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163화
34. 여름 너울(9)
[앙리 마르소가 지배하는 SNBA]
[프랑스 미술계를 위협하는 큰손]
[독재자 앙리 마르소]
오늘 미술평론가 겸 조각가 아를레트 리찌가 지난 8월, 프랑스 국립 예술 협회(SNBA)에서 제명된 일에 관하여 입을 열었다.
당시 협회 방침에 반대한 3,228명의 회원을 제명하는 과정이 부적절했다는 지적이다.
SNBA 집단 제명 사건은 지난 한 달간 예술계의 뜨거움 감자로 부상했다.
총상금 250만 유로의 아르누보 공모전에 심사위원을 배제함을 반대하고 나선 회원들을 정당한 절차 없이 제명 통보했기 때문.
아를레트 리찌는 이를 앙리 마르소가 주도했으며, 사실상 지난 4년간 SNBA가 그의 입맛대로 운영되었다고 주장했다.
아를레트 리찌의 주장에 따르면 앙리 마르소는 2024년 협회에 가입한 이후 협회 내 방침과 조례를 수정하고 행사를 축소, 신설하는 등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개인 및 단체의 후원금과 정부 보조금, 협회 소속 예술가의 회원비로 운영되는 SNBA의 특성상 아를레트 리찌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앙리 마르소는 법적 책임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한다.
아를레트 리찌는 제명된 3,228명의 회원과 함께 앙리 마르소 규탄서를 발표했으며 행정당국에 고발장을 제출했다.
SNBA가 적극적으로 상황을 부정하는 한편, 앙리 마르소는 아직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여름이 지나갈 즈음.
SNBA에서 제명된 이들이 본격적으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지난 한 달간 여러 언론, 포럼, 커뮤니티 사이트 등을 통해 물색작업을 해둔 덕에 사태는 미셸 플라티니와 셰바송 씨몽의 예상 이상으로 심각해졌다.
수천 명이 입을 모으니 설마 하던 이들도 조금씩 의심하게 되었다.
└앙리 마르소가 나와서 해명을 하긴 해야 할 듯.
└이 이야기 나온 지 한 달이 다 돼가는데 아무 말 없는 거 보면 뒤가 구리긴 한가 봐?
└해명하면 뭐 해. 어차피 안 믿을 사람은 뭐라고 해도 안 믿을 거.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미술 하는 인간들은 앙리 마르소 욕 못 함. 앵테르미탕 제도 수혜 대상 확대된 게 누구 덕인데.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자기 말 반대한다고 제명하는 게 말이 됨?
└그랬단 증거 있음?
└난 이게 대체 왜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네. 제명된 사람들은 애초에 자기들 의견 반영 안 하면 탈퇴한다고 했잖아.
└제명이니까 문제지.
└무슨 말임?
└협회가 주관하는 행사 참가 못 하게 됨. 그러니 저렇게 난리인 거.
└협회 소속 아닌 사람들도 아르누보 공모전 참가하잖아.
└제명당한 사람은 아님. 지원금 같은 복지제도 대상에서도 제외됨.
└셰바송 회장이 말했잖아. 앙리 마르소의 독단으로 처리된 문제가 아니라 SNBA 이사진 전체의 결정이라고.
└SNBA 이사진 모두 앙리 마르소 눈치 보고 있으니까 당연하지.
└난 첨부터 걔 마음에 안 들었음. 유명해진 것도 파리역 광고판 다 사들인 덕인데, 걔가 그 돈 없었으면 지금 저렇게 될 수 있었겠어?
└ㄹㅇ 물려받은 돈 많으니까 펑펑 써대는 거지. 뭐 좀 얻어먹을 거 없나 기웃대는 사람들만 상대하고 바른말 하는 사람은 무시하고.
└인성 더러운 건 다들 알고 있었잖아.
└근데 아르누보 공모전 심사방식이 그렇게 잘못된 거야? 지금 미술계 최대 과제가 대중화인데 도리어 좋은 일 아님?
└대중화해서 뭐 함? 진짜 예술 하는 사람들은 그런 거 안 바람.
└솔직히 앙리 마르소가 예술가냐? 엔터테이너지?
└아니 돈이 돼야 미술 하는 사람들도 먹고살지. 대중성을 버리고 어떻게 예술만 해.
└알아주는 사람만 알아주면 됨. 그리고 그런 거 지켜주려고 앵테르미탕 같은 게 있는 거잖아.
