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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반 고흐-161화 (116/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161화

34. 여름 너울(7)

앙리를 발견한 제롬이 애타게 그를 불렀다.

“이사님, 접니다. 잠시만, 잠시만 상의드릴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앙리가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얼굴을 낯익으나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누구야.”

“……예?”

제롬이 당황했다.

설마하니 지난 몇 년간 함께 일했던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리란 생각은 조금도 할 수 없었다.

앵테르미탕 관련한 일로 선을 그으려는 시도로 볼 수밖에 없었다.

“너 뭐냐고.”

앙리 마르소의 불쾌한 얼굴에 제롬은 다급해졌다.

“제가. 제가 다 설명하겠습니다. 제발 10분만, 아니, 5분만 이야기 좀 들어주세요.”

앙리 마르소가 팔짱을 꼈다.

제롬이 침을 삼켰다.

“앵테르미탕에 조건을 걸었던 건 사실입니다. 다만 그게 제 사익을 위한 일은 아니었어요. 협회 행사에 참여를 독려하고 기부 좀 하라는 말이 나쁜 건 아니지 않습니까.”

앙리가 눈매를 좁혔다.

어디서 봤나 싶었더니 SNBA에서 도둑질을 하던 범죄자였다.

“난 판사가 아니야. 그런 말은 법정에서 해.”

“이사님!”

제롬이 문을 붙잡고 외쳤다.

“언제부터 협회 내 사모임이 공식 행사가 됐지?”

앙리의 목소리에서는 분노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경멸뿐이었다.

“언제부터 협회인들 사이의 금전 거래가 기부처럼 되었고?”

제롬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꺼낸 변명이지만, 앙리 마르소가 이 정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으리라곤 생각지 않았다.

“절차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다른 뜻이 있었던 건 아닙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이사님과 협회를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제롬은 그가 협회 사무처장으로 있으면서 처리해 왔던 많은 일을 언급했다.

협회의 공적 서류를 처리하고, 행사를 기획, 진행하고 앙리 마르소의 개혁안이 빠르게 적용되도록 야근도 마다하지 않았다.

앙리 마르소에 관한 협회 내 불온한 소리가 나올 때는 직접 나서서 불을 끄기도 했다.

그렇게 충성해 왔거늘 작은 흠을 가졌다고 해서 내칠 순 없었다.

앙리 마르소가 피식 웃었다.

먹이를 주던 가축이 본인을 위했다고 하니 기가 찼다.

“노력했다?”

제롬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뭘 했는데.”

“예?”

“그 자리에 뭐 하러 뒀는지 모르는 것 같은데. 내 발이나 핥으라고 그 돈을 준 것 같아?”

“…….”

“아직도 모르겠어? 네 더러운 입으로 핥기에 내 구두는 너무 비싸다고.”

앙리 마르소에게 제롬 케르비엘은 날파리와 다를 바 없었다.

그가 자발적으로 한 행동들은 그를 불쾌하게 할 뿐이었다.

“먹이를 주면 밭을 갈아야지. 일은 다른 소들 시키고 더러운 혀를 대?”

모멸적인 언사에도 제롬 케르비엘이 마음을 바꿔 먹었다.

자존심 따위 중요하지 않았다.

평론가로서도 예술가로서도 무능한 자신이 미술계에서 이나마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건 협회에서의 위상 덕분이었다.

그것을 계속 쥘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감내할 수 있었다.

“잘못했습니다.”

제롬이 무릎을 꿇었다.

“정말. 정말 잘못했습니다.”

땅에 머리를 조아리며 애원했다.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한 번만 기회를 주신다면. 이번 한 번만 넘어가 주시면 탈퇴한 사람도 어떻게든 설득하겠습니다.”

제롬 케르비엘에게 남은 카드는 탈퇴한 이들이었다.

그들이 저지른 부정이 그의 주머니 속 USB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현재 밖에서 앙리 마르소를 규탄해야 한다는 여론을 조성하는 이들을 휘어잡을 수 있다면, 앙리 마르소에게도 나쁘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제롬이 고개를 들자 앙리 마르소는 이미 산책로를 따라 걸어가고 있었다.

