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160화
34. 여름 너울(6)
아침을 먹고 소화할 겸 할아버지, 차시현과 함께 별장 주변을 산책했다.
길을 따라 조금 걸으니 황영조 기념공원이란 장소가 나왔다.
공원을 끼고 좀 더 내려가자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인다.
초곡항이라는 항구다.
항구답게 작게나마 마을이 있고 슈퍼마켓이나 횟집 같은 상가도 몇몇 줄지어 있다.
사람이 정말 없다.
여름이라 바닷가 주변으로 많이 올 줄 알았는데, 해변이 아니다 보니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요 앞에 산책로가 있는데 처음 만들어졌을 땐 사람이 제법 오곤 했었지.”
벌써 10년 전 일이라고 덧붙이셨다.
초곡용굴 촛대바위길이라고 적힌 입구는 이곳저곳에 칠이 벗겨져 쓸쓸해 보였다.
“예쁘다.”
차시현이 앞으로 쪼르르 달려가 난간에 기대어 바다를 향했다.
더위를 뚫고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제법 시원하다.
너울진 바다를 보며 해안 절벽을 따라 이어진 산책로를 걸으니 근심을 내려놓게 된다.
바다로 향한 바위 위로 전망대도 있다. 높은 곳에서는 또 어떤 시야를 느낄 수 있을지 궁금하다.
역시나 해방감이 밀려든다.
시야를 가리는 것 하나 없이 펼쳐진 광경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얕은 파도가 일렁이고 바위에 부서지고 다시 파문을 일으키는 가까운 곳이나, 저 멀리 평온해 보이는 수평선까지 참 신비하다.
꼭 캔버스에 담고 싶다.
얼마 걷지 않아서 절벽과 절벽을 잇는 다리가 나왔다.
차시현과 동시에 걸음을 멈췄다.
“왜?”
“가면 안 돼요.”
차시현이 고개를 끄덕여 동조했다.
다리가 흔들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중앙은 유리로 되어 있어서 아래가 훤히 보인다.
저런 곳을 지나갔다간 틀림없이 사고가 날 것이다.
“겁나는구나?”
“네.”
할아버지가 또 내 승부욕을 자극하시려고 했지만, 그림이 아닌 일에 무모한 도전 따위 하고 싶지 않다.
냉큼 대답하니 껄껄 웃으셨다.
“그럼 돌아갈까?”
밥도 먹고 산책도 했겠다 에어컨 바람을 쐬며 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바다는 점심 먹고 나와서 그리기로 마음먹고 발길을 돌렸다.
* * *
끊임없이 이어지는 파도를 보며 붓을 놀렸다.
지금으로서는 딱히 목표가 없고 그저 바다를 담고 싶다. 무수히 많은 파란색과 녹색 그리고 흰색을 만들고 바르며 넘실대는 파도를 그렸다.
머리를 비우고 해방감과 고요함을 느낄 뿐인 행위가 아무 의미 없어 보일지 몰라도 가슴 속에서 차오르는 무엇인가를 느낀다.
부서지고 또 부서져도 다시금 다가오는 파도 소리.
한 번 한 번의 물결이 비록 아무런 의미를 남기지 못하더라도 분명 바위에 닿는다.
이 절벽도 아주 먼 옛날부터 저 작은 파도에 의해 만들어졌으리라.
부서지더라도 바위를 향한 바다의 마음이 줄곧 이어진 덕이다.
붓을 멈췄다.
한 번의 손놀림으로 작은 물결을 그리고 무수히 많은 붓칠로 그림을 완성하는 마음이 바다와 닮았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아도 그리길 반복하는 행위는 바위에 부딪히고 또 부딪히는 파도와 닮았다.
파도는 그저 현상일 뿐이고 바다와 이 절벽만이 실재한다.
그럼에도 이 해안을 완성한 건 파도다.
나는 닿고 있을까.
너울지고 있을까.
이 바위 절벽처럼 견고한 저들의 마음에 조금씩 다가가고 있을까.
오늘은 여기까지 그려야겠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캔버스와 이젤, 화구 가방을 챙겨 전망대로 향했다.
