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159화
34. 여름 너울(5)
이튿날.
“오.”
“뭐야?”
“모르겠어. 딱정벌레 같은데.”
“왜 잡아. 잡지 마아. 위험할지도 모르잖아.”
“괜찮아.”
“……먹을 거야?”
“……안 먹어. 봐. 얼마나 멋진데.”
“아, 싫어! 징그러워!”
고수열이 두 아이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곤충을 잡겠다고 하길래 시내 문방구에서 채집통과 잠자리채를 구해다 주었더니 오전 내내 쉬지 않고 돌아다녔다.
씌어준 밀짚모자가 큰지 자꾸만 흘러내렸다.
부우웅- 부우웅-
선캡을 꺼내오려던 차 고수열의 핸드폰이 울렸다.
오랜 친구 마틴 얀센에게서 온 전화라 반갑게 받았다.
“마틴.”
-기껏 한국까지 왔더니만 어딜 그리 바삐 갔어?
“하하. 훈이랑 휴가 좀 즐기고 있지. 자네도 손자 데리고 여행 다녀봐. 다른 생각 못 할걸?”
-게임만 하는 녀석 뭐가 귀엽다고 여행까지 시켜줘?
고수열이 껄껄 웃었다.
-다름이 아니라 훈이한테 부탁할 게 좀 있는데.
“부탁?”
-음. 반 고흐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지 않나. 마지막 작품 발견하는 과정에 훈이 인터뷰가 좀 필요해서 말이야.
“그야 어렵지 않지만. 물어보게. 훈아.”
“네?”
“잠깐 이리 와볼래? 마틴 할아버지가 부탁하고 싶은 게 있으시대.”
고수열의 부름에 고훈이 쪼르르 달려와 전화기를 건네 받았다.
“마틴?”
-오, 그래. 여행은 재밌고?
“방금 멋진 딱정벌레를 잡았어요.”
-……딱정벌레?
“네. 이름이 뭔지 찾아보려고요.”
마틴은 고훈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순 없었지만 목소리가 상기되어 있어 즐거워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흐흐. 그래. 꼭 찾아서 알려주렴.
“그럴게요. 무슨 일이에요?”
고수열이 고훈이 쓰고 있는 밀짚모자를 벗겼다.
-빈센트 반 고흐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거든.
“어…….”
-왜?
“아니에요. 계속하세요.”
-네 인터뷰를 넣을까 싶어서 말이지. 반 고흐에 대한 생각이라든가, 마지막 작품 그렸던 장소 발견했을 때 일이라든가.
고훈이 생각에 잠겼다.
어렵지 않은 일이었으나 최근 몇 차례 미디어에 노출되면서 창피를 당했던 일이 떠올랐다.
-해줄 수 있겠니?
“그럼요. 그런데 무슨 내용이에요?”
-일대기를 그리는 거지. 자세한 위인전이라고 생각하면 돼. 어렸을 때 곤충 도감을 만들었다든지, 어머니의 영향으로 그림을 좋아했다든지.
고훈이 안심했다.
그런 내용이라면 딱히 부끄러울 일은 없을 듯했다.
-뭐, 너한테는 너무 이른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사랑 이야기도 있을 테고. 하하하!
“안 돼요.”
고훈이 단호히 말했다.
* * *
[완전히 새로워진 SNBA 공모전]
11일. 프랑스 국립 예술 협회(이하 SNBA)가 올해부터 변경된 사항을 공개하였다.
상위 입상자에게 프랑스 국립 예술 살롱전 특별 전시회 자격이 주어지는 SNBA 공모전은 아르누보 공모전으로 이름을 변경했다.
아르누보는 1890~1910년 사이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미술 양식이다.
SNBA 협회장 셰바송 씨몽(67)은 미술계가 또 다른 변혁을 맞이하길 기다린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명칭을 변경했을 뿐만 아니라, SNBA는 기존 심사 방식을 벗어나 모든 관람객이 각각의 심사위원이 되어 마음에 드는 미술품을 선정한다고 덧붙였다.
참가작은 11월 30일부터 12월 6일까지 파리 루브르구와 오텔드빌구를 중심으로 전시되어,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심사대에 오른다.
관람객은 현장과 가상 전시장을 통해 작품을 감상할 수 있으며, 최대 열 작품에 투표할 수 있다.
