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164화
34. 여름 너울(10)
“자넨 이 상황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
셰바송 씨몽이 역정을 냈다.
“오해받기 쉽다는 걸 대체 왜 모르나. 나서서 해명이라도 해야 할 거 아니야!”
앙리 마르소와 오랜 시간 연을 맺어온 터라 그가 따뜻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오만함 때문에 쉽게 오해받았고 일면 부적절한 행동을 할 때도 있었다.
그렇기에 위험했다.
앙리 마르소의 약점을 잘 아는 이들이 그것을 무기로 세력을 키우기 시작하니 당장에라도 손을 써야만 했다.
친구로서도.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도 베르나르 뷔페 이후 프랑스에서 태어난 가장 뛰어난 화가를 잃을 순 없었다.
“상황을 이해 못 하는 건 영감이야.”
눈을 감은 채 면도를 받는 앙리 마르소는 너무나 평온해 보였다.
“대체 왜 모르나.”
칼이 목 아래에 다가왔음에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했다.
다그쳐도 소용없으니 그를 설득하는 셰바송의 목소리가 간절해졌다.
“저 인간이 왜 저러겠나. 수사받으니까 그전에 여론을 끌려고 저러는 거 아니야. 재판에도 영향을 줄 테고 정당한 판결이 내려져도 그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받지 않겠나.”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아르센이 셰바송을 지지하고 나섰다.
앙리 마르소에게 원한을 가진 제롬 케르비엘은 현재 고발되어 조사받고 있었다.
그가 SNBA 안에서 행했던 부정이 사실로 밝혀진다고 해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터.
그전까지 앙리 마르소는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을 수 있었다.
또한 셰바송이 말한 대로 재판에서 사실이 밝혀진다고 해서 앙리 마르소에게 실망한 모든 이가 오해를 풀 리도 없었다.
그러나 셰바송과 아르센의 거듭된 설득에도 앙리 마르소는 제롬 케르비엘과 제명된 이들에게 조금의 관심도 두지 않았다.
“앵테르미탕 심사는 얼마나 됐어?”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나!”
앙리 마르소가 인상을 썼다.
“그것보다 중요한 일이 어딨어.”
“……후우. 전수 조사가 그리 쉬운 게 아닐세. 다음 주까지는 마무리하라고 일러두었으니 걱정 말고 본인부터 챙기게. 제발.”
셰바송은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한 번 더 애원했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면도를 마친 앙리 마르소는 고개를 움직이며 거울 속 자신을 살폈다.
“영감.”
한숨을 내쉬고 돌아섰던 셰바송 씨몽이 앙리 마르소의 부름에 일말의 기대를 품고 고개를 돌렸다.
“쓰레기를 치우면 손이 더러워져.”
“갑자기 무슨 말인가.”
잠시 고민한 셰바송이 단단히 일러두었다.
“혹시 저들을 고려해서 한 말이라면 난 생각이 다르네. 손이 더러워진다고 청소를 못 하는 게 말이나 되는가?”
진심을 알아주지 않는 앙리에게 잔뜩 화가 난 셰바송이 쏘아붙이자, 앙리 마르소가 피식 웃었다.
“내 일이 아니라고.”
* * *
“자네 일이 아니면 누구 일이란 말인가!”
셰바송 영감은 아주 큰 착각을 하고 있다.
왕은 직접 움직이지 않는다.
왕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자다.
하물며 기르던 주인조차 몰라보는 가축이 왕의 뜻을 이해할 수나 있으랴.
아무리 가르쳐도 짐승이 문학을 이해하지 못하듯, 무뢰배들이 나의 지고한 뜻을 이해할 리 없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 짐승을 상대할 이유 따위 없다.
그럴 기미가 있더라면 주는 먹이를 받아먹으며 제 할 일이나 했을 터.
우리를 제 발로 걷어차고 나간 짐승 따위는 굶주린 이리의 사냥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살찐 돼지가 그 어떤 울타리도 없이 생존해야 했던 이리 무리와 마주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작가님.”
셰바송 영감을 배웅한 아르센이 돌아왔다.
“저 또한 이번 사태를 쉽게 생각하시는 듯해 걱정입니다.”
이 충직한 신하도 마찬가지.
“제롬 케르비엘이 현재 수사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면 어느 정도 무마될 겁니다.”
