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165화
35. 에로이카(1)
화가 장 제리코는 잔뜩 화가 나 있었다.
SNBA에 가입한 이후, 옷 한 벌 사 입지 않고 회비를 밀린 적은 없거늘 몇 년째 앵테르미탕의 수혜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올해도 자격 요건을 충당하지 못했단 소식을 받고 벼르고 벼르던 차.
SNBA에서 찾아오라는 말에 한바탕할 요량으로 본부를 찾았다.
차례가 돌아오고 상담원을 마주한 그가 그간의 설움을 쏟아내려는 순간 뜻하지 않은 소식을 접했다.
“방금 뭐라고?”
“축하드립니다. 이번 주 안에 이번 달 지원금이 지급될 거예요.”
장 제리코는 어안이 벙벙했다.
여태 무슨 짓을 해도 받아주지 않던 SNBA가 작품 목록과 그 사진을 제출하는 것만으로 이렇게 쉽게 허가해 주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지금 장난합니까?”
그러나 마음 가득한 분노가 한순간에 풀어질 리 없었다.
“네?”
“아니, 그렇잖아요. 지금까지 내가 제출한 서류가 몇 갠데 그때는 무시하더니 지금은 왜 또 이렇게 쉽게 처리하는데? 나 지금 가지고 놉니까? 돈 없다고 무시해요?”
상담원은 차분히 그의 말을 듣고 난 후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아들뻘은 될까.
자신보다 한참 어린 상담원이 고개를 숙이니 장 제리코도 머쓱해졌다.
“말씀해 주신 대로 지금까지 앵테르미탕 제도의 대상 판별에 미흡함이 있었습니다.”
“크흠.”
“불편하시겠지만 이전에도 자격 요건을 충족한다는 근거 자료를 제출해 주시면 소급하여 지급해 드리오니 너그럽게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장 제리코가 귀를 의심했다.
작년과 재작년에 받아야 했을 지원금을 준다는 말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또한 그전에 제출한 근거 자료는 어디에 두고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전에 제출한 건 어쩌고 다시 달라고 합니까?”
“관련 사항을 감독하던 직원이 이전 자료를 분실하였습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상담원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대체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프랑스 국립 예술 협회가 지금까지의 행정 자료를 분실한 것도 말이 안 되었다.
“그걸 잃어버리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이에요?”
“죄송합니다.”
젊은 상담원이 고개를 숙였다.
대학을 졸업한 지 얼마나 되었을까. 한창 패기 있을 시기의 남자는 다소 피곤해 보였다.
직장에 다니는 아들이 떠올랐기에 더는 모질게 대할 수 없었다.
상담원이 거듭 사과했다.
“SNBA 임직원 모두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부디 다시 한번 믿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장 제리코는 협회 본부를 나섰다.
자신처럼 씩씩거리며 들어서는 사람들 사이에서 안내 문서를 펼쳤다.
다음 주 수요일에 올해 지급되었어야 할 12,050유로가 일시 지불되고, 올해 말까지 앵테르미탕의 수혜 대상이 됨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당장 급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큰돈이었다.
장 제리코의 핸드폰이 울렸다.
동료 작가 나심 미무니였다.
한 달 전 협회에서 제명된 터라 서로를 위로하며 급속도로 가까워진 사이였다.
“어.”
-뭐 하고 있어?
“잠깐 좀. 왜?”
-얘기나 하자고 전화했지. 괜찮으면 집으로 와.
기분 좋은 소식도 있었기에 장 제리코는 흔쾌히 수락했다.
오늘만큼은 기분으로 괜찮은 베네딕틴(Bénédictine)을 마셔도 될 것 같았다.
잠시 후.
장 제리코는 페캉산 베네딕틴 한 병을 구입해 나심 미무니를 찾았다.
본인에게 찾아온 기쁜 일을 나누려던 장 제리코는 불평을 늘어놓는 친구를 위로하기 위해 잠시 말을 삼갔다.
“나라가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지.”
“왜.”
“지원금 끊은 것으로도 모자라서 도로 뱉으라는 거야. 참나.”
정부가 앵테르미탕으로 받았던 실업 급여를 환수하고 있다는 말에 깜짝 놀랐다.
