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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반 고흐-170화 (125/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170화

35. 에로이카(6)

인터넷 기사를 찾아보던 전 SNBA사무처장 제롬 케르비엘이 책상을 내려쳤다.

TV 출연까지 불사하고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는 자신과 달리, 앙리 마르소는 꼬마와 희희낙락거리고 있었다.

└내 생각엔 둘이 짜고 치는 거임.

└뭘 짜고 쳐?

└유명인이 길바닥에서 저런 짓을 할 리 없음. 이슈 만들려고 일부러 저러는 거임.

└우리 형 모함하지 마라. 원래 저런 분이다.

└맞아. 그렇게 생각 깊은 사람 아니야.

└앙리는 그렇다 쳐도 고훈은 왜 저래 ㅋㅋㅋㅋ

└쟤도 한 성깔 하는 듯. 앙리 쌍코피 터뜨렸잖아.

└두 사람 다 따로 있으면 멀쩡한데 만나기만 하면 염병임ㅋㅋㅋㅋ

└ㅋㅋㅋㅋㅋ염병이래 ㅁㅊㅋㅋㅋ

└상황이 좀 이상하다. 옆에선 앙리 마르소 규탄 시위 벌어지는데, 저러고 있네.

└신경 안 쓴다는 뜻 아닐까?

심지어 댓글 반응조차 우호적이었다.

앙리 마르소의 평판을 깎아내림으로써 그를 증오하는 사람을 결집, 확보하려고 노력했던 지난 시간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제롬 케르비엘이 댓글을 작성했다.

└의도가 명백한 일이야. 시위하는 장소 바로 옆에서 저런 짓을 하는 게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저런 짓 해서 뭘 얻는데?

└맞앜ㅋㅋㅋㅋ 어린애랑 싸워서 득볼 거 하나 없구만.

└친근한 이미지 만드는 거지. 권위적이고 독재자란 사실을 숨기려고.

└오?

└이야 여기도 음모론자가 있네.

└음모론이 아님. TV에 나온 사람 말 못 들었어? 회의 녹취록 들어봐.

└응 관심 없어.

└나 저거 들어봤는데 옳은 말만 하던데. 앵테르미탕 혜택 범위가 늘었는데 수혜자는 왜 그대로냐고 화내는 거잖아.

└잘 모르지만 정말 그러면 화낼 만한 일 아닌가?

└그게 아니라 이사진을 자기 맘대로 다루는 걸 봐야지.

└뭔 소리야. 이사진이 잘못하고 있으니까 추궁하는 거잖아.

└얘도 제명된 사람 아님? ㅋㅋㅋ

└지금 실업 급여 못 받았던 사람들 그동안 못 받은 돈까지 받은 거 알긴 함?

└난 저 사람 말도 일리 있어 보이는데. 강압적으로 행동하는 건 맞잖아.

└답답아. 그 사람들 싹 다 잘리고 나니까 정상화되는 거 보면 모르냐?

└뻔하지. 걔들 내보내고 지금까지 온갖 핑계 대고 안 주던 돈 푸는 거 보면.

└ㅇㅇ 그 돈이 다 어디서 났겠어? 3,000명인가 걔들이 다 착복하고 있었단 소리겠지.

└정작 예술인들은 전부 반기는데 제명된 사람들만 뭐라고 함ㅋㅋㅋ

└아저씨, 누군지 몰라도 적당히 하세요. 증거라고 우기는 것들 맞는 소리 하나도 없던데.

“…….”

제롬 케르비엘은 키보드를 누를 수 없었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일부 동조하는 사람도 보였지만 댓글 대부분이 앙리 마르소를 지지하고 있었다.

돈을 주고 수백 개의 기사를 뿌리고, 3,000명이 합심하여 여러 커뮤니티 사이트에 관련 글을 게시하고 댓글과 게시물을 추천했지만 아무 행동도 하지 않은 앙리 마르소를 넘어설 수 없었다.

