저놈은 내 모든 걸 앗아갔어. 태어났을 때부터 모든 걸 갖췄으면서 어떻게 이렇게 잔인하게 굴어!”

무엇이 그리도 억울했는지 남자는 좀처럼 포기하지 못했다.

“자존심 따위 다 버렸어. 너처럼 대단치 못하니까! 네 작품이 얼마나 뛰어난지 찬양하고 네가 시킨 일은 뭐든 다했던 내게! 내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난 이 사람을 모른다.

그저 지금 하는 이야기로 추측할 뿐인데 화가로서의 재능이 없어 길을 포기하고, 앙리 마르소와 다른 사람 작품을 평하며 지냈던 듯하다.

앙리 마르소가 무슨 일을 시켰는지 몰라도 아마 SNBA 관련 일이었겠지.

그리고 앵테르미탕 제도로 부정을 저지르곤 그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앙리 마르소를 원망하는 것 같다.

사람 새낀가?

“나도. 나도 너처럼 되고 싶었어. 너처럼 인정받는 화가가 되고 싶었다고! 근데 안 되니까! 안 되는 거 아니까 협회 일이라도 하면서 도왔잖아! 너처럼 될 수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봤어?”

앙리 마르소가 귀를 후볐다.

“뭐라는 거야, 쓰레기가.”

뒤늦게 경찰이 찾아왔지만 앙리 마르소가 손을 들어 그들을 저지했다.

“네가 무슨 이유를 들먹이든 범죄자란 사실은 변하지 않아.”

옳은 말이다.

과거가 어떻고 이유가 무엇이든 그가 많은 사람을 위협하고 아이를 인질로 잡았던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또한 평범한 사람은 자신을 그렇게 비참하게 여기지 않는다.

“네가 날 이렇게 했어. 너만 아니었으면, 네가 날 몰아붙이지만 않았으면 이런 일도 없었어!”

앙리 마르소가 피식 웃었다.

“불쌍하지도 않냐?”

“……뭐?”

“모든 일을 남 탓으로 돌리는 네가 불쌍하지도 않아?”

앙리 마르소가 구두 끝으로 남자의 턱을 받쳤다.

모욕적인 행동에 남자가 몸부림을 쳤지만 소용없었다.

“자존심을 버렸다고?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야?”

“이이익!”

“버리는 건 쉬워.”

마르소의 목소리에는 연민도 동정도 없었다. 오직 모멸감만이 가득했다.

“인정받는 화가가 되고 싶다? 그럼 그려야지. 안 될 것 같으니까 글 썼다가 그것도 여의치 않으니 남 등쳐먹었으면서 뭘 바라?”

앙리 마르소는 차갑기 그지없는 눈으로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남자는 목을 옆으로 틀어 마르소를 흘겨보았다.

“뭘 알아. 네가 재능 없는 사람의 마음을 알기나 해? 나도 너처럼 돈이 많았으면! 재능이 있었으면! 그렇게 될 수 있었어. 네가 잘나서 그 자리에 있는 것 같아?”

악에 받친 남자의 호소에 험악했던 사람들의 표정에 아주 약간의 연민이 스몄다.

“아니. 넌 나처럼 될 수 없어.”

앙리 마르소가 그를 비웃었다.

“네가 천억 유로가 있으면 될 수 있을 것 같지? 아니. 네가 내 입장이었으면 넌 저놈을 시기하다가 포기할 놈이야.”

앙리 마르소가 나를 가리켰다.

“저놈 입장이었으면 아마 조부처럼 될 수 없음을 시기했을 테고, 고수열 경이었으면 피카소를 원망했겠지. 피카소였으면 마티스를 욕했을 테고 고갱, 반 고흐, 모네 다 욕했겠지. 왜 먼저 태어나서 모든 걸 다 그리고 갔냐고.”

“…….”

“넌 도망치거든.”

평소처럼 건방진 말투에 시비조지만 이번에는 앙리 마르소의 말에 공감한다.

누군가와 비교하는 순간 모든 게 의미 없어진다.

나보다 잘난 사람은 언제나 존재한다.

파리에서 지낼 적에도 일부 사람은 라파엘로나 미켈란젤로, 다 빈치, 보티첼리, 카라바조 같은 역사적인 인물들이 그릴 것을 이미 다 그렸다고 투덜거렸다.

그런 사람은 대부분 오래 가지 못했다.

“자존심은 버리기 쉽다고.”

앙리 마르소가 다시금 강조했다.

“지키는 게 어렵지. 내가 최고다. 내 그림이 최고다. 그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러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해 본 적 있나?”