조금 전 SNBA에서 들었던 이야기와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아니. 왜? 지금까지 잘 받았잖아.”
“이게 다 마르소 그 개자식이 시킨 일 아니겠어?”
“…….”
“생각해 봐. 지금까지 잘 돌아가던 제도가 왜 이 모양이 되었는지. 자기 입맛대로 안 되니까 심술부리는 거잖아.”
누구의 말이 옳은지 알 수 없었기에 장 제리코는 어떤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아니. 그냥…….”
“쯧쯧. 위기의식 좀 가져야 한다고 말했잖아.”
나심 미무니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 권리는 우리가 지켜야 하지 않겠어?”
“무슨 말이야?”
“언제까지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건데. 제롬 케르비엘이 TV 나와서 하는 말 못 들었어?”
“봤지.”
SNBA 사무처장이었던 제롬 케르비엘이 협회를 자진 탈퇴한 일은 프랑스 전역에 큰 충격을 안겼다.
앙리 마르소가 SNBA 이사 회의 때 보인 강압적인 태도 때문이었다.
“SNBA도 이젠 썩은 거야. 예술가를 위한 진짜 협회를 만들자고.”
장 제리코가 망설이자 나심 미무니가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속고도 모르겠어? 저놈은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놈이야. 앵테르미탕의 영웅? 개나 주라 해. 회원이 50만 명이 넘었는데 그중에서 몇 명이나 받았어?”
14만 명뿐이었다.
“모든 예술가에게 혜택을 주겠다는 말로 인지도 쌓고 후원받고. 어? 그렇게 자기 잇속 챙긴 거 아니야.”
나심 미무니의 말을 듣고 있던 장 제리코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다.
당장 다음 주부터 그간 인정받지 못했던 자격 요건을 모두 인정하고 실업 급여를 소급 지급하겠다는 SNBA의 입장과.
나심 미무니의 말은 너무나 달랐다.
“실은 SNBA 다녀온 길이야.”
“어?”
“지원금 주겠다고 하더라고. 지금까지 못 받았던 거 전부.”
나심 미무니가 당황했다.
제명된 이들끼리 새로운 단체를 만들고자 하여 주변 사람을 끌어모으려던 요량이었거늘 SNBA가 이렇게나 빨리 움직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나심은 장 제리코가 다른 생각을 할 시간을 주지 않고자 다그쳤다.
“이 답답한 친구를 봤나. 여론 잠재우려고 하는 짓이지. 그 뻔한 걸 몰라?”
“고작 내 입 막으려고 그 돈을 준다고?”
그러나 의심하기 시작한 장에게는 큰 효력이 없었다.
앙리 마르소가 아무리 돈이 많아도 고작 여론을 뒤엎고자 여태 실업 급여 대상이 되지 못한 수십만 명의 회원에게 적게는 몇천 유로, 많게는 수만 유로를 지급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뻔하지. 사태가 잠잠해지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걸?”
나심 미무니의 말에 장은 침묵했다.
3,000명이 넘는 회원이 제명되자마자 영웅으로 추앙받던 앙리 마르소를 향한 맹비난.
정상 궤도에 올라온 앵테르미탕 제도.
장 제리코는 자꾸만 자신이 무언가 잘못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물어봐야겠어.’
* * *
하루에도 수많은 예술가를 접하는 피에르 말로는 시류에 민감했다.
샤똥을 방문하는 예술가들은 각자 영역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했고, 그들 중 일부는 피에르 말로에게 직간접적으로 여러 정보를 넘겨주었다.
또한 피에르 말로가 직접 상대하지 않고 기성품을 구입하기 위한 방문객들도 직원을 통해 이야기를 전달해 주었다.
최근 가장 화두에 오른 일은 확대, 소급 적용된 앵테르미탕.
최근 기성품 판매량이 상승함을 의아하게 여겼던 피에르 말로는 뜻하지 않은 제보를 받았다.
“여유가 생겨서 샤똥 액자 하나 마련해 보고 싶었답니다.”
“여유요.”
피에르 말로가 콧수염을 늘렸다.
“네. 앵테르미탕 덕분인 것 같습니다. 많이 받은 사람은 2만 유로도 받았다고 합니다. 경제적으로 안정되니 액자나 도구 같은 데에 신경을 쓸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엘르도 손님이 는 것 같습니다.”
