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171화
35. 에로이카(7)
“안드레아스입니다.”
마르소 갤러리의 보안팀장 안드레아스 파머였다.
“들어와.”
스위스 출신의 건장한 전직 격투기 선수가 주변을 경계하며 들어섰다.
지난 9년간 앙리 마르소의 개인 경호원으로 일하다가 작년부터 마르소 갤러리의 보안팀장을 맡은 그는 앙리 마르소가 신뢰하는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심각한 표정으로 들어와 문까지 걸어 잠갔다.
앙리 마르소가 눈썹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야.”
“갤러리에 제롬 케르비엘이 와 있습니다.”
앙리 마르소가 고개를 기울였다.
“SNBA 사무처장이었던 사람입니다.”
안드레아스 파머의 설명에 앙리 마르소는 의아했다.
쓰레기가 갤러리를 찾은 일을 심각하게 여길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보안팀장 안드레아스 파머의 생각은 달랐다.
평범한 척 가장하고 있지만.
지하 주차장이나 갤러리 내부를 살피는 부자연스러운 행동과 경직된 표정 그리고 앙리 마르소와의 관계 등을 고려했을 때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직원들에게 제롬 케르비엘을 감시하라고 지시하곤 만일 그가 수상한 행동을 했을 시 즉각 대응하길 요구했다.
가능하다면 내보내거나 몸수색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혹시나 그 또한 문제로 삼을 수 있었기에 신중한 안드레아스 파머로서는 최선이었다.
“거동이 수상합니다. 혹시 모르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앙리 마르소가 고개를 저었다.
“걱정이 지나쳐.”
“만약을 위한 일입니다. 갤러리는 직원들이 감시하고 있으니, 당분간 일정에 함께하겠습니다.
앙리 마르소가 시계를 확인했다.
SNBA 임직원 회의에 참석하려면 슬슬 출발해야 할 시간이었다.
똑똑-
마침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안드레아스 파머가 입에 검지를 대어 소리 내지 말 것을 요청하곤 슬며시 권총을 뽑아 들었다.1)
“작가님, 시간 되었습니다.”
비서 아르센의 목소리였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안드레아스 파머의 요구에 따라주었던 앙리가 고개를 저었다.
“거봐.”
안드레아스 파머가 총구를 겨눈 채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아르센이 깜짝 놀랐다.
“파머?”
안드레아스 파머가 아르센을 안으로 들인 뒤 주변을 살피곤 다시 문을 걸어 잠갔다.
“무슨 일입니까?”
“수상한 사람이 와 있습니다.”
“수상한?”
“제롬 케르비엘. 지금 어디로 가십니까?”
“SNBA 임직원 회의가 있죠. 12시부터 팔레 부르봉구의…….”
안드레아스 파머에게 앙리 마르소의 일정을 전하던 아르센이 아 하고 탄식했다.
“뭔가 짚이는 일이라도.”
아르센이 지난날, 무리하게 찾아오려던 제롬 케르비엘에게 오늘 오전에만 시간이 있다고 알린 것을 전했다.
그때 언급했던 날이 오늘이었고 시간도 일치했다.
“의도가 있어서 찾아온 게 분명합니다.”
앙리 마르소에게 모욕당한 후로 제롬 케르비엘은 여러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그 언행에서 앙리 마르소를 향한 적의가 명백히 드러나 있었고 재판 또한 앞두었기에 궁지에 몰린 그가 어떤 행동을 할지 알 수 없었다.
“그깟 놈 때문에 숨어다니라고?”
앙리 마르소가 거부감을 표하자 파머와 아르센 모두 그를 설득하고자 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더 잃을 게 없는 사람이라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흥.”
앙리 마르소가 콧방귀를 뀐 순간.
“꺄아아악!”
“다가오지 마!”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 * *
미셸 플라티니 대표가 친절을 베푼 뒤로.
딱딱한 빵조차 제대로 챙겨 먹을 수 없었던 소년 비다 라바니는 매일 같이 마르소 갤러리를 찾았다.
허기를 조금이나마 달래기 위해 아침마다 <79㎏>에서 사탕을 골라 챙겼고 학교를 다니지 않았기에 오전 내내 앙리 마르소의 작품을 구경하며 꿈을 키웠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뭐가 좋을까?’