앙리 마르소를 향한 비난 여론이 거세지며 그를 옹호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앙리 마르소의 팬들은 대중으로부터 멀어졌던 미술을 대중화하는 데 기여한 점과 더 많은 예술인이 복지제도를 누릴 수 있도록 한 점을 강조했다.
반면 예술인들의 자유와 권리를 앗아갔다는 목소리 또한 만만치 않았고 그러한 일은 아르센을 통해 앙리 마르소에게 전달되었다.
“뭐라는 거야.”
면도를 받던 앙리 마르소가 미간을 찌푸렸다.
비서 아르센이 전달한 기사 중 절반이 앙리 마르소가 SNBA 위에 군림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당연히 내 거지.”
그의 사고방식을 익히 아는 아르센도 이번만큼은 걱정되었다.
“아직은 조심하셔야 합니다.”
“흥.”
충직한 비서는 앙리 마르소가 재정적 어려움을 겪던 프랑스 국립 예술 협회에 거액을 투자한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SNBA는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평생을 무시하고 지냈던 그곳에 4년 전 굳이 합류한 이유는 경직된 프랑스 예술계 탓이었다.
소수 예술가를 제외하곤 대부분이 메종 데 아티스트와 앵테르미탕 등 복지제도에 기대어 살아갔다.
미술을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독재자는 예술가가 예술로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을 납득할 수 없었다.
문제는 여럿이었다.
개인의 자질 부족, 지원금에 안주한 생태, 정작 지원금이 절실한 이들을 외면한 복지제도, 스스로 고립하길 바라는 태도.
앙리 마르소가 그중 가장 혐오하는 이는 자기만족을 지향하는 예술가들이 지원금에 기대어 사는 것이었다.
미술은 자기표현.
800여 점의 자화상과 자각상을 남긴 앙리 마르소는 그들을 비난하기는커녕 도리어 일종의 동질감을 느꼈다.
그런 만큼 그들이 본인의 능력이 아닌, 타인에게 기대어 사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본인의 힘으로 행하는 자기표현은 그 자체로 고귀한 행동이고 그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가장 순수한 예술이었다.
그런 예술을 하는 사람이야말로 비로소 동시대를 살아가는 예술가로서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자격이 있었다.
앙리 마르소는 조금의 발전도 없이 수준 이하의 결과물을 내는 이들을 쓰레기로 여겼다.
젊은 예술가에게 돌아갈 지원금을 독식하는 암세포.
탐욕스럽게 덩치를 키워 예술계를 좀먹는 무능한 이들을 두고 볼 수 없었다.
앙리 마르소라는 걸출한 인물을 우러러보는 어린 양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을 찬양할 수 있도록 나서야만 했다.
“다음.”
앙리 마르소가 다음 소식을 재촉했다.
“고수열 경의 전시회가 마무리되었습니다. 한 달간 130만 명이 다녀갔다고 합니다.”
“…….”
앙리 마르소가 눈매를 좁혔다.
한 개인이 세계적인 비엔날레 수준의 흥행 기록을 세웠다.
앞으로 유럽과 미국 등지를 순회하며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의 가슴을 울릴지 미지수였다.
단 한 번의 공연으로 수만 명을 회동하는 음악계와 달리, 해가 지날수록 방문자 수가 급격히 줄어드는 미술계에 2028년은 변곡점이었다.
고훈과 역사상 가장 큰 흥행을 기록한 휘트니 비엔날레 그리고 고수열까지.
앙리 마르소는 올해 말 아르누보 공모전과 SNBA 살롱전이 그 방점을 찍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이품송 경매는 순회전이 끝난 뒤 런던 소더비에서 치러진다고 합니다.”
“다음.”
“고훈 군이 다니는 한국 초등학교가 개학했다고 합니다.”
“그놈이 학교를 가든 사든 무슨 상관이야.”
“계속 궁금해하시길래.”
“내가 언제!”
아르센은 고훈이 방송을 켜는지 안 켜는지 하루에 두 번씩 확인하지 않냐고 묻고 싶은 마음을 다독였다.
한편 앙리 마르소가 갑자기 소리를 질러 그의 얼굴에 상처를 낼 뻔한 이발사는 가슴이 터질 듯이 뛰었다.
아르센이 다음 소식을 전했다.
“다음 주에 파리 방문 예정이라고 합니다.”
“누가?”
“고수열 경과 고훈 군입니다.”
앙리 마르소가 미간을 모았다.
