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166화
35. 에로이카(2)
바다였다.
순간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 한복판에 떨어진 것만 같았다.
시선을 옮길 때마다 푸른 물고기들이 펄떡였다.
점을 중심으로 원을 이룬 물고기 떼의 움직임은 파도처럼 활기찼다.
‘독특해요.’
일렁이는 파도는 입체감이 있어 옆에서 보는 것 같기도 했지만.
수면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구도였다.
‘어떤 마술을 부린 건가요.’
피에르 말로는 단순 반복 패턴으로 어떻게 이런 효과를 줄 수 있었는지 의문이었다.
한발 다가갔다.
물고기 사이마다 반복되는 하얀 패턴에 눈이 갔다.
하얀색 패턴은 물고기와 어울려 부서진 파도가 하얗게 거품을 내는 것처럼 표현되었다.
그 때문에 물이 없음에도 그곳이 바다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피에르 말로는 <여름 너울>이 주는 환상적인 경험을 좀 더 가까이 느끼고자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
감탄이 절로 나왔다.
파도의 스프(Soup)라고 생각했던 흰 부분이 가까이서 살피니 붓이었다.1)
물고기는 모두 같은 형태였지만 그 사이마다 존재하는 붓은 조금씩 모양이 달랐다.
물감을 아주 거칠게 사용해 붓 자국이 선명히 드러났다.
끝이 갈라지기도, 물감을 잔뜩 머금기도 해서 가끔은 물고기를 가리기도 했다.
착시 현상을 불러일으키는 단순한 물고기 패턴이 역동적으로 보일 수 있었던 비밀이었다.
‘멋져요.’
피에르 말로는 당혹스러웠다.
여태 그의 마음을 움직인 화가는 더러 있었다.
그러나 <여름 너울>은 지금까지 고훈에게서 받았던 인상을 완전히 뒤집고 말았다.
‘이런 그림도 그릴 수 있었나요.’
<해바라기>, <손님>, <서리 밀밭>, <가면> 등 고훈은 어디까지나 현실에서 볼 수 있는 사물에서 의미를 발견해 왔다.
고훈의 강점은 개성적인 시각과 그것을 강렬한 이미지로 표현하는 힘이었다.
하나 <여름 너울>은 어떠한가.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이미지.
파도치는 바다라는 현실을 치밀하게 구상한 추상적 작품이었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가장 효과적인 방식으로 보는 사람을 바다 한가운데로 초대했다.
“…….”
여러 천재를 알고 지냈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경이로움을 전한 이 사람이야말로 하늘이 내려준 화가라고.
“콘셉트 아트 작업이 도움이 되었어요.”
고훈이 입을 열었다.
“콘셉트 아트?”
“네. 현실을 비틀어 보여주는 방법이 재밌더라고요. 구도는 마네에서 영감을 받았어요. 에셔랑 바자렐리도.”2)
소년은 후대의 여러 작품을 통해 자신을 부수고 세우길 반복했다.
에두아르 마네의 <폴리 베르제르의 카페>로 독특하고 새로운 구도에 흥미를 느꼈고 영화 <기암성>의 콘셉트 아트 <총탄>을 그리는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발상의 영역을 확장했다.
그러한 경험이 <여름 너울>의 기반이 되었다.
소년은 너울진 바다에서 받은 느낌을 전달하고자 여러 착시 원리에 착안하여 끊임없이 고민했고.
결국 수많은 명화를 접한 장인조차 경탄하게 했다.
고훈의 말을 들은 피에르 말로가 다시금 긴 감상에 젖었다.
‘어디까지 생각했던 걸까요.’
고훈이 남긴 붓 자국은 하얗게 부서진 파도처럼 보이기도 했으나, 동시에 많은 붓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되었다.
여러 화가가 꿈과 열정을 다해 참가하는 아르누보 공모전에 이와 같은 작품을 낸 것이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각자의 움직임이 모이고 모여 큰 물결을 이루는 광경이 아르누보 공모전에 참가하는 예술가로 느껴졌다.
‘이렇게나 다를 수 있나요.’