평소와 달리 여러 맛이 쌓여 있던 터라 비다 라바니는 고민했다.
미셸 플라티니가 얼마든지 가져가도 좋다고 했지만, 호의에 익숙하지 않은 소년은 하루에 여섯 개라는 나름의 규칙을 지키고 있었다.
가장 좋아하는 사탕을 여섯 개 챙길지.
아니면 먹어보지 않았던 사탕을 하나씩 고를지 고민을 이어가던 중, 낯설고 앳된 목소리가 말을 걸었다.
“뭐가 맛있어?”
깜짝 놀란 비다 라바니가 몸을 움츠렸다.
고개를 돌리니 자신보다 두세 살 어려 보이는 동양인 소년이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아, 어. 어?”
고훈은 의도치 않게 소년을 놀라게 한 듯해 미안했다.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미안.”
비다 라바니가 고훈을 훑어보았다.
하얗고 맑은 피부에 잘 정돈된 머리카락, 깨끗한 옷 때문에 부잣집 아이처럼 보였다.
괜히 더 기가 죽었다.
“으응. 괜찮아.”
비다 라바니가 뒤로 물러서자 고훈이 의아히 물었다.
“가져가려던 거 아니었어?”
“너, 너 먼저 해.”
“난 뭐가 맛있는지 모르는데.”
고훈이 <79㎏> 앞에 쪼그려 앉아 프랑스 사탕을 살폈다.
“망고? 망고가 뭐지.”
부잣집 아들이면 사탕 같은 건 크게 관심 없을 거라 생각했던 비다 라바니는 제법 진지한 태도로 사탕을 고르는 고훈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용기를 내 다가갔다.
“안 먹어봤어?”
“응. 무슨 맛이야?”
“달콤해.”
“사탕은 다 달잖아.”
“어…….”
정규 교육 과정은커녕 책을 읽는 것조차 사치였던 소년의 어휘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먹어 본 음식도 다양하지 못하여 무엇과 비슷하다는 비유조차 할 수 없었다.
고훈이 당황한 비다 라바니에게 물었다.
“넌 어떤 게 좋아?”
“아. 난 이거.”
비다 라바니가 누가로 만든 기다란 사탕을 골랐다.
고훈이 흥미롭게 누가 드 몽텔리마르(Nougat de montélimar)를 살폈다.
몽텔리마르라고 하면 예로부터 누가로 유명한 지역이었다.
그곳의 누가와 견과류, 꿀로 만든 간식이라면 맛이 없을 수 없었다.
“양도 많고.”
“맞아. 배불러. 엄청 맛있어.”
양이 많고 맛있다는 걸 알아주니 비다 라바니가 반색했다.
“이거랑 이것도 맛있고. 저건 아직 못 먹어봤어.”
“흠.”
두 소년이 나란히 쪼그려 앉아 사탕을 골랐다.
드문드문 대화가 연결되지 않았지만 맛있는 사탕을 고르고 싶은 신중한 태도만으로 충분했다.
고훈이 고심과 의논 끝에 누가 드 몽텔리마르 두 개를 챙겼다.
“더 가져가도 된다고 하셨어.”
“아는데 할아버지랑 약속했어. 간식은 하루에 하나만 먹기로.”
부잣집 도련님이 왜 간식 하나를 고르는 데 이렇게까지 진지한지 의문이었던 비다 라바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하나는?”
“할아버지 드리려고.”
“나돈데. 난 동생 주려고.”
비다 라바니가 모험하길 포기하고 동생과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누가 드 몽텔리마르 여섯 개를 챙겼다.
소년은 괜히 민망해서 묻지도 않은 말을 늘어놓았다.
“아, 아침 점심 저녁에 하나씩 먹거든. 동생 것까지.”
고훈은 별다른 질문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으로 가실 순 없습니다.”
그 순간이었다.
갤러리 진입로와 2층 계단으로 이어진 복도 끝에 세 남자가 마주 보고 있었다.
사무실이 있는 2층으로 향하려던 제롬 케르비엘을 보안직원이 가로막은 것이었다.