또 다른 직원이 두 블록 떨어진 화방 엘르를 언급했다.
붓을 직접 만들어 파는 곳으로 샤똥과 같이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곳이었다.
예술가들의 주머니 사정이 넉넉해지니 관련 업종에도 활력이 생겨났다.
‘역시.’
피에르 말로는 다른 어떤 일보다 앵테르미탕의 정상화를 강조한 앙리 마르소를 떠올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4년 전에 이미 발생했어야 할 시장의 긍정적 흐름이 지금에서야 물꼬를 튼 것이 안타까웠다.
찌르릉- 찌르릉-
“말씀하세요.”
피에르 말로가 인터폰에 대고 말했다.
-고수열 경과 고훈 작가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응접실로 안내해 드리세요. 5분 뒤에 가겠습니다.”
반가움에 미소 지은 피에르 말로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직원들은 회의를 마무리해야 함을 눈치채고 귀를 기울였다.
“당분간 흐름이 더 좋아질 거예요. 다음 안건은 중저가 라인 판매량을 올리는 것으로 고민해 보죠.”
피에르 말로는 앙리 마르소로부터 시작된 이 물결을 조금이라도 더 길게 이어가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파고가 점차 거세지길 바랐다.
“우선 내일부터 제작품을 제외한 상품은 10퍼센트 할인해서 판매하도록 해요.”
“네?”
직원들이 깜짝 놀랐다.
샤똥 소속 장인들이 직접 제작하는 상품은 제외라곤 해도 샤똥에서 생산하는 모든 제품은 그들의 예술혼이 담긴 또 하나의 작품이었다.
그 정신으로 할인, 포인트, 덤과 같은 기본적인 판매 방식조차 거부해 왔거늘.
피에르 말로의 결정을 믿을 수 없었다.
“괜찮을까요?”
“대표님, 조심스럽지만 혹시 저희 작품을 의심하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제 생각은 달라요. 화가들과의 관계를 친밀하게 다지는 계기가 될 수도 있어요.”
“차라리 고가 상품 진열을 앞으로 당기는 게 어떨까요. 여유가 생겼으니 선택의 폭도 넓어졌을 테고.”
“아뇨. 지원금을 받았다고 해도 한 번에 쓸 입장들은 아니에요.”
“도리어 겨우 얻어낸 실업 급여를 노린다는 이미지를 줄 수도 있고요.”
피에르 말로는 어느새 자기들끼리 토론을 이어가는 직원들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럼 먼저 일어날게요.”
“아, 네.”
“고생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대표님도 할인을 말씀하신 거잖아요. 가격 때문에 샤똥을 방문하지 않은 사람들이 왔을 때 할인해서 관계를 만들자는 뜻일 거예요.”
“다시 찾아올 수 있도록 하자는 뜻이네요.”
피에르 말로가 걸음을 재촉했다.
고훈이 가져온 새 작품을 보고 싶은 마음에 들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프랑스에 찾아온 선한 물결을 몸소 체감한 그의 기분은 날아갈 듯했다.
“고수열 경, 고훈 군.”
피에르 말로가 응접실 문을 양쪽으로 활짝 열었다.
“말로.”
한 달 전보다 조금 통통해진 고훈이 피에르 에르메의 마카롱을 입에 넣은 채 뒤돌았다.
“오오. 무슈. 어쩜 이렇게 사랑스러울까요.”
피에르 말로가 고훈의 양쪽 볼을 번갈아 맞대어 인사했다.
“잘 지냈죠?”
“그럼요. 정말 행복하게요.”
피에르 말로가 고수열에게도 예를 보였다.
“두 분 모두 조금 탄 것 같네요.”
“껄껄. 바닷가에 있다 보니 까무잡잡해졌지요.”
대충 안부를 나눈 피에르 말로는 고훈의 새 작품을 보고 싶은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너무 오래 기다려서 더는 못 참겠어요. 그것인가요?”
“네.”
고훈이 포장지를 벗겨냈다.
콧수염을 매만지며 흥분한 마음을 다독이던 피에르 말로는 고훈의 <여름 너울>을 본 순간 눈을 빛냈다.
“Oh là l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