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172화 (127/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172화

35. 에로이카(8)

고막을 찢을 듯한 굉음에 갤러리에 있던 사람 모두 얼어붙었다.

여러 테러 사건을 겪은 파리 시민들의 뇌리에 지난날의 악몽이 스쳤다.1)

“다가오지 말랬지!”

제롬 케르비엘이 악을 썼다.

부릅뜬 눈이 몹시 흔들리는 터라 누구라도 그가 제정신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히으이익.”

겁에 질린 비다 라바니는 이성을 유지할 수 없었다. 갑작스레 찾아온 공포에 떨며 울 뿐이었다.

제롬은 그런 소년의 관자놀이에 다시금 총구를 댔다.

발사된 열기가 식지 않은 나머지 소년의 여린 피부가 지져졌다.

“아아아아아악!”

“가만있어!”

피부가 익어가는 고통에 몸부림쳤지만, 제대로 먹지 못한 탓에 성장이 더딘 15살 소년이 떨쳐내기에 제롬의 팔은 너무나 억셌다.

상황을 지켜보던 모든 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쥔 권총이 자신에게 향할 것이 두려워 어쩌지 못할 뿐이었다.

보안직원들이 총을 꺼내려 하는 순간 제롬이 총구를 그들에게 향했다.

“허튼수작 부리지 마. 이 꼬맹이 죽는 꼴 보고 싶어?”

“하으으이익잉.”

보안직원들이 어쩔 수 없이 총에서 손을 뗐다.

비다 라바니는 자신이 왜 이런 일에 휘말렸는지 알 수 없었다.

엄마에게 새 파스텔을 사 달라고 졸랐던 탓일까.

갤러리에 오지 않고 ‘삼촌’이 시킨 대로 지하철역에서 구걸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사탕을 먹고 싶었을 뿐인데.

단지 앙리 마르소의 작품을 보고 싶었을 뿐인데 왜 이런 무서운 일을 겪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염없이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한편 회의 중이던 미셸 플라티니도 심상치 않은 상황을 감지하곤 밖으로 나섰다.

총성에 놀란 직원은 몹시 불안해했고 미셸은 계단 옆에 모인 세 사람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야?”

미셸이 조심스레 물었다.

안드레아스 파머가 스마트폰으로 CCTV 화면을 보여주었다.

인질극이 벌어지는 1층 상황을 확인한 그녀가 입을 가렸다.

한 달 전부터 마르소 갤러리를 찾던 소년이 제롬 케르비엘의 인질로 잡혀 있었다.

흐느끼는 소리가 계단을 타고 선명히 전해졌다.

“작가님에게 원한을 가지고 저러는 것 같습니다. 곧 경찰이 올 겁니다.”

아르센이 상황을 설명했지만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미셸은 고개를 돌려 CCTV에 시선을 고정한 앙리를 살폈다.

그는 눈매를 좁힌 채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평소에는 찾아볼 수 없는 초조한 기색이었다.

“……세상에.”

이내 미셸도 제롬 케르비엘 뒤에 쪼그려 앉은 한 소년을 찾아볼 수 있었다.

고훈이었다.

너무 가까이 있는 탓에 미처 도망치지 못했던 것으로 보였다.

“당장 안 나와!”

제롬이 발악했다.

“여기 있는 거 다 알아! 네가 안 나오면 이 녀석 목숨은 없어!”

“흐으으으으응.”

미셸이 앙리를 붙잡았다.

소년이 너무나 걱정되었지만 그렇다고 앙리 마르소가 저 미친놈을 상대하게 할 수도 없었다.

그때.

“그만 하세요.”

분노 가득한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렸다.

“저 멍청이가.”

앙리 마르소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누가 인질이든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으나, 고훈은 달랐다.

저 범죄자가 고훈이 어떤 존재인지 모를 리 없었다. 무슬림 소년보다 협상에 유리한 인질이라고 충분히 판단할 수 있었다.

상황이 더욱 안 좋아질 뿐이었다.

앙리 마르소는 주먹을 불끈 쥐곤 CCTV 화면 속 제롬을 노려보았다.

* * *

나서면 안 된다.

만에 하나 일이 잘못 풀리면 할아버지 혼자 남기게 될 거다.

앞으로 보고 싶은 작품이 산처럼 쌓였고 그리고 싶은 것은 셀 수조차 없다.

우연이라고는 하나 다시 없을 기회를 허무하게 잃을 순 없다.

할아버지를 잃을 순 없다.

그런데.

저 아이의 흐느끼는 소리가 잊히지 않을 것 같다.

저 남자를 제압할 수 있을까.

무리다.

앙리 마르소처럼 허술하다면 모를까. 저자의 손에 권총이 들린 이상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당장 안 나와!”

마르소에게 원한이 있는 모양.

저자에게 이성이 남아 있다면 아마 인질을 버리는 바보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이딴 짓을 벌일 정도니 무슨 짓을 해서라도 앙리 마르소를 만나겠다는 뜻

그런 만큼 무슨 짓을 할지 모르기도 하나, 적어도 목적을 이루기까진 인질을 포기하진 않을 거다.