예술가란 이름도.

평론가란 이름도 포기하고 오직 악에 받쳐 싸웠던 그는 절망했다.

“왜. 왜…….”

노력이라면 충분히 했다고 생각했다.

여러 공모전에서 수상하여 학부생일 때에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모든 일이 멈추고 말았다. 전시회는 더 이상 주목받지 않았고 생계를 위해 평론일을 시작했지만 잠시뿐이었다.

재능이 없었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SNBA 사무처장직과 넉넉한 월급에 만족하며 순응하고 살았거늘.

그 자리마저 앗아간 앙리 마르소가 너무나 미웠다.

그토록 충성했거늘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은 그의 비정함이 원망스러웠다.

재능을 가진, 태어났을 때부터 막대한 부를 물려받은, 잘생긴, 무슨 짓을 해도 호감을 얻는 그의 모든 것이 거슬렸다.

억울했다.

그러지 못한 자신이 경멸스러웠다.

자신에게 재산과 재능을 물려주지 않은 부모가 원망스러웠고 작품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대중은 그렇게 멍청할 수 없었다.

“…….”

변호사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억울함을 호소해도 무죄를 받아낼 순 없다는 답답한 소리만 해댔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 두 차례의 조사를 홀로 받아낸 제롬 케르비엘은 공금 횡령 및 배임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을 앞두고 있었다.

어떻게든 여론을 바꾸어 조금이라도 재판 결과에 영향을 주고자 했거늘 소용없었다.

열등감에 빠져 살아온 남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걸 자각한 순간.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제롬 케르비엘이 서랍을 열었다.

남은 선택지는 그뿐이었다.

* * *

2028년 9월 17일 일요일 오전 10시 30분.

제롬 케르비엘이 상기된 얼굴로 마르소 갤러리를 찾았다.

코트를 입은 그는 주머니 깊이 손을 찔러넣곤 주변을 살폈다.

아침부터 많은 사람이 앙리 마르소의 작품을 감상하고자 방문하고 있었고 입구에는 안내원 한 명과 보안 요원 둘이 서 있었다.

‘죄송합니다만 그렇게 할 순 없습니다. 9월 17일 오전 10시 30분부터 11시까지 가능하십니다. 이때로 약속 잡을까요?’

제롬 케르비엘은 한 달 전 앙리 마르소의 비서 아르센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앙리 마르소와 관련한 기사를 찾아보고 나름의 정보통을 통해 조사한 결과 그의 말대로였다.

앙리 마르소는 정오에 SNBA 임직원 회의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고 오전에는 특별한 일정이 없었다.

제롬 케르비엘이 마른침을 삼키고 발을 옮겼다.

별다른 저항 없이 갤러리에 들어선 그는 천천히 내부를 둘러보았다.

앙리 마르소의 자화상과 자각상만으로 꾸며진 그곳은 행복과 감탄, 경이로움으로 가득했다.

“이것 좀 봐.”

“어떻게 이런 걸 생각하지?”

“사진 아니야? 이게 어떻게 그림이야.”

제롬 케르비엘은 한 작품 한 작품 놓치지 않았다.

베르나르 뷔페 이후 최고의 화가이자 조각가로서는 근대의 로댕, 현대의 마르소란 평을 받는 남자.

결코 따라잡을 수 없었던 남자.

포기하고 굴복했거늘 그조차 허용치 않은 남자가 다시는 자신을 무시하지 못하도록 하는 날이었다.

그가 대단할수록 오늘 본인의 행동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제롬 케르비엘은 인내심을 가지고 갤러리를 거닐며 때때로 2층 사무실을 살폈다.

직원들이 나누는 이야기에도 귀 기울였다.

“대표님 출근하셨어?”

“네. 안 그래도 찾으셨어요.”

“아아아. 어떡해. 아르누보 공모전 기획하시느라 바쁘실 텐데.”