아르센의 말대로 전화 한 통이면 르 피가로와 르 몽드, TF1, Canal+ 등 모든 언론이 내 고귀한 뜻을 찬양할 것이다.
“아르센.”
“네.”
“내가 언제부터 구걸하고 다녔지?”
칭송을 바라는 인간은 왕의 자질을 갖추지 못한 망상가일 뿐.
왕은 길을 개척하는 사람이다.
누구보다도 먼저 걸어 나가는 사람이다.
그에 마음이 동한 백성들이 스스로 따르고 우러러봐야만 진정한 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그 쓰레기들만 못하다면 그래야겠지.”
“…….”
“다 보고 있어.”
백성들은 보고 있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각자의 경험과 배움으로 판단하겠지.
그들의 귀와 가슴에 내 고상한 행동과 뜻이 전해지지 않을 리 없다.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 따위가 그것을 막아설 순 없다.
“앵테르미탕이나 문제없이 처리해.”
아르센이 고개를 숙였다.
일어서니 스마트폰을 넘긴다.
“피에르 말로 대표입니다.”
일전에 맡긴 일이 마무리되었나.
그러지 않아도 아르누보 공모전에 출품할 도 넘겨야 하던 차에 잘되었다.
입이 무거운 사람인지라 익명 참가 사실을 함구하길 요청할 수도 있겠지만, 예상 밖의 상황을 최대한 배제해야 한다.
눈치 빠른 자니 내 작품으로 의심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오늘은 일정 정도만 파악할까.
전화를 받았다.
“말씀하시죠.”
-놀라지 말아요.
무슨 뜻이지.
-이보다 사랑스러운 작품은 없을 거예요. 조금이라도 빨리 보여드리고 싶은데. 어떤가요?
<앙리 마르소 785>와 <앙리 마르소 787>가 잘 완성된 모양이다.
“아르센, 오후 일정은?”
“샤를 망쟁 회장 등과 사교 모임이 예정되어 있고 이후에는 장 뷔로 의원이 연 자선 파티에 참석하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한 시간 정도 여유가 있다.
“지금 가죠.”
-정말 마음에 들 거예요.
아르센에게 스마트폰을 넘겼다.
“준비해. 10분 뒤에 내려갈 테니.”
“네.”
옷을 챙겨 입던 중 어지러움을 느꼈다.
를 그리는 몇 주간 생활이 엉망이었으니 무리도 아니다.
장 뷔로의 자선 행사는 미셸에게 맡기고 오늘은 일찍 잠들어야겠다.
“앙리.”
유모 목소리다.
돌아보자 앞치마를 한 채 먼지떨이를 들고 다가온다.
“훈이 온다던데. 들었니?”
“유모가 어떻게 알아?”
“직접 들었지. 놀러 와도 괜찮냐고 하더라.”
“어딜. 여길?”
“그럼 어디겠니. 너도 좋아할 것 같아서 알려줬더니 알고 있었구나.”
“오지 말라고 해.”
“왜?”
그 빌어먹을 꼬맹이의 머릿속을 모를 내가 아니다.
나를 보러 오는 것이 아니라 유모의 음식을 탐하러 오는 게 분명하다.
“그러면 안 돼. 친하게 지내야지. 친구도 없으면서 겨우 사귄 아이를 내치면 되니?”
“내가 친구가 왜 없어.”
유모가 눈을 깜빡인다. 어깨를 으쓱이며 묻는다.
“누구?”
“……그딴 거 필요 없어!”
“그것 보렴. 너랑 친구 해 줄 사람 많지 않으니까 상냥하게 대해줘.”
“신경 쓰지 마! 그리고 그건 또 왜 들고 있어? 내가 청소하지 말랬지!”
“얘는. 다들 일하는데 어떻게 나만 노니?”
“안 해도 돼!”
“그런 법이 어딨니. 네가 그림 그리는 것처럼 이 집을 청소하는 게 내 일이야.”
빌어먹을.
허리도 안 좋으면서 언제까지 일할 생각인지 모르겠다.
잡일 따위 다른 사람에게 시키면 될 터인데, 마르소 가문의 일원이 굳이 먼지떨이와 걸레를 들고 있으니 답답할 따름이다.
“유모 일은 앞으로 차 마시고 요가하는 거야. 알았어?”