분명 누군가 경찰에 신고했을 테니 지금으로서는 저 아이가 무사하도록 시간을 끌어야 한다.

“여기 있는 거 다 알아! 네가 안 나오면 이 녀석 목숨은 없어!”

할아버지, 죄송해요.

“그만 하세요.”

말하는 게 이토록 어려웠던 적이 있었나.

무섭다.

혹시나 저 미친놈이 총알을 갈길까 봐 당장에라도 도망치고 싶다.

“……고훈?”

날 알아보는 걸 보니 미술 쪽에서 활동하는 사람 같다.

왜 이런 짓을 저질렀을까 싶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다.

“아파하잖아요. 어린애한테 무슨 짓이에요.”

남자에게 붙잡힌 꼬마가 고개를 젓는다. 잔뜩 겁에 질린 주제에 그러지 말라고 하는 거다.

“왜. 네가 대신 인질이라도 되어주게?”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해댄다.

어쩌다가 이딴 인간과 척을 졌는지 마르소가 불쌍할 지경이다.

“아, 그렇지. 마르소 그놈이랑 친하지? 응?”

“히이잇!”

남자가 꼬마를 붙든 손에 힘을 주었다. 저놈의 총구멍 좀 떼면 좋겠거늘. 도무지 대화할 상태가 아니다.

“이놈 죽는 꼴 보기 싫으면 당장 불러내. 당장!”

협박에 넘어갔다간 한도 끝도 없다.

부른다고 올 사람도 아니고 와서는 더더욱 안 된다.

목적이 확실한 만큼 앙리 마르소에게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섣불리 행동하지 말자.

경찰이 오기까지 시간을 끄는 것만 생각해야 한다.

“어디 있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불러요.”

“거짓말 마! 여기 있는 거 모를 줄 알아?”

“난 몰라요. 정말로요.”

남자의 눈에 핏발이 섰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전해줄게요. 아니면 통화라도 할래요?”

“움직이지 마!”

스마트폰을 꺼내려는 순간 남자가 고함쳤다.

“잔머리 굴리려는 것 같은데. 손 하나 까딱했단 봐. 내가 이 빌어먹을 무슬림 꼬맹이 하나 못 죽일 것 같아!”

한껏 소리친 남자는 숨을 거칠게 내쉬며 주변을 노려보았다.

보안직원들이 뒤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건물 귀퉁이를 등진 걸 봐선 우발적인 행동으로 보이진 않는다.

계획하고 온 일이다.

“그래. 이놈을 데리고 있으니 안 기어 나오는 것 같은데. 너라면 어떨까. 응?”

“…….”

“손 들고 천천히 걸어와.”

가면 안 된다.

“빨리!”

그러나 저 겁에 질린 아이를 외면할 수도 없다.

어떡하지.

“케르비엘 씨, 아이는.”

탕!

또다시 총성과 굉음이 울렸다.

천장을 덮고 있던 벽이 부서져 후두둑 떨어진다.

사로잡힌 아이도 갤러리 안 사람도 모두 공황 상태에 빠져서 몸도 사고도 멈춰버렸다.

보다 못한 보안직원이 나서주었지만 눈이 돌아가서 보이는 게 없는 놈을 말릴 순 없었다.

더 자극하지 않는 것이 좋을까.

어쩔 수 없이 발을 뻗자 날카로운 비명이 울렸다.

“앙리! 안 돼! 앙리!”

미셸이다.

또각. 또각.

신경질적인 구둣발 소리와 함께 앙리 마르소가 모습을 드러냈다.

“빌어먹을.”

건방진 목소리가 건조하게 울렸다.

계단을 내려오는 그는 평소대로 턱을 든 채 건들거렸다.

미셸이 잠시 계단 끝에서 모습을 보였으나 이내 누군가가 그녀를 끌어냈다.

“흐. 흐흫흐흫흫흐.”

남자가 앙리 마르소에게로 총구를 돌렸다.

“드디어 납셨구만.”

앙리 마르소는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오랜만에 빈 여행이나 갈까 했는데 말이야. 감히 어디서 행패야?”

“크흐흡흐. 역시 앙리 마르소다워. 이 상황에서도 헛소리하는 걸 보니.”

“썩 꺼져.”

저자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

내게 하는 말이다.

일정에도 없는 일을 굳이 꺼낼 이유가 없다. 일전에 내가 빈에 들른다고 했던 걸 기억하곤 저자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내게 자리를 피하라고 신호를 주는 거다.

아니나 다를까.

남자가 앙리 마르소에게 한눈팔린 사이 보안직원이 다가와 나를 끌었다.

덕분에 조금 거리를 두게 되었지만 이대로 그를 혼자 내버려 둘 수 없어 벽을 사이에 두고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뭐야? 같이 죽자?”

“흐흫히히힛히.”