고훈과 비다 라바니가 그 모습을 빤히 보라보다가 다시 사탕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 이쪽에는 무슨 작품이 있나 궁금했을 뿐입니다.”
제롬 케르비엘은 단지 실수였다고 둘러댔다.
그러나 보안직원들의 차가운 눈빛과 태도에 내심 당황했다.
뭔가를 눈치챈 듯한 분위기라 이대로라면 앙리 마르소에게 복수하기는커녕 만나지도 못할 것 같았다.
주머니에 찔러넣은 손에 땀이 찼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든 앙리 마르소가 있는 2층으로 가고 싶었지만 보안직원이 가로막고 있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제롬 케르비엘이 돌아섰다가 1층 제1전시실로 이어지는 문으로 걸어가며 힐끔 동태를 살폈다.
보안직원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계단을 막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케르비엘 씨.”
이름을 불리자 제롬 케르비엘은 가슴이 철렁였다. 차가운 태도가 의심하기 때문임을 직감했다.
“실례지만 잠시 함께해 주시겠습니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보안직원과의 거리는 고작 몇 걸음 남았을 뿐이었다.
만에 하나 몸을 수색한다면 주머니 속에서 쥐고 있는 권총이 발각될 터.
앙리 마르소에게 복수조차 못 하고 이렇게 끝낼 순 없었다.
무엇이라도 해야만 했다.
그의 시야에 제1전시실 앞에 쪼그려 앉은 두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다가오지 마!”
제롬 케르비엘이 가까이 있는 무슬림 소년을 끌어다 권총을 들이밀었다.
“꺄아아아!”
갑자기 난 큰소리에 접수처와 제1전시실에 있던 사람들의 이목이 쏠렸다.
한 아이의 머리에 총구를 들이민 미치광이에 사람들이 기겁했다.
보안직원들도 당황하여 우선 그를 안심시키고자 했다.
“케르비엘 씨, 진정하세요.”
“불러와. 앙리 마르소 불러와!”
“무엇을 원하는지 몰라도 이런 식으로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닥쳐! 내가 장난하는 걸로 보여? 어?”
제롬 케르비엘이 총구로 비다 라비니의 관자놀이를 압박했다.
겁에 질린 소년은 몸이 굳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두려움에 몸을 떨 뿐이었다.
놀라기는 고훈도 마찬가지였다.
한편.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파악한 안드레아스 파머가 아르센에게 경찰을 불러 달라 요청하곤 조심스레 계단 아래를 살폈다.
앙리 마르소를 데려오라는 제롬 케르비엘의 고함이 명확히 들렸다.
동태를 살피기 위해 스마트폰으로 1층 복도 CCTV에 접속하니 한 아이가 인질로 잡혀 있었다.
“작가님, 절대로 나가시면 안 됩니다.”
안드레아스 파머가 당부했다.
“내가 미쳤어? 저길 왜 나가?”
앙리 마르소가 경멸스러운 표정으로 CCTV를 확인했다.
대낮에 인질극을 벌이는 미친놈이 권총까지 가지고 있는데 순순히 요구를 들어줄 리 없었다.
그러던 중 앙리 마르소의 시야에 한 소년이 들어왔다.
“……?”
소년은 제롬 케르비엘 곁에서 쪼그려 앉은 채 등을 보이고 있었다.
“저거 고훈 아니야?”
신고를 마친 아르센이 CCTV 화면을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고훈 군입니다.”
“저게 왜 저기 있어?”
안드레아스 파머가 입술에 검지를 대 보였다.
“아직 모르는 듯합니다. 우선 저 아이라도 떨어질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짜증으로 가득했던 앙리 마르소의 얼굴이 굳었다.
무슬림 소년은 안중에도 없었으나 고훈만은 이야기가 달랐다.
“무슨 일이 있어도 구해내.”
“우선.”
탕!
그 순간 총성이 울렸다.
* * *
1)프랑스는 총기류 소지를 제한적으로 인정한다.
살상 가능한 일반총기류는 관련 직업 등 정당한 사유가 있는 경우에 가능하다.
2015년 소총으로 무장한 테러범이 132명을 살해한 테러 사건 이후 프랑스 총기 규제의 실효성이 문제화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