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162화
34. 여름 너울(8)
배달 음식을 주문할 곳이 마땅치 않아서 근처 음식점에서 가자미찜을 먹었다.
가자미를 양념해서 통으로 찐 음식인데, 어찌나 많이 주는지 냄비가 가득했다.
생선 가시를 바르는 데 익숙지 않아 나도 차시현도 할아버지가 일일이 손질한 가자미를 먹었다.
“살살 먹어. 가시 있는지 잘 보고.”
“네.”
맛있다.
맵지 않을 정도의 매콤함과 짜다고 생각할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지키는 짠맛이 적절하게 어울렸다.
그러나 이름과 모순되게도 이 가자미찜의 주인공은 무.
“합.”
양념장이 고루 스며든 무를 호호 불어 따뜻한 흰쌀밥과 함께 먹으니 이보다 훌륭한 반찬이 있을 수 있을까 싶다.
함께 나온 나물과 가자미 살을 곁들이는 것도 잊지 않는다.
바스러지는 흰살 생선과 자극적인 양념, 따뜻한 밥 그리고 입맛을 돋우는 나물 반찬은 어떻게 조합해도 흥미롭다.
가자미와 밥을 함께 먹어도 훌륭하고, 나물과 가자미, 나물과 밥, 무와 가자미.
밥에 양념장을 덜어서 비벼 먹는 것 또한 훌륭하다.
오늘도 근사한 저녁을 먹었다.
집으로 돌아와 씻고 침대에 누웠다. <기암성> 티저 영상 댓글을 한 번 더 확인하곤 착시 현상에 대해 좀 더 알아보았다.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알수록 흥미롭다.
현실을 평면 위에 그려서 입체적으로 보이게 하는 원근법 또한 착시의 한 종류라는 점에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시간이 충분하다면 자세히 공부하고 싶으나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다.
그림을 일렁이는 것처럼 보이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좋은 예시를 찾았다.1)
중앙점에 시선을 고정하고 얼굴을 가까이했다가 멀어지기를 반복하면 원이 회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걸 모션 착시 현상이라고 하는데, 색상 대비와 위치 인지 과정에서 생겨나는 뇌의 착각이란다.
몇몇 논문을 찾아보았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고, 어떻게 그릴 수 있는지에 대해서 언급하는 사람은 없었다.
할 수 없이 모션 착시를 불러일으키는 그림을 직접 관찰하다 보니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시선을 고정하면 그림은 움직이지 않는다. 시선을 옮기거나 거리를 달리했을 때 움직였다.
아마 초점을 조절할 때 그전에 봤던 잔상이 남아서 지금 보는 것과 혼동을 느끼는 게 아닐까 추측해 본다.
또 움직이는 그림은 일정 모양이 연속적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객체마다 아주 단순하게라도 음영이 들어가 있었다.
이렇게 단순한 형태라야 가능한 일인가.
여러 그림을 살펴도 회화적 그림이 움직이는 경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건 어때?”
차시현이 착시 원리를 쉽게 정리한 글을 보여주었다.
움직이는 그림을 그리는 방법은 소개되지 않았지만, 재밌는 이야기라 읽어 보았다.
동시 대비(Simultaneous contrast)라고 색이 주변 색의 영향을 받아 다르게 보이는 현상.
비교한 사진을 보니 명도와 채도가 확실히 달라 보이게 되는데, 이는 경험적으로 확실히 알고 있었다.
또 하나는 적응현상(Adaptation).
글쓴이는 색순응 현상이라고 설명한다.
무엇을 응시하고 있으면 물체에 반사되는 색과 조명에 익숙해져서 조명에 의해 색이 변하더라도 본래 인지하던 색으로 인식한다고 한다.
“…….”
“왜?”
“그림을 그리고 싶은데, 이런 것까지 공부하게 될 줄은 몰랐어.”
“맞아. 너무 어려워.”
예술을 하려면 정말 복합적이고 다양한 지식을 쌓아야 한다.
문학, 음악, 연극 등 다른 분야를 접하며 가슴과 머리를 가득 채워야 한다.
그러고도 부족해서 항상 배워야 함을 매번 느끼는데.
착시 현상을 공부하니 조금은 회의감이 들기도 한다.