어제부터 이어온 고민은 아직 길을 찾지 못했다. 덕분에 그림은 그저 풍경만을 담고 있다.
“…….”
그림을 그릴 때 가장 어려운 일은 나를 찾는 과정이다.
지금껏 누구도 활용하지 않은 새로운 기법, 독특한 구도를 찾는 행위 등은 모두 나를 확실히 한 뒤에 자연스레 찾아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저 파도를 알고 싶다.
추울썩- 추울썩-
나를 닮은 저 바다를 캔버스 위에 담고 싶다.
이 멋진 풍경을 완벽히 복사하는 것도 방법이다. 그림을 보는 사람마다 느끼는 바는 다를 테니, 그대로 보여주는 일이 결코 나쁘진 않을 거다.
그러나 저 파도에서 느낀 아련함과 연민을 그리고 싶은 거다.
그래.
저 바다의 움직임에 마음이 흔들리는 나를 표현하고 싶다.
그것을 누군가 알아봐 주었을 때의 희열을 다시금 느끼고 싶다.
아마 아르누보 공모전에 참가하는 모든 이가 마찬가지 아닐까.
관람객이 나와 조금이라도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혹은 그러지 않더라도 한 번쯤 생각하게 해보는 그런 경험.
그러니 어렵다.
“후.”
생각을 많이 했더니 배고프다.
점심에는 무얼 먹을까 기대하며 고개를 돌리니 차시현이 파란 오일 파스텔로 바다를 칠하고 있다.
입을 앙다물고 눈빛을 빛내는 모습이 사뭇 진지하다.
집중하고 있어서 방해하지 않으려고 지켜보고 있자니 바다와 하늘의 경계를 검은색 오일 파스텔로 선을 그었다.
도구를 사용하는 방법은 최대한 자세히 알려줬지만, 그림 그리는 방식은 혹시라도 강요하게 될까 봐 말을 줄이려고 한다.
내게 익숙하지 않은 일이라고 해서 경계를 검은 선으로 표현하는 일이 나쁘다고만 할 수도 없다.
저런 선이 실제로는 없다는 것 정도는 차시현도 잘 알고 있을 테고.
또 실제로 없는 것 또한 얼마든지 그리는 사람이 화가다.
차시현이 고개를 돌렸다.
자기 그림을 보고 있었단 걸 보곤 다급히 가린다.
“안 돼. 아직 다 안 그렸단 말이야.”
“밥 먹으러 가자. 배고프다.”
실실 웃으며 올라가자고 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캔버스와 이젤, 화구 가방을 챙겨 별장으로 걸어가던 중 차시현이 공감 가는 말을 했다.
“바다는 그리기 어려워.”
상당히 어렵다.
전혀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왜?”
“가만있지 않잖아.”
일리 있는 말이다. 출렁이는 해수면이 순간을 포착하도록 내버려 둘 리 없다.
“맞아. 그래서 바다를 그린 그림은 그림 속에만 있어. 다신 그 장면을 못 볼걸?”
“그럼 제일 멋진 걸 찍어서 그려야겠다.”
아직 배울 게 많은 차시현에게는 사진을 보고 그리는 것도 기술을 익히기에 필요한 과정이다.
그나저나 큰일인데.
어제부터 오늘 오전 내내 바다를 그렸지만 어떤 너울을 담았는지 모른다.
바다와 파도, 절벽에 대해 고민하면서 그때그때 시야에 들어오는 것을 그렸으니 마음에 들 리 없다.
너울을 표현하기 위해 예전처럼 물감을 듬뿍 발라서,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덧칠하려면 제출 기한에 못 맞출 듯하다.
이 캔버스는 못 쓰겠다.
예전에는 이조차 낭비라고 생각했는데, 사치스러워졌다.
“넌 얼마나 그렸어?”
차시현이 궁금해하길래 캔버스를 보여주었다.
“하나도 못 그렸어.”
“왜? 다 그린 거 아니야?”
“이건 낙서.”
내 것과 제 것을 번갈아 보더니 입을 쭉 내민다.
귀여운 녀석.
“공모전에 낼 만한 그림이 아니라서 그래.”
진도가 더뎌도 끝끝내 포기하지 않으면 이미지가 언젠가 반드시 찾아올 거다.