이렇게 표를 받은 작품 중 상위 열 작품은 프랑스 국립 예술 살롱전 특별 전시회에 전시될 기회가 제공된다.
이례적으로 부문을 나누지 않았다.
SNBA는 아르누보 공모전이 장르와 규격 주제 모든 것에 구애받지 않는 완전히 자유로운 대회를 지향한다고 설명한다.
아르누보 공모전의 총상금은 250만 유로로 모든 미술 공모전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우승자는 100만 유로를 차지하고 상위 10명까지 상금이 지급된다.
SNBA가 발표한 아르누보 공모전에 전 세계 예술인이 주목했다.
우승자에게 주어지는 100만 유로와 프랑스 국립 예술 살롱전 특별 전시회까지 예술가라면 누구나 욕심낼 공모전이었다.
휘트니 비엔날레 특집 프로그램으로 편성되었다가 큰 인기에 힘입어 예술 전반을 다루게 된 ‘대화를 나눠요’에서도 아르누보 공모전을 다뤘다.
-안녕하십니까, 시청자 여러분. 대화를 나눠요 진행을 맡은 우진입니다.
사회자 우진이 인사했다.
-어제였죠. 프랑스 국립 예술 협회가 아르누보 공모전 진행방식과 요강을 확정하여 화제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큐레이터 마이클 핑을 모시고 이야기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이클.
-안녕하세요.
휘트니 비엔날레 기획에 참여했던 큐레이터 마이클 핑이 진지한 태도로 방송에 임했다.
-우선 대회 규모가 인상적입니다. 총상금 250만 유로. 이걸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일반적인 공모전 상금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죠. 우승 상금 100만 유로는 정말 가능할까 싶은 수준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보통 이런 경우 상금이 작품 매입비라고 하던데. 아르누보 공모전은 어떤가요?
-알고 계신 대로 작품 매입비입니다.
-상금이 작품 매입비로 상정되는 이유가 따로 있을까요?
-윈윈이죠. 작가는 작품을 확정해서 팔 수 있고 주최 측에서는 가치 있는 작품을 전시할 수 있으니까요.
마이클 핑이 어깨를 으쓱였다.
-국제 공모전이라고 해도 어디까지나 프랑스 국립 예술 협회 예산으로 진행하는 행사다 보니 그들로서도 이윤이 발생해야 합니다. 또 다른 공모전과 달리 작품 매입비를 매우 높이 상정하여 큰 문제는 없을 듯합니다.
-그렇군요.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확실히 금액이 큰데, 참가를 확정한 고훈 작가 같은 경우를 예를 들어 걱정하시는 분도 계실 것 같습니다.
-고훈 작가는 정말 예외의 경우죠. 살아 있는 작가 중에 수백만 달러에서 수천만 달러 사이로 작품을 판매하는 작가는 정말 몇 없습니다. 소수 작가를 상정하고 상금을 올릴 수도 없었을 테니, 그 부분은 아르누보 공모전의 상금이 부족하다기보다는 고훈 작가의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진이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
-고훈 작가 이야기가 나와서 계속 질문드리면, 굳이 참가하려는 의도가 무엇일까요? 쉽게 생각하면 이미 충분한 수익과 평판을 쌓은 그가 굳이 공모전에 참가할 필요가 있을까요?
-글쎄요. 고훈 작가에게 직접 물어봐야 알 것 같네요. 추측하기로는 지금 고훈 작가에게 부족한 것은 사실상 없습니다. 기반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는데, 그조차 휘트니 비엔날레를 통해 입지를 확실히 다졌죠. 좋은 취지로 시작한 공모전이니 경험 삼아 참가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다른 경우는 어떻습니까? 유명한 작가들도 공모전에 참가하곤 하나요?
-아르누보 공모전처럼 큰 행사에는 당연히 그렇죠.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앙리 마르소나 장미래 같은 경우도요?
-그들은 논외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이미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지 않을까요?
-하하.
-도리어 부담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상을 받지 못하는 경우, 평판이 떨어질 테고 수상한다고 해도 여러 말이 나올 테니까요.
정점에 이른 예술가들이 다른 작가의 기회를 박탈하는 것 아니냐, 명성이 심사에 영향을 준 것 아니냐 등의 항의가 예상되었다.