피에르 말로는 또 한 명의 천재를 떠올렸다.
그는 누구보다도 앞서 나감으로써 뒤따르는 이들과 함께 큰 파도를 이루었다.
그야말로 영웅적 존재.
한편 눈앞의 천재는 많은 이와 함께하여 그들과 소통하고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았다.
이 시대의 큰 흐름을 야기하는 두 천재가 예술을 대하는 태도가 이렇게 다를 줄이야.
피에르 말로는 지난 한 달간 프랑스에서 일어난 일과 <여름 너울>을 두고 영웅적 독재자와 공화주의자를 떠올리며 깊은 사색에 잠겼다.
얼마나 흘렀을까.
“곤란하네요.”
마침내 그가 무거운 입을 열었다.
“이 작품의 액자를 찾아낼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피에르 말로에게 액자는 퍼즐이었다.
액자를 만드는 일은 각 작품이 원래 가져야만 하는 단 하나의 조각을 찾는 과정이었다.
고훈이 빙그레 웃었다.
“말로가 못 찾으면 누구도 찾지 못할 거예요.”
소년의 미소에 피에르 말로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네요.”
좀처럼 감을 잡을 수 없었으나 또한 동시에 호승심이 일기도 했다.
평생에 몇 번이나 만날까.
이런 작품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걸릴 것 같으니 천천히 기다려주세요. 제출일이 언제였죠?”
“11월 10일이요.”
“1일까지 준비해 볼게요.”
<서리 밀밭>의 액자가 너무나 완벽했던 터라 고훈은 피에르 말로를 신뢰했다.
“부탁드려요.”
잠시 후.
고훈과 고수열을 배웅하고 돌아선 피에르 말로는 <여름 너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앙리 마르소는 이 그림을 어떻게 볼지 궁금했다.
사이 좋아 보일 때도 있으면서 두 사람이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는 건 이런 생각의 차이 때문이지 않을까.
그의 감상을 듣고 싶었다.
‘무난하겠네요.’
날고 기는 화가가 다수 참가했으나 피에르 말로는 감히 단언했다.
이번 아르누보 공모전의 대상은 <여름 너울> 외에 있을 수 없었다.
수많은 작품 가운데 단연 눈길을 끌고, 가슴을 움직였으며, 깊이감까지 느껴지니 당연한 일이라고 여겼다.
찌르릉- 찌르릉-
피에르 말로가 인터폰을 켰다.
“말씀하세요.”
-대표님, 어떤 분께서 셰바송 회장님의 추천서를 가지고 방문하셨습니다.
어떤 분이라고 하니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모양.
그러나 다른 누구도 아니고 SNBA의 셰바송 씨몽이 추천서를 써 주었다니 만나볼 의향이 있었다.
“용무는요?”
-제작 의뢰입니다.
“흠. 안내해 주세요.”
피에르 말로는 직원을 불러 <여름 너울>을 안쪽으로 옮기도록 지시했다.
잠시 후 허리가 굽은 노인이 직원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로 들어섰다.
일흔 정도 되었을까.
행동이 조심스럽고 힘겨워 보였다.
노인이 오리라곤 생각지 못했던 터라 피에르 말로는 짐짓 놀랐다.
“편히 앉으세요. 피에르 말로입니다.”
“감사합니다.”
직원이 노인의 그림과 셰바송 회장의 추천서를 탁자 위에 두고 자리를 피했다.
‘흠.’
노인을 오랜 친구로 소개한 셰바송 회장은 액자를 제작해 달라는 문구 하나 없이 그저 그림을 봐 달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 정도라면 충분히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이지만, 최고의 작품이 남긴 여운이 남았기에 지금으로서는 어떤 그림을 접해도 큰 감흥이 없을 것 같았다.
피에르 말로는 마음을 조금이나마 환기하고자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작품을 봐도 괜찮을까요?”
“네.”
허락을 구한 피에르 말로가 포장을 벗겨냈다.
“제목은 어떻게 붙이셨나요?”
“Beauté.”3)
30P 캔버스가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 순간 피에르 말로는 움직일 수 없었다.