“어서 올라가 보세요.”

미셸 플라티니 대표가 갤러리 안에 있다든지.

“아르센 씨한테 커피 좀 가져다드릴까?”

“관심 있어?”

“뭐……. 흐흫.”

“아서. 결혼해서 아들까지 있어.”

“거짓말.”

앙리 마르소의 비서 아르센이 와 있다는 것까지.

제롬 케르비엘은 2층 사무실에 앙리 마르소가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언제 내려올지 모르는 일.

정면에서 살폈을 때 아르센과 앙리 마르소의 차량이 보이지 않은 것을 확인했으니 어쩌면 후문으로 통행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제롬 케르비엘은 우선 지하 주차장을 확인하기 위해 사탕을 집고 있는 한 소년을 지나쳤다.

한편.

아침에 샤똥을 방문한 앙리 마르소는 고훈의 <여름 너울>에 큰 충격을 받았다.

갤러리 사무실로 돌아온 뒤에도 그 여운이 남아 손에 일을 잡고 있을 수 없었다.

“…….”

작품이 훌륭한 탓이라면 차라리 나았다.

이미 고훈의 작품을 여럿 접한 터라 그 수준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앙리 마르소를 당황하게 한 것은 고훈이 아직 11살이고, 볼 때마다 발전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해바라기>는 후기 인상주의와 동양화를 적절히 융합한 작품이었다.

<손님>은 감성적이고 시각적 재미를 주었지만 묘사력에 있어서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러나 <서리 밀밭>은 어떠했는가.

인상주의의 거장이 진화를 거듭해 현대에 내놓은 작품 같았다.

<가면>은 전위적 예술, <총탄>은 구도를 비틀고 인물을 왜곡시켜 표현주의적 경향을 보였다.

마치 회화의 역사를 답습해나가듯 빠른 속도로 변화를 거듭했다.

그리고 <여름 너울>을 통해 기존에는 없었던 관념을 이미지로 창조해냈다.

일렁이는 착시 현상 속에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그리움에 가슴이 먹먹해지고.

그런 한편 시야를 빠르게 움직이면 그 모습이 활기차 무엇인가 변화함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했다.

앞으로 5년, 10년.

또 그 이후에는 어떤 그림을 그릴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앙리 마르소는 깍지를 이마에 대고 고민에 빠졌다.

세 점으로 구상한 연작은 그가 지금껏 쌓아 올린 모든 기교를 십분 발휘한 작품이었다.

익명성 때문에 아르누보 공모전에는 첫 번째 그림만 출품하지만.

과연 그것이 <여름 너울>보다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설령 이번에 넘어선다 하여도 다음이 두려웠다.

지고 싶지 않았다.

고훈을 인정하고 소년의 작품을 사랑하는 만큼, 그에게서 멀어질 수 없었다.

더 이상 경쟁자가 아니게 됨을.

동등한 위치가 아니게 됨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순간.

앙리 마르소는 자신이 왜 그토록 고훈을 의식해 왔는지 알 수 있었다.

그를 시기했던 것도 열등감 때문도 아니었다.

자신과 닮은 것 같으면서도 다른 천재와 함께하고 싶었다.

소년에게서 영향을 받듯, 소년도 자신에게 감화되길 바랐다.

다른 누구의 이해도 없이 홀로 섰던 고독한 천재가 처음으로 인정받길 바라는 것이었다.

앙리 마르소가 피식 웃었다.

“망할 놈.”

어디까지 가게 될지 모르겠으나 앙리 마르소는 그 경쟁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언젠가는 밀려나는 순간이 오더라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고훈의 작품을 보면 그림을 그리고 싶은 욕구가 치밀었다.

그 상태가 좋았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앙리는 조금 더 고양감을 느끼고 싶었다. 지금은 누구와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무시하고 있으니 한 번 더 노크 소리가 났다.

“뭐야?”

사색을 방해받은 앙리 마르소가 짜증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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