“이사님! 여기 다 있습니다! 이사님이 찾으시는 증거 자료 다 가져왔습니다!”

마음이 급해진 제롬이 USB 저장장치를 꺼내 흔들었다.

앙리 마르소가 뒤돌아보곤 다가오자 제롬이 반색했다.

체면 따위 중요치 않았다.

그저 자신의 충심을 보이고 쓸모가 있다는 걸 보여, 자리를 지키는 것만이 우선이었다.

“확인해 보십시오.”

제롬이 철창 사이에 손을 넣어 USB를 건네려 했다. 걱정과 우려, 기대와 간절함이 뒤섞인 얼굴로 앙리를 바라보았다.

앙리 마르소가 그것을 집었다.

“라이터.”

“예?”

“라이터. 없어?”

“아, 예. 예!”

제롬 케르비엘이 황급히 주머니를 뒤져 S. T 듀퐁 라이터를 꺼냈다.

“켜.”

앙리 마르소가 흡연자가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 제롬은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그를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충심을 보이고 싶었다.

“아!”

앙리가 라이터 불 위에 USB를 올렸다.

“나는 내 세계에 쓰레기가 있는 걸 못 봐.”

미술계는 오직 그를 위해 존재했다.

벽화로부터 시작된 유구한 역사가 이어진 결과물이 앙리 마르소였고 앞으로 나아갈 미술은 앙리 마르소를 기점으로 할 터였다.

그 고결한 세상에 악취 나는 쓰레기를 남길 순 없었다.

“말해 봐.”

앙리 마르소가 비아냥댔다.

“타지 않는 쓰레기는 어떻게 버리지?”

* * *

삼척으로 오고 나흘째.

좀처럼 좋은 생각이 나지 않아서 종일 바다만 바라보고 있으니 조금 울적해졌다.

쉼 없이 너울지는 저 움직임을 표현하고 싶은데, 좀처럼 해결할 수 없어 막막하다.

마치 이 바위 절벽 같다.

배도 고프고 이만 올라가야겠다고 마음먹을 즈음엔 이미 노을이 지고 있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움직임뿐만 아니라 색도 달라진다. 짙은 푸른색이 점차 붉게 물들어가고 바위는 그림자 져 더욱 어둡다.

당연한 현상이거늘 그 모든 걸 담으려고 하니 문제다.

영상이라면 아무 문제 없을 테지만 그런 방식은 내게 의미가 없다.

캔버스 위 태양을 움직일 수 없을까.

“……아.”

굳이 그릴 필요가 없다.

야외에 전시한다면 태양이 알아서 움직여 줄 테니까.

아니지.

시간 흐름에 따라 물감 색이 조금은 달리 보일 수 있어도 저 바다처럼 극적으로 변하진 않을 것이다.

……해보자.

지금껏 모든 작품을 완벽히 알고 나서 시작한 적은 없다.

만족할 때까지 그리다 보니 어떻게 완성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남은 문제는 시시각각 넘실거리는 파도다. 저걸 움직이는 것처럼 그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버지.”

“어?”

문득 아버지가 예전에 보여주었던 신기한 그림이 떠올랐다.

“너 착시 그림 알아?”

“착시?”

차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지고 있던 태블릿을 꺼내 착시와 관련한 그림을 찾아 주었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예전에 아버지가 보여주었던 아몬드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이거야.”

화면을 키우자 아몬드 그림이 요동쳤다.

“우와.”

차시현 눈에도 그리 보이는지 신기해한다.

“이거 원리가 뭐지?”

“모르겠어.”

착시가 일어나는 이유를 검색해 보니 알 수 없는 말로 가득하다.

똑똑한 차시현도 rod cell이라든가 Lateral inhibition같은 단어에 고개를 갸웃한다.

이런 그림을 의도대로 그릴 수만 있다면 원리 따위 아무래도 좋다.

“나 배고파.”

“나도.”

할아버지께 여쭤보면 뭔가 방향을 알려주지 않으실까.