멈춰버린 손은 갈 곳을 잃었고 오직 눈과 가슴만이 요동쳤다.
“…….”
어둠을 가르는 한 줄기 빛이 한 남자를 비추고 있었다.
순백의 케이프가 나부끼고 금으로 짠 구두가 위풍당당하게도 앞을 향하고 있었다.
‘어떻게.’
피에르 말로는 당황했다.
캔버스와 물감이 빛을 낼 리 없음에도 노인이 가져온 작품은 분명 눈부셨다.
신체의 틈으로 새어 나오는 빛과 그림자의 명도 대비 덕분에 작품이 마치 빛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누구지.’
이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을 모를 리 없거늘.
이런 작품을 완성한 사람이 미술계에 알려지지 않을 리 없거늘 노인은 오늘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대체 이 사람은.’
작품 속 인물은 뒷모습뿐이라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을 비추는 광명과 동일시되어 어둠을 관통해 나가는 초월자.
어떤 종교와 관련된 작품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드는 숭고함이 있었다.
제목 <아름다움>이 품은 의미는 여럿이고, 사람들이 추구하는 미학은 제각각이나 이 작품에서 아름다움을 찾지 못할 사람은 없을 거라 감히 확신했다.
“액자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차분히 기다리던 노인이 입을 열었다. 그 모습은 비굴하지도 오만하지도 않았다.
피에르 말로는 간신히 이성을 되찾았다.
“어르신께서 그리셨나요?”
노인은 답하지 않았다.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고 그저 피에르 말로를 지켜볼 뿐이었다.
대답을 촉구했다간 금방이라도 떠날 것 같아서, 피에르 말로는 숨을 돌리고 설명했다.
“저로서도 욕심 나는 작품이에요. 꼭 만들어 드리고 싶습니다. 다만, 작업이 늦어질 듯한데 괜찮으실까요?”
“11월 10일 오후 4시까지라면 언제든 괜찮습니다.”
‘11월 10일?’
피에르 말로가 조금 전 고훈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아르누보 공모전 작품 제출 시한이 11월 10일.
노인이 액자와 무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 듯 보였기에 피에르 말로는 굳이 확인하지 않았다.
“네. 10일 오전에 찾아와 주시면 준비하겠습니다.”
피에르 말로가 다시 한번 살피곤 고개를 끄덕였다. 태블릿을 켜 필요한 재료를 신중히 골랐다.
쉽지 않았다.
고훈의 <여름 너울>이 감조차 잡히지 않아 망설였다면, 노인의 는 너무나 확고하여 그것을 훼손할까 두려웠다.
피에르 말로는 고훈에게 했던 말을 반복했다.
“대금은 수령하실 때 부탁드리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여 긍정하곤 연락처를 남긴 뒤 힘겹게 매장을 벗어났다.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멀어진 뒤에야 돌아온 피에르 말로는 두 작품 앞에서 생각에 잠겼다.
우승하리라 단언했거늘.
이제는 좀처럼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이 빛은 대체.’
피에르 말로는 이 빛나는 이유가 너무나 궁금했다.
그가 아는 어떤 도료와 물감으로도 이러한 효과를 낼 수 없었다.
“……아니죠.”
먼 기억 속에서 단서를 찾아낸 피에르 말로가 작게 탄식했다.
중국 황제의 물건 중에 이러한 빛을 내는 것이 더러 있었다.
그러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던 것조차 변색되거나 그 빛을 잃었거늘 만은 그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이 오묘한 빛을 냈다.
‘이런 걸 찾아낼 정도면.’
작품을 구상하고 준비하여 표현하는 데까지 완벽했다.
프랑스 최고의 액자 장인은 본인이 이만한 화가를 몰랐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정말 알 수 없네요.”
* * *
1)서핑 용어. 파도가 부서져 하얗게 거품으로 바뀌는 부분.
2)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셔(Maurits Cornelis Escher), 빅토르 바자렐리(Victor Vassarely)
3)Beauté(프): 보떼.
사물, 신체의 아름다움. 미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