“뭐 하러?”
“확인되진 않았습니다.”
앙리 마르소가 입을 샐쭉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아르누보 공모전까지는 시일이 많이 남아 있었다.
개학까지 한 마당에 파리에 오는 이유라면 샤똥의 피에르 말로에게 액자를 부탁할 일뿐이었다.
‘완성했나.’
앙리 마르소는 오늘 새벽에 완성한 를 떠올리곤 피에르 말로를 찾는 일을 서둘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내일 일정 취소해.”
“네.”
스케줄러를 수정한 아르센이 다음 소식을 전했다.
“고훈 군의 뉴튜브 채널 구독자가 10만 명을 넘었습니다. 최근 영어 자막을 달면서 유입이 는 것으로 추측합니다.”
앙리 마르소가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아까부터 왜 자꾸 그놈 이야기만 꺼내?”
“불어는 빠져 있습니다.”
앙리 마르소가 아르센을 노려보았다.
“일부러 그래? 어?”
“아닙니다.”
“재밌어?”
“조금 재밌습니다.”
순간 진심을 내뱉은 아르센이 당황했다.
앙리 마르소는 관자놀이에 핏줄이 돋아나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 같았다.
“앙리 군! 앙리 군!”
불호령이 떨어지려던 차, 나이 든 목소리가 문 너머 다급히 들려왔다.
SNBA의 셰바송 회장이 숨을 헐떡거리며 문을 열어젖혔다.
앙리는 초고도비만인 그가 뛰어온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영감, 방금 뛰었어?”
“학. 하악. 학.”
셰바송이 숨을 가쁘게 내쉬었다.
“자네. 허업. ……제롬 케르비엘하고 무슨 일 있었나?”
“제롬 케르비엘?”
앙리 마르소가 먼 기억 속에서 사무처장직을 맡고 있던 쓰레기의 이름을 떠올렸다.
“아니. 별일 없었는데.”
“지금 난리도 아니야! TV. TV 틀어보게.”
셰바송 회장의 요청에 아르센이 거울을 조작했다. 곧 앙리 마르소를 비추던 거울에 TV 화면이 떠올랐다.1)
-그렇다면 제명된 예술인들이 주장하던 말이 사실이라는 뜻입니까?
-네. SNBA는 2024년 이후 모든 일을 앙리 마르소를 통해 처리해 왔습니다.
제롬 케르비엘이 뉴스에 출연해 인터뷰를 나누고 있었다.
-국립이란 명칭만 남았다고는 하지만, 그런 일이 정말 가능한가요?
-네. SNBA의 예산 중 41%가 앙리 마르소의 후원금입니다. 4년 내내 비슷한 수준을 유지했죠. 그러다 보니 이사진 모두 그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혹시 그랬다는 증거도 가지고 계십니까?
-이사진 회의록 사본을 가지고 있습니다. 읽어 보시면 아시겠지만 대부분 모든 사항을 앙리 마르소가 지시하는 상황이 기록되어 있죠.
-그걸 공개하실 생각이 있으신 건가요?
-네. 사실 많이 무섭습니다. 워낙 거대한 인물이니까요. 그러나 우리 예술인들의 자유와 정의를 위해서라도 꼭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용기 내어 제보해 주심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러면 잠시 후 2부에서 전 SNBA 사무처장 제롬 케르비엘 씨가 확보한 회의록을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아르센도 면도하던 이발사도 모두 눈과 귀를 의심했다.
상황을 알고 있는 그들로서는 줄타기에 실패한 제롬 케르비엘이 마지막 발악을 하는 줄 알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 앙리 마르소의 비리가 파헤쳐지기 일보 직전처럼 보일 듯했다.
특히나 앙리 마르소의 평소 언행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 십상이었다.
“자네, 이제 정말 어쩔 텐가. 서두르지 않으면 큰일 나. 큰일!”
셰바송 회장이 애가 타 닦달했고 위기 의식을 느낀 아르센도 정색하고 나섰다.
“작가님, 지금이라도 서두르면.”
“그럴 필요 없어.”
앙리 마르소는 태연히 고개를 젖혔다. 그러고는 시선을 주어 면도를 계속하라고 지시했다.
“앙리 군!”
셰바송이 소리쳤지만 그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조용히 해. 혈압 올라.”
협회장은 도리어 자신의 고혈압을 걱정해 주는 앙리 마르소의 태연함에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 * *
1)미러 디스플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