마이클 핑은 앙리 마르소와 장미래 같은 인물이 그런 부담을 굳이 짊어질 이유가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면 논란이 되는 심사방식으로 화제를 넘어가 보도록 하죠. 오직 관람객 투표로 이뤄진다고요.
-네. 티켓을 구입한 사람만 인증해서 마음에 드는 작품을 최대 열 점까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가상 전시회를 포함해서요.
-그렇습니다.
-음악계에서 검증되었던 방식을 벤치마킹한 거로 보입니다만, 평단과 예술인 사이에서 반대하는 목소리가 상당하다고 들었습니다.
-네. 크게 세 가지 근거를 들고 있죠. 하나는 전문성이 필요하다는 말이고 둘은 첫 번째 이유와도 어느 정도 연관이 있는데, 자칫 인기투표가 될 수 있다는 우려죠.
-확실히 그런 문제가 발생할 수 있겠네요.
-네. 그뿐만 아니라 투표에 조작이 있을 수 있다는 점도 문제가 되었지만, 티켓을 인증해야 투표할 수 있는 과정으로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럼 마지막 근거는?
-그런 절차가 충분한 논의 없이 앙리 마르소의 독단으로 진행되었단 말이죠.
마이클 핑이 프랑스 예술계에 일어난 논란에서 앙리 마르소가 자유로울 수 없다는 설명을 이어갔다.
“꺼.”
앙리 마르소가 신경질적으로 입을 열었다.
TV 전원이 꺼지는 소리와 함께 화면이 투명해졌다.
건너편에서 책을 읽고 있는 미셸 플라티니가 고개를 돌렸다.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앙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빌어먹을.”
미셸은 그의 불평을 이해했다.
프랑스는 물론이고 전 세계 미술계가 아르누보 공모전에 관련해서 한마디씩 해대니 신경 쓰이지 않을 리 없었다.
특히나 예민한 사람이라 더더욱 그러할 듯했다.
책을 덮고 그를 조금이나마 위로하고자 다가갔다.
“일이라며. 하나는 또 뭔데.”
미셸이 고개를 갸웃했다.
‘일’이라든지 ‘하나’ 같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꺼내기에 가까이 가 보니 한글로 적힌 책을 보고 있었다.
앙리가 미셸에게 말했다.
“한국놈들은 숫자를 대체 어떻게 읽는 거야? 1일이면 됐지 왜 하루라고 하는데?”
“……이거 때문에 그런 거였어?”
“그럼?”
TV 내용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듯해서 다행이었다.
“우리가 숫자 세는 거로 뭐라 할 건 아닌 것 같은데.”1)
“뭐가.”
미셸이 어깨를 으쓱이자 앙리가 고개를 저으며 다시 한글 교재를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한글은 왜?”
“…….”
“설마 진짜 훈이 방송 보려고?”
“…….”
“어머. 세상에. 정말?”
“아니야.”
앙리 마르소가 애써 미셸을 무시하고 교재를 살폈다.
숫자 1을 ‘일’과 ‘하나’로 읽는 건 그렇다고 쳐도.
일 명 대신 한 명이라고 하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하나 명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페넬로페야?”2)
“시끄러워! 아니라고 했지!”
앙리 마르소가 버럭 소리치자 미셸이 쿡쿡 웃으며 침실을 벗어났다.
* * *
1)프랑스에서는 1부터 16까지는 각각 독립된 명사로 불리며, 17(dix-sept)은 10(dix)+7(sept)로 부른다.
18과 19에서는 10(dix)을 [diz]로 발음하나 17(dix-sept)을 발음할 때는 [s]를 탈락시키고 [di]로 발음한다.
그러다가 70은 60+10으로 부른다.
80(quatre-vingts)은 20(vingts)×4(quatre)으로 부르고 90(quatre-vingt-dix)은 20(vingts)×4(quatre)+10(dix)로 센다.
중세 20진법을 근거로 사용되다가 10진법이 도입되었지만, 생활 곳곳에 남은 20진법 때문에 발생한 일이라고 한다.
20진법을 사용하던 흔적은 지금도 일상에 남아 있어서, 프랑스의 시험은 20점 만점인 경우가 많다.
2)Pénélope(프): 그리스 신화의 페넬로페. 율리시스의 아내로 20년간 정절을 지켰다.
차이가 있으나 초월 번역으로 “열녀 났네, 열녀 났어”로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