기분 나쁜 웃음소리다.

“너무 쫄 거 없어. 죽일 생각은 없거든.”

“…….”

“아주 쉬워. 저 사람들 앞에서 네가 앵테르미탕 지원금을 착복했다고 고백하면 돼. 그걸 무마하려고 나와 협회인들에게 누명을 씌웠다고.”

개소리다.

“사실을 말할 뿐이잖아? 조금만 정직하면 너도 여기 있는 사람도 모두 무사할 수 있어.”

남자가 아이를 내팽개치곤 스마트폰을 꺼냈다.

보안직원들이 기어 나온 아이를 보호하든지 말든지 그는 왼손으로 마르소를 촬영했다.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나도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까.”

저렇게 얻어낸 진술 따위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텐데.

계획범인 것치고 허술하다.

앙리 마르소도 어이없다는 눈치다.

“자, 그래. 천 명 정도 들어왔으니 조금 뜸을 들여보자고. 앙리 마르소의 대국민 사과 방송이라면 적어도 수만 명은 봐야지 않겠어?”

동영상을 찍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인터넷 방송을 켠 모양이다.

“자, 꿇어야지?”

“뭐?”

“무릎 꿇으라고. 꿇어. 빌어! 나한테. 억울하게 제명된 협회 사람들에게 빌어!”

저 미친놈이 누군지는 몰라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조금 알 것 같다.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반복하다 보니 본인이 한 거짓말을 믿게 된 듯하다.

앙리 마르소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이미 모든 일이 법적 절차를 따르고 있는데, 저 남자가 머저리가 아니라면 이 어이없는 협박 방송으로 재판에서 이길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이 상황은 앙리 마르소의 자존심을 무너뜨리고 수치심을 주기 위한 질 나쁜 연극이다.

예술가로서의 자긍심이 누구보다도 강한 앙리 마르소가 다른 사람 앞에서 그런 말과 행동을 할 수 있을 리 없을 테니까.

앙리 마르소에게 가장 소중한 그의 자존심을 철저히 파괴하려는 거다.

마르소를 잘 아는 사람이다.

“…….”

탕!

마르소를 향한 총구가 불을 뿜었다.

“앙리!”

“작가님!”

“마르소!”

총알이 빗나가 계단에 박힌 걸 보고서도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는다.

“뭘 꾸물거려!”

앙리 마르소는 자신을 향해 총알이 날아왔음에도 턱을 든 채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입을 열었다.

“엿이나 먹어.”

나도.

저 미친놈도 다른 사람 모두 앙리 마르소의 당당함에 말문이 막혔다.

“총 들고 깝죽대면 빌기라도 할 줄 알았나 본데. 착각하지 마. 이 내가 범죄자가 하는 말 따위 들을 것 같아?”

앙리 마르소가 턱을 당기고 이죽거렸다.

“타는 쓰레기 버리는 법은 찾아봤나?”

“다, 닥쳐! 죽고 싶어? 빌어! 빌라고!”

약이 잔뜩 오른 남자가 다시 총구를 내밀어 마르소를 위협했다.

목숨을 잃을 수 있음을 모를 리가 없는데, 마르소는 피식 웃었다.

“너처럼 부끄럽게 살 바에야 죽는 게 나아. 너랑 다르게 수치심이란 게 있거든.”

마르소가 한발 다가섰다.

남자가 한발 물러섰다.

“다가오지 마! 쏜다. 쏜다고!”

“쏴.”

한 걸음 더. 다시 한 걸음.

“오지 말라고 했어!”

마르소는 겁도 없이 다가섰다.

그를 이렇게 잃을 순 없다.

그는 내가 봤던 그 어떤 작품보다 멋진 색감을 보였던 를 아직 완성하지 못했다.

앞으로는 또 얼마나 대단한 작품을 만들어낼지 모른다.

성격 파탄자지만 괜히 기대하게 되는 사람이다.

그와는 몇 시간을 떠들어도 지루하지 않다. 완고한 자아를 기반으로 한 자부심은 귀찮지만 가끔 부럽기도 하다.

나로서는 가질 수 없었던 그 당당함이 부럽고, 그럴 만한 실력을 갖췄음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무슨 이야기를 꺼내도 매번 새로운 지식을 전해주고, 정신병자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속 깊은 친구.

그를 잃고 싶지 않다.

남자가 방아쇠를 당기려고 손가락을 움직인 순간 나도 모르게 몸이 움직였다.

“어엇!”

보안직원의 손길을 뿌리치고 있는 힘껏 남자를 밀친 순간.

탕!

총성이 울리고.

앙리 마르소가 남자를 대리석 바닥에 메다꽂았다.

* * *

1)2015년 일드프랑스 테러, 생캉탱팔라비에 공격, 2016년 니스 테러, 2016년 생테티엔뒤루브레 성당 테러, 2018년 스트라스부르 총기 난사 사건, 2020년 니스 노트르담 대성당 흉기 테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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