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158화
34. 여름 너울(4)
맛있다.
진하게 우린 고기 육수가 어떻게 기름기 하나 없이 깔끔하게 넘어가는지 모를 일이다.
이번에는 김가루와 양념장을 풀어내 잘 섞었다.
맵진 않을까.
용기 내 한입 가득 먹으니 사람들이 왜 이 음식을 좋아하는지 알 것 같다.
이 한 그릇에 매콤한 맛과 단맛, 짠맛, 신맛이 모두 담겨 있다.
보통은 기본 맛이 있고 다른 맛은 그것을 부각하는 역할을 맡는데, 이 음식은 개성 강한 맛들이 모두 제 위치에 원래 있어야 하는 것처럼 완벽히 어울린다.
그러면서도 조화로우니 신기한 일이다.
마치 조르주 쇠라가 <그랑드자트섬의 일요일 오후>에서 보여준 점묘화 기법처럼.1)
개성을 가진 여러 맛이 촘촘히 얽히어 또 다른 맛을 창조한다.
기름을 걷어낸 고기 육수의 깊은 감칠맛과 적절히 간을 맞춘 짠맛, 양념장을 이룬 매콤한 맛과 신맛 그리고 멈출 수 없는 단맛까지.
이렇게 단순한 맛들이 개성을 유지하면서도 대비를 이루어 또 다른 맛으로 느껴지는 게 참으로 놀랍다.
식감 또한 훌륭하다.
냉면은 질겨서 씹기 힘든 면이 있었는데 막국수는 숭덩숭덩 씹힌다.
맛있는 맛들이 직설적으로 꽂히고 면 또한 거부감이 없으니 먹기에 아주 편하다.
이 물막국수라면 두 그릇은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부담 없이 먹을 수 있어서 국수 앞에 막이라는 단어를 붙였나 싶다.
“먹을 만해?”
할아버지가 물으셨다.
“네. 맛있어요. 쇠라의 그림 같아요.”
말을 마치니 할아버지와 차시현이 나를 빤히 바라본다.
“왜요?”
“쇠라?”
“쇠라가 뭐야?”
“조르주 쇠라.”
차시현은 모를 수 있지만 할아버지는 모를 리가 없으신데 되묻는 게 이상하다.
“단맛 짠맛 신맛 감칠맛 매운맛이 다 느껴지면서 되게 다채롭게 느껴지잖아요. 점묘법 같지 않아요?”
할아버지가 눈썹을 모으셨다.
전달이 잘 안 된 것 같아서 한 번 더 설명하려고 하니 차시현이 열무김치를 들이밀었다.
아삭하고 시원하니 이 또한 맛있다.
“맛있어요.”
차시현이 할아버지를 보며 말했다.
마음에 드는 모양.
체면치레 하나 없이 갖은양념을 다했으니 맛있을 수밖에 없다.
아주 멋들어진 음식이다.
또 생각 날 듯하다.
“만두도 먹어 봐.”
“네.”
꿩만두는 내가 알던 만두와 달리 살짝 거무튀튀하다.
면 색과 같은 걸 보아 아마 메밀이란 것을 사용한 것 같다.
한입에 넣고 싶지만 만두가 너무 커서 반만 베어 물었다.
“합.”
만두피가 벗겨지면서 육즙이 흥건히 흘러내린다. 농밀한 만두소가 순식간에 입을 가득 채운다.
물막국수가 지나가 서늘해진 입과 배가 온기를 품은 만두를 만나 당황한다.
좋아.
꿩고기 맛은 잘 느낄 수 없는 점은 기대했던 바와 다르지만 따뜻하게 번지는 온기와 육향, 부추 냄새가 퍽 만족스럽다.
이 더운 날에 먹는 따뜻한 만두가 이렇게 맛있다니.
이 또한 시원한 물막국수 덕분이리라.
“잘 먹었습니다!”
“잘 먹었습니다.”
차를 타고 나서서 5분 정도 흘렀을까. 할아버지가 금방 차를 세웠다.
한섬이라는 곳이다.
차를 세워두고 아래로 내려가자 조용한 해변이 시야에 들어왔다.
여름이고 해수욕장이라 사람이 많을 줄 알았는데 조용하니 운치가 느껴진다.
차시현이 쪼르르 달려 나갔다.
“사람이 없네요?”
“보통은 이 위에 망상이나 강릉 쪽으로 많이 가지. 할아버지는 이렇게 조용한 곳이 좋더구나.”
같은 생각이다.
뜨겁게 내리쬐는 햇살이 잔잔한 파도와 모래알을 비추어 눈부시다.
할아버지가 선크림을 짜주셨다.
로션을 바르는 것처럼 얼굴에 대고 문질렀다.
“목에도 잘 바르고. 시현이도 바르라고 해.”
“네.”
목과 팔에도 꼼꼼히 바르곤 차시현에게 다가갔다.
“선크림 발라.”
“응. 힛히.”
내 얼굴을 보곤 웃는다.
“왜?”
차시현이 스마트폰을 꺼내 내 얼굴을 비췄다. 얼굴은 그렇다 쳐도 눈썹이랑 입술까지 하얗다.
어떻게 바르는지 보니 볼과 이마, 코에 조금씩 찍어서 펴 바른다.
“할아버지, 여기서 놀아도 돼요?”
“그래. 멀리 나가면 안 된다?”
허락을 받은 차시현이 두 손을 번쩍 들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바다에 들어가긴 찝찝해서 파도가 잔잔히 이는 바다를 보고 있으니 가슴이 간질거린다.