그 기쁨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캔버스 앞에 앉으리라.
몇 번이고 며칠이고.
* * *
제롬 케르비엘이 라이터를 열었다가 닫기를 반복했다.
평론가이자 동시에 예술가로 활동하던 제롬은 오랜 경력과 넓은 인간관계를 인정받아 협회 사무처장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협회 내 행정 제반은 그를 통해 이사회에 전달되었으며, 신뢰를 얻고 있었기에 그가 넘긴 사안은 대부분은 큰 문제 없이 통과되었다.
변변치 못한 평론가에 인기 없는 예술가였던 그에게 SNBA 사무처장이란 명함은 그를 지탱하는 유일한 자랑거리였다.
그것을 앙리 마르소가 앗아간 것이었다.
딸칵- 딸칵-
제롬은 화가로서도 조각가로서도 사업가로서도 심지어 외모까지 모든 걸 가진 그를 한때 동경하기도 했었다.
10살이나 어린 그가 작품을 내놓을 때마다 재능과 환경의 차이를 절감했고 애써 그것을 의식하지 않으려 했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시기심을 내비치는 대신, 누구보다도 먼저 나서서 그를 찬양하여 대범한 모습을 주변에 보였다.
필요하다면 그에게 아양도 부렸다.
딸칵- 딸칵-
어차피 본인과는 다른 인간이니까.
협회를 번영케 해주는 그를 적당히 모시며 아주 작은 이득만 취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앵테르미탕 제도가 간절한 이들이 보이는 작은 성의로 만족했다.
본인이 앙리 마르소에게 하는 행동보다 조금만 더 비굴해 보이면 그걸로 되었다.
자신을 벌레 보듯 하는 앙리 마르소보다 조금 더 경멸스러운 표정으로 그들을 대하면 마음이 조금 편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망가지고 말았다.
경찰에서 날아온 출석 요구.
고발장이 접수되었으니 조사를 받으러 오라는 내용이었다.
탁-
이대로 모든 것을 잃을 순 없었다.
제롬 케르비엘이 일어섰다.
서둘러 차에 오른 그는 세나르 숲에 자리한 마르소 가문의 대저택으로 향했다.
‘그래. 좋게 이야기하면 될 거야.’
3,000명이 넘는 협회인이 앙리 마르소를 규탄하고 나설 때조차 그를 옹호한 자신이었다.
잘못을 시인하고 빌면 그간의 충성을 봐서라도 분명 이해해 줄 거라 믿었다.
제롬이 앙리의 비서 아르센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케르비엘 씨.
“오, 아르센 씨. 잘 지내시죠?”
-용건 말씀해 주시죠.
“하하. 그…… 마르소 이사님을 뵙고 싶은데, 지금 어디 계신지.”
-원하신다면 한 달 후로 약속 잡아드리겠습니다.
제롬 케르비엘이 인상을 썼다.
“급한 일이라서 그래요. 혹시 이사님께 확인이라도.”
-죄송합니다만 그렇게 할 순 없습니다. 9월 17일 오전 10시 30분부터 11시까지 가능하십니다. 이때로 약속 잡을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통화를 마친 제롬이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본래 약속 잡기 어려운 사람이라고는 하나, 이렇게까지 나오는 건 앙리 마르소가 따로 지시했을 것이 분명했다.
파리 쎄브흐 거리(Rue de Sèvres)에 위치한 협회 본부에서 앙리 마르소의 저택까지 약 50분이 소요되는 거리를 40분 만에 주파한 제롬이 차에서 다급히 내렸다.
“이사님! 이사님!”
그는 무작정 저택 문을 두드렸다.
입구에서 건물까지 목소리가 전달될 리 없는 걸 알면서도 그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한편.
CCTV를 통해 저택 입구에서 난동을 피우는 남자를 발견한 저택 관리인이 아르센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아르센은 제롬 케르비엘이 방문했음을 확인하곤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할까요?”
“제가 처리하죠.”
아르센이 제롬을 정중히 돌려보내려고 마음먹은 찰나, 부지를 산책하던 앙리 마르소가 입구로 다가가는 모습이 CCTV 화면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