이런 이론은 생물학자나 뇌과학자들에게 맡기고 너울진 바다를 그리는 데 집중하자.
우선 일정한 패턴을 규칙적으로 배열했을 때 움직이는 현상을 느꼈으니 그것을 단서로 그려보았다.
“하나도 안 움직여.”
역시 쉽게 될 리가 없다.
* * *
삼척에서 일주일을 머물렀다.
그동안 착시를 일으키는 패턴에 대해서 조금 감을 잡았지만, 그것을 파도처럼 그리는 일에는 조금도 진전이 없었다.
집에 박혀서 그림만 그리고 있으니 할아버지가 기분 전환도 할 겸 낚시를 하자고 하셨다.
내일 서울로 올라가야 하는 차시현은 조금 지루했는지 할아버지의 제안을 반겼다.
“빨리! 빨리!”
서두르라고 성화다.
절벽 위에서 하는 낚시는 위험해서 난간이 설치된 방파제 위에 자리를 잡았다.
“자. 하나씩 들고.”
할아버지가 조립해 주신 낚싯대를 들었다. 190㎜로 어린이가 쓰는 거라고 하셨는데, 그렇지만은 아닌 것 같다.
들기 힘들다.
“미끼를 써야지.”
“귀엽다.”
할아버지가 미끼로 쓸 소라게를 보여주셨다.
차시현이 쪼그려 앉아 소라게를 관찰했다. 내가 보기에도 먹이로 주기엔 너무 귀엽다.
“자, 여기에 이렇게 머리부터 집을 통과해서 끼우면 돼.”
“바늘을요?”
차시현이 놀라며 물었다.
“그래야 물고기가 먹을 때 바늘에 걸리지.”
“아프잖아요.”
날카로운 바늘에 관통당할 소라게가 불쌍한가 보다.
맛있는 생선을 잡으려면 미끼로 사용해야 한다고 해도 그럴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다.
착한 녀석이다.
“그럼 얘는 어떠냐.”
할아버지가 소라게 대신 지렁이를 보여주셨다.
홍갯지렁이라고 작고 분홍빛이 돈다.
“……저는 낚시 안 할래요.”
의자를 가지고 와서 내 옆에 앉는다. 태블릿을 꺼내는 걸 보니 그림 그리며 시간을 보낼 생각인 듯하다.
“해보자.”
“불쌍하잖아.”
“맛있는 거 잡을 수 있잖아.”
“사 먹는 게 좋지 않을까?”
“사 먹으면 안 불쌍해?”
고개를 갸웃한다.
생선을 먹는 일도 생명을 취하는 일 아니냐고 묻자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이 귀엽다.
할아버지가 밑밥을 뿌리셨다.
조금 기다리자 잔잔했던 수면이 조금씩 움직인다. 물고기가 상당히 많아서 차시현도 난간에 기대어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조심해야 한다. 바늘에 걸리면 엄청 아파.”
“네.”
할아버지를 따라 찌를 던지고 천천히 바다를 지켜보았다.
일주일간 반복한 일이나 바다는 모든 걸 다 보여주는 듯하면서도 좀처럼 그 속을 헤아리기 힘들다.
그것을 온전히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벅차거늘 모션 착시 효과를 더하려고 하니 한계를 느꼈다.
일정 패턴으로 비슷한 효과를 내는 법은 조금 터득했지만, 파도를 단순화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포기해야 하나.
굳이 공모전에 내지 않고 시간을 두어 고민한다면 언젠가는 방법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은 할 수 없는 일도 내일, 한 달, 몇 년 뒤에는 가능할 수 있으니까.
“음.”
할아버지의 낚싯줄이 팽팽해졌다.
줄을 늘이고 감으시더니 이내 수면에 할아버지 손바닥보다도 큰 물고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충 35~40㎝는 되어 보인다.
“우와.”
차시현이 감탄한다.
“이게 뭐예요?”
“놀래미구나.”2)
흑갈색에 배 부분이 조금 희다.
꼬리는 반듯하게 뻗어 있는데 펄떡펄떡 뛰는 걸 보니 성격 있는 녀석이다.
맛있어 보인다.
“맛있어요?”
“맛있지. 살이 포슬포슬해. 매운탕 해 먹으면 되겠구나.”
혹시나 할아버지가 직접 만든다고 하실까 봐 걱정된다.