“잘난 척하지 마. 노력이라면 너보다 훨씬 많이 했어. 네 나이보다 내가 그림 그린 시간이 더 길어!”

“우습게 보지 마.”

앙리 마르소가 노력가라는 건 잘 알고 있다.

그는 나와 같이 그림 한 점을 완성하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고 투자한다.

저 남자가 모를 뿐.

노력이라면 내가 아는 누구보다도 충실한 남자다. 그것을 말해주려는 것 같다.

“너 따위 범재를 감히 어디다 붙여?”

어쩌면 단순히 자기 자랑을 하고 싶었던 걸지도.

“나조차 내 모든 걸 쏟아부었어. 유산, 재능, 노력, 시간 모든 걸 바쳐야 했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네가 안 되는 거야. 네 주제를 모르고 적당히 남이 하는 만큼만 하다가 안 되니까 남 탓하지. 나조차 이 대단한 나조차 내 모든 걸 바친 일인데 말이야.”

앙리 마르소는 본인처럼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축복받은 환경에서 태어난 사람도 일생을 걸고 그림을 그린다고 말했다.

“정말 그림을 그리고 싶긴 하냐?”

화가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

화가가 되고 싶은 사람은 언젠가 그 한계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오직 끊임없이 그리고 싶은 사람만이, 그려야만 하는 사람이, 그림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자신의 한계를 마주했을 때 넘어설 수 있다.

캔버스가 두려울 때.

기꺼이 물감을 칠할 수 있는 용기는 누구로부터 주어지는 게 아니다.1)

자신이 찾아내는 것이다.

그렇게 두려움에 끊임없이 맞서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싶은 게 있으면 그렸어야지. 이런 헛짓거리 할 시간에.”

앙리 마르소의 훈계가 이상하게도 점차 따뜻하게 들린다.

사실 저 남자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팔리지 않은 그림이 쌓여만 가고.

불안한 앞날과 동전 한 닢 아쉬운 주머니에 얼마나 방황했던가.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안개 숲을 헤매는 마음을 모를 리 없다.

누구보다도 잘 안다.

그러나 앙리 마르소의 말처럼 걸어야만 했다.

그리고 싶으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나만이 그럴 수 있으니까. 누가 시켜서도, 도와줘서도 가능한 일이 아니니까.

“넌 몰라.”

남자가 이를 갈며 말했다.

“넌 재능 없는 사람을 이해 못 해!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걸 뻔히 아는데 그리라고? 헛된 생각에 빠져 있으라고?”

앙리 마르소가 남자의 멱살을 잡아 들었다.

“다른 사람은 아니라 해도 너만은 믿어야 할 거 아니야!”

줄곧 그를 냉소적으로 바라보던 앙리 마르소가 처음으로 화냈다.

“돈이 없으면 벌어서, 시간이 없으면 잠을 줄여서라도 그려야지. 재능이 없으면 남들보다 열 번, 백 번 더 그리면 돼.”

부릅뜬 눈과 목소리 때문에 혹시라도 필요 이상의 폭력을 쓸까 걱정되었지만 기우였다.

“언젠가는 해낼 거라고 너만은 믿었어야지. 다른 사람이 쓰레기 취급해도 너만은 네 그림을 좋아했어야지. 그것조차 못 하면서 화가가 되고 싶었다? 조건이 안 맞아서 그림을 못 그렸다?”

마르소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넌 그림을 그리고 싶은 게 아니라 유명인이 되고 싶었던 거야. 남들에게 추앙받고 돈 많은 사람이. 안 그래?”

저 사람은 인정하지 못하겠지만 나도 같은 생각이다.

진정 그림을 그리고 싶었더라면 어떤 조건에서도 그렸을 거다.

그러지 않고 안락한 삶을 택한 건 그가 자유의지로 그림을 포기한 결과.

성공한 화가가 되고 싶어 노력했다고 착각하는 부류다.

성공한 화가란 완성된 어느 한 지점이나 단계가 아니라 과정일 뿐인데, 어떻게 한정된 시간 노력했다고 못 되었다, 안 될 거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그렇게 착각하는 사람이 한때의 바람을 들먹여 앙리 마르소를 욕할 순 없는 법이다.

미술에 누구보다도 진지한 마르소의 성공을 재능과 환경 덕분으로 치부하는 건 모욕이다.

그가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고, 더할 나위 없이 부유한 환경을 누린 걸 부정하는 게 아니다.

모두가 앙리 마르소처럼 될 수도 없다.

그러나 그리고 싶은 그림은 그릴 수 있다.