* * *
“어떠신가요? 너무나 사랑스럽죠?”
피에르 말로의 질문에 앙리 마르소는 말문이 막혔다.
<앙리 마르소 785>, <앙리 마르소 787>을 맡기면서 미셸에게 선물 받은 고훈의 해바라기 사인을 함께 넘겼거늘.
설마하니 액자를 만들어 줄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어찌나 공을 들였는지 검게 칠한 나무에서 우아함이 묻어나왔다.
“옻나무에서 채취한 수액으로 만든 도료예요. 고훈 군의 노란 해바라기가 더 돋보이지 않나요?”
잠시 고장 났던 앙리 마르소가 고개를 저었다.
“적당히 넣어달라 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귀여운 그림을 기성품에 넣을 순 없죠. 또 마르소 군이 특별히 애정하는 물건이라 덤으로 만들어 봤어요. 내 선물이에요.”
“…….”
앙리 마르소가 얼떨결에 고훈의 해바라기 사인을 받아들었다.
확실히 피에르 말로가 직접 만든 액자답게 해바라기의 노란색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당황한 앙리를 지켜보던 피에르 말로가 싱긋 웃으며 <앙리 마르소 785>와 <앙리 마르소 787>을 보였다.
“올해는 멋진 작품이 많네요. 고훈 군과 마르소 군의 작품만 벌써 열 작품이나 맡았으니까요. 아, 고수열 경의 사랑7도 주신다고 했었죠?”
“화려해야 합니다.”
앙리 마르소가 유독 강조하여 말했다.
피에르 말로의 실력을 익히 알고 신뢰했기에 특별히 다른 주문을 하지 않았지만, 마르소 미술관 현대관을 가장 먼저 장식할 <사랑7>만큼은 화려하게 치장해야 했다.
피에르 말로가 쿡쿡 웃었다.
앙리의 속내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작품은 언제 넘겨주시나요? 다음 주엔 고훈 군이 예약되어 있는데.”
앙리 마르소가 시선을 주자 아르센이 나섰다.
“런던 일정 이후에 수령하기로 했습니다. 내년 2월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피에르 말로가 고개를 끄덕이며 일정표에 앙리 마르소의 이름과 <사랑7>을 적어두었다.
“조금 피곤해 보이네요. 아르누보 공모전 때문에 바쁜가 봐요.”
앙리 마르소가 내심 놀랐다.
그러나 이내 공모전 참가 여부를 모르는 피에르 말로가 다른 뜻으로 물어보진 않았을 것으로 판단했다.
“정말 멋진 발상이었어요. 완전 투표로 결정되는 공모전이라니. 1,700명이나 지원했다죠?”
지원자 수 자체는 특별히 많지 않았지만, 그 면면이 이름깨나 알린 이들이라는 점에서 아르누보 공모전의 위상은 충분히 입증되었다.
“작품명만 밝히는 점도 멋져요. 화가의 명성이 아니라 작품 자체로 판단하길 바라는 시도도요. 아마 더 많은 사람에게 기회가 갈 테죠. 공평하게요.”
피에르 말로가 수다를 이어나갔다.
“그래도 알아보지 않을까 싶어요. 마르소 군처럼 개성이 강한 작가들도 있으니까요. 고훈 군이 어떤 그림으로 참가할지 찾아보는 것도 즐거울 텐데, 미리 알게 되어 그 점은 아쉽게 되었어요.”
피에르 말로가 말없이 듣고 있던 앙리 마르소를 보았다.
“정말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평소에도 말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오늘따라 과묵하네요.”
피에르 말로가 콧수염을 매만지며 앙리 마르소를 관찰했다.
최근 SNBA 회원 제명 사건이 유난히 불거지며 마음고생하는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그러나 이내 걱정 따위 할 위인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마르소 미술관, 아르누보 공모전, SNBA 2028 살롱전까지 챙겨야 할 일이 많은 탓이라고 여겼다.
“오늘은 푹 쉬는 게 좋겠어요.”
피에르 말로가 프랑스 미술계의 영웅을 진심으로 위했다.
이번 여름.
부정 청탁과 금품 수수로 인한 심사, 비평 등으로 얼룩진 미술계를 깔끔히 씻어낼 준비로 고생한 그에게 애정과 경의를 표했다.
“응원해요, 에로이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