“근처 식당에 가져가면 맛있게 끓여줄 거야.”
다행이다.
할아버지가 잡은 물고기를 통에 담고 다시 한번 미끼를 던졌다.
금방 또 한 마리를 잡으신다.
그도 그럴 것이 수면에 물고기가 떼를 지어 얼굴을 들이민다. 물 반 고기 반이다.
먹이를 먹으려고 첨벙거리며 물결을 이루니 배가 많이 고픈 듯하다.
“아.”
순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거 좀 잡고 있어 봐.”
“어? 나 어떻게 하는지 모르는데.”
“나도 몰라.”
차시현에게 낚싯대를 맡기고 태블릿을 꺼냈다.
물고기라면 단순하게 그리기 쉽다.
그렇게 물고기 모양 패턴을 그려 파도가 일렁이는 듯한 효과를 줄 수 있지 않을까.
펜으로 그리다가 도무지 답답해서 도로 집어넣었다.
“할아버지, 저 돌아갈게요.”
“으잉? 지금?”
“좋은 생각이 났어요.”
“잠깐 기다려라. 어떻게 혼자 가려고.”
“괜찮아요. 급해요.”
할아버지와 차시현을 남겨두고 별장으로 뛰어올랐다.
몸이 어려지면서 체력도 좋아졌지만 경사길을 단숨에 올라오니 숨이 턱까지 찬다.
겨우 숨을 돌리고 연필로 스케치를 해본다.
형태는 최대한 단순하게.
배 부분에 그림자를 주고 물고기가 헤엄을 치듯 살짝 허리를 휘게 그렸다.
물고기와 물고기 사이를 또 다른 물고기가 있는 것처럼 비워두며 종이를 채워나가자 그럴싸해 보인다.
이것저것 손볼 구석이 남았다.
그래도 방향을 찾았단 생각에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 * *
고훈이 아르누보 공모전에 제출할 작품으로 머리를 싸매고 있을 때, 앙리 마르소 역시 고전하고 있었다.
그가 직면한 문제는 자화상을 포기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가장 최근 발표작 <그림자>를 포함해 800여 점에 가까운 자화상을 그려온 앙리 마르소는 익명으로 참가하는 만큼 새로운 소재를 찾아야 했다.
쓰레기 청소 따위를 고민할 여유는 없었다.
떠오른 발상은 일단 스케치라도 하던 그가 손을 멈추었다.
이번 구상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앙리 마르소는 이번 작품에 두 가지 목표를 잡았다.
하나는 1,700여 점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을 그릴 것.
둘은 본인을 그리지 않는 대신 그만큼 아름다운 상징을 찾아내 그릴 것.
많은 사람이 도전하고 또한 투표로 결과가 정해지기에 화제가 되려면 우선 관람객의 기억에 선명히 각인되어야만 했다.
수백 점이 넘는 작품을 스치듯 감상할 이들이 막상 투표를 하려고 할 때 기억에 남아 있지 않으면 아무 쓸모가 없었다.
그러기 위해선 아주 짧은 시간에 강렬한 이미지를 줘야 했다.
그러나 이 또한 두 번째 조건이 해결된 이후에 고민할 사항.
앙리 마르소는 자신만큼 아름답고 완벽한 무엇인가를 찾아낼 수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도 보석도 꽃도 본인의 눈만큼 아름답진 않았다.
“후.”
며칠째 이어진 고민이 그를 한숨짓게 했다.
<총탄>이 천재적 발상과 우연으로 만들어진 작품이 아님을 알고 난 이후로 계속된 일이었다.
어린 화가를 향한 열등감에 사로잡힌 자신을 인정할 수 없었다.
완벽한 자신이 그런 저열한 마음을 품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당당히 겨루고자 마음먹었거늘 고민이 거듭될수록 초조해졌다.
불안감은 일상을 좀먹었고 점차 예민해져 수면 시간이 줄었고 짜증은 늘어만 갔다.
머릿속의 천재를 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붓을 놓을 수 없었다.
* * *
1)Revolving circles, Fibonacci, 2007, Attribution-Share Alike 3.0 Unported license.
2)고수열이 잡은 물고기는 쥐노래미다. 강원도에서는 돌삼치, 경남에서는 게르치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