“내가 없으면 네가 좀 더 인정받을 수 있을 것 같지? 어? 너보다 유명한 사람이 없어지면 그럴 것 같지?”

앙리 마르소가 으르렁거렸다.

“천만에. 세상 모든 화가가 죽고 너만 남아도 그딴 사고방식으론 인정받지 못해.”

* * *

무슬림 소년 비다 라바니는 두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앙리 마르소의 말에 귀 기울였다.

파스텔 하나 살 돈 없었다.

화구는커녕 당장 아침이라도 먹으면 다행이었다.

집은 곰팡이와 해충으로 가득하여 차라리 나와 있는 게 나을 정도였다.

밤중에 자다 보면 누군가의 비명에 깜짝 놀라 깰 때도 있었다. 거리에서는 낮이고 밤이고 심심치 않게 강도 행각이 벌어졌다.2)

저 무서운 아저씨가 얼마나 어렵게 사는지 몰랐다.

저 아저씨도 돈이 없었을까.

재능이 없었을까.

그러나 앙리 마르소는 그럼에도 그렸어야 한다고 다그쳤다.

그의 말이 비다 라바니에게는 위안이었다.

그림 그리고 싶다는 마음조차 사치스럽게 여긴 소년은 그런 자신에게 죄책감을 느꼈었다.

돈도 재능도 없으니까.

그런데 앙리 마르소는 어떤 환경에서도 그림을 사랑해야 한다고, 본인만은 자신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말했다.

그림을 포기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파스텔이 없어도, 종이 살 돈이 없어도 그리고 싶은 비다 라바니에겐 앙리 마르소의 말이 구원이었다.

“괜찮니?”

안면이 있는 미셸이 비다 라바니에게 다가갔다.

“아, 네…….”

“괜찮긴. 상처가 심한데.”

“아!”

“안 되겠다. 누나랑 병원 가자.”

“아, 안 돼요.”

소년이 고개를 저었다. 의료보험 혜택을 못 받는 터라 병원비는 상상도 못 했다.

그것을 눈치챈 미셸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거짓말했다.

“이런 일에 말려들면 나라에서 치료해 주는 거야. 몰랐지?”

“네?”

“누나가 가서 처리해 줄 테니까 치료만 받으면 돼. 일어설 수 있어?”

“네…….”

“가자.”

“자, 잠시만요.”

비다 라바니가 다급히 주변을 살폈다. 자신을 도와주었던 아이를 찾곤 다가갔다.

“저기.”

고훈이 뒤돌았다. 관자놀이에 생긴 화상을 발견하곤 안타깝게 여겼다.

“괜찮아? 빨리 병원 가야 할 텐데.”

“으, 응. 저분이 데려가 주신다고.”

고훈이 고개를 돌려 미셸과 눈을 마주하곤 안심했다. 그녀라면 소년을 잘 돌봐줄 듯했다.

“그래. 빨리 가 봐.”

“저.”

“음?”

“고마워. 정말 고마워.”

비다 라바니가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사탕을 꺼냈다.

공짜 사탕을 줘서 기분 나쁘진 않을까 생각했지만, 어른들도 겁먹었었던 그 상황에서 자신을 도와준 아이에게 뭐라도 주고 싶었다.

고훈이 싱긋 웃으며 비다 라바니가 건넨 사탕을 집었다.

“잘 먹을게.”

그 미소가 너무나 밝아서 안도할 수 있었다.

오늘 만난 두 영웅이 소년의 가슴에 깊이 자리 잡았다.

* * *

1)

“너는 텅 빈 캔버스가 사람을 얼마나 무력하게 만드는지 모를 것이다.”

“많은 화가는 텅 빈 캔버스 앞에 서면 두려움을 느낀다.”

“반면 텅 빈 캔버스는 열정적이고 진지한 화가를 두려워한다.”

“삶이 아무리 공허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더라도, 아무리 무의미해 보이더라도, 확신과 힘과 열정을 가진 사람은 진리를 알고 있어서 쉽게 패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난관에 맞서고, 일을 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간단히 말해, 그는 저항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빈센트 반 고흐가 동생 테오도르 반 고흐에게 보낸 1884년 10월의 편지 中.

번역문 발췌 출처:

빈센트 반 고흐,『반 고흐, 영혼의 편지』, 신성림 옮김, 위즈덤하우스(1999), 115p

2)비다 라바니의 집은 뷔트 몽마르트르구에 있다.

빈센트 반 고흐가 잠시 머물렀던 몽마르트르 언덕이 있던 곳으로 힌두어권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기도 하다.

치안이 좋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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