짐을 챙겨 서둘렀다.

“할아버지!”

“으헙?”

흔들의자에 앉아 주무시던 할아버지가 깜짝 놀랐다. 화장실에서 손을 씻으며 물었다.

“착시 현상 알아요?”

“착시?”

“네. 착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그리는 거요.”

“알기야 알지.”

할아버지가 길게 하품을 했다. 수건을 손을 닦고 나오니 시계를 확인하시곤 고개를 젓는다.

“자고 일어나면 먹고. 자고 일어나면 먹는구만.”

“쉴 때는 원래 그래요.”

할아버지가 목을 쓸곤 저녁은 배달시켜 먹자고 하셨다.

그런 것 따위 아무래도 좋다.

꿀렁거리는 그림을 보여드렸다.

“이런 거 어떻게 그려요?”

“글쎄. 이런 그림은 안 그려봐서. 이런 그림 그리는 사람은 드문데.”

할아버지가 수염을 쓸었다.

“착시를 활용한 화가는 많아. 짐 워런이나 빅토르 바자렐리처럼. 그런데 이렇게 꿀렁대는 그림은 생각나지 않는구나.”

아쉬운 대로 두 사람을 검색해 보니 신기한 작품이 소개된다.

짐 워런보다는 빅토르 바자렐리의 그림이 이번 작품에 좀 더 도움이 될 듯하다.

아무래도 인터넷에 나온 몇 가지 그림과 함께 스스로 분석해야겠다.

“그보다 훈아, 영상 올라온 건 봤어?”

“무슨 영상이요?”

“기암성 티저. 벌써 많이들 봤더라.”

바다 그릴 생각만 해서 깜빡했다.

다들 어떻게 봤을까, 어떤 댓글이 올라왔을까, 조회 수는 많을까 떨리는 마음으로 <기암성> 티저 영상을 검색했다.

노먼 스튜디오에서 운영하는 뉴튜브 채널에 어제 올라온 영상이 벌써 311만 번 재생되었다.

그 짧은 시간에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하나의 영상을 볼 수 있다는 게 경이롭다.

└사람이야 뭐야?

└ㅋㅋㅋㅋ미친 윗댓 개웃겨ㅋㅋㅋ 보통 조각이냐고 묻지 않낰ㅋㅋㅋ

└의도는 알겠는데 왜 시비조얔ㅋㅋㅋㅋㅋ

└왤케 잘생겼냐.

└그림이랑 진짜 똑같다. 토비 샬라메 특징을 완전 그대로임.

└고훈이 괜히 유명한 게 아니지.

└그게 아니라 고훈이 그린 콘셉트 아트에 닮은 배우를 찾은 거래.

└아서 코난 도일과 셜록 홈스가 이 영화를 싫어합니다.

└남자가 봐도 도랐다.

└아 킹받네? 내년 12월 개봉 예정인 걸 지금 올려? ㅅㅂ 그때까지 어떻게 기다리라고.

└노먼 신작이면 무조건 봐야지.

└고훈 그림 진짜 느낌 있다. 전시회에 걸리던 그림하곤 느낌이 좀 다른데, 이것저것 다 잘 그리는 듯.

└천재지. 앙리가 저거 보려고 100만 달러 투자했잖아.

└아니야. 우리 형 호구 아니야.

└응 느그형 호구~

└솔직히 호구는 아니지. 어차피 노먼 감독에 토비 샬라메 주연이면 본전 이상 보장되는데 거기에 투자하는 게 어떻게 호구임.

└???: “프랑스 문학의 부흥을 위한 투자”

└우리 오빠가 돈 좀 막 쓰겠다는데 왜 그럼? 느그 집엔 라파엘로 있음?

└ㅋㅋㅋㅋㅋ그러게. 조 단위 부자가 돈 어떻게 쓰는 걸 걱정하넼ㅋㅋ

└응 호구야~

“…….”

이런저런 이야기가 많은데 유독 앙리 마르소를 놀리는 댓글이 많아서 조금 재밌다.

좋아요를 눌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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