“들어와!”
“젖는 거 싫어.”
“엄청 시원해!”
“난 더워도 괜찮아.”
“아하하항하하!”
“야!”
바닷물에 몸을 흠뻑 적신 차시현이 달려들려고 해서 도망치니 웃으면서 따라온다.
두 시간 후.
삼척 별장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씻고 나오니 방태호가 보낸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크리스틴 노먼이 <기암성>의 홍보 영상을 보내온 모양이다.
티저 용도로 사용한다고 하는데 뜻을 몰라 찾아보니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한 홍보 방법이라고 한다.
“할아버지.”
링크를 누르고 할아버지와 차시현을 찾았다.
“노먼이 홍보 영상을 보내줬어요.”
“어서 보자.”
TV와 연결해서 영상을 틀었다.
내가 그린 아르센 뤼팽의 설정화가 기준선부터 스케치, 채색까지 빠르게 넘어가다가 놀랍도록 똑같은 남자가 등장해 탑햇(Top hat)을 들어 올리며 씩 웃었다.
그림이 완성되는 과정을 보여주다가 똑같이 생긴 사람이 등장하는 연출이 인상적이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여유로운 미소가 정말 아르센 뤼팽이 살아 있는 듯하다.
크리스틴 노먼이 배우를 정말 잘 구했다.
“토비 샬라메다.”2)
“알아?”
“엄청 유명해.”
차시현이 토비 샬라메란 배우가 주연으로 나선 영화를 읊었지만 전부 들어본 적 없다.
어떤 배우인지 모르지만 노먼 감독이 결정했으니 믿을 수 있다.
또 나와 그녀가 생각했던 외모와 분위기와 놀랍도록 어울리기도 하고.
할아버지가 영상을 마지막으로 돌리셨다.
노먼 프로덕션이 제공했다는 문구와 함께 내가 참여했다고 명시되어 있다.
“잘 나왔구나.”
할아버지도 마음에 드셨는지 흐뭇하게 웃으신다.
“영화가 잘돼야죠.”
아무리 잘 만들어도 모든 작품이 잘 팔리는 건 아니다.
“잘될 거야.”
차시현이 테이블을 짚으며 말했다.
“이어 원도 엄청 잘되고 있잖아.”
올해 개봉한 크리스틴 노먼 감독의 영화 <블랙 나이트: 이어 원> 이야기다.3)
나도 노먼이 어떤 영화를 만드는지 궁금했던 터라 할아버지와 함께 봤는데, 범죄자에게 부모를 여읜 인물이 영웅으로 성장해 나가는 과정을 놀랍도록 정교하면서도 힘있게 보여주었다.
<기암성>은 또 어떻게 완성할지 기대된다.
“이거 언제 올라온대?”
“모레.”
“빨리 보고 싶다.”
“촬영이 조금 앞당겨져서 내년에는 볼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게나 빨리?”
“내년 11월이나 12월?”
“하나도 안 빨라.”
* * *
잠들기 전 침대에 누워 김지우가 알려준 구스타프 클림트란 화가를 찾았다.
백과사전은 그를 아르누보(Art Nouveau: 새로운 미술)를 대표하는 화가라고 설명했다.
새로운 미술이라는 단어에 가슴이 설렌다.
김지우가 열심히 모은 돈을 기꺼이 그의 그림을 보는 데 쓴다고 할 정도니 당장이라도 인터넷에서 그림을 찾아보고 싶지만.
김지우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는 눈으로 직접 봐야 한다며, 그러기 전까지는 그에 관해 조금 알아보라고 했다.
그래봤자 구스타프 클림트를 검색하면 곧장 그의 대표작 <키스>와 <유디트>가 이미지로 나오지만 애써 무시했다.
방학 동안 이곳에서 공모전을 준비하고, 11월이 되면 유럽으로 갈 테니 그때 즐길 생각이다.
“…….”
무엇을 제출할지 모르겠다.
그리고 싶은 것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서 매일 한 점씩 그리고 있지만 공모전에 제출할 만한 작품은 그리지 못했다.
오일 파스텔과 먹을 사용하는 방법을 익히는 일이 너무 즐거워서 작품 구상보다는 기술을 쌓는 데 한눈을 판 탓이다.
프랑스 국립 예술 살롱전은 내게도 의미가 있는 전시회다.
내가 존경했던 이들이 힘을 모아 만든 행사를 그들의 뜻을 이어받은 사람들이 후대에 부흥시켰다.
지금까지 여러 일로 관심을 받아 승승장구하던 내게는 현재 내 위치를 객관적으로 확인할 기회이기도 하다.
허투루 임할 수 없다.
태블릿에 스케치하다가 지우기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밤이 깊었다.
별장 근처 풀밭에서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오고 창밖으로 반쯤 얼굴을 비친 달이 보인다.
잠도 오지 않고 그 잔잔한 분위기에 이끌려 할아버지와 차시현이 깨지 않도록 조용히 밖으로 나섰다.
낮과 달리 새벽 공기는 제법 선선하다.
서울과 달리 하늘 위에 촘촘히 빛나는 별과 풀 내음, 아스라이 들리는 귀뚜라미 우는 소리.
추울썩- 추울썩-
바위에 사뿐히 닿는 파도에 마음이 차분해진다.
당장 3일 전에 할아버지 전시회가 크게 성공하고 한 달 전만 하더라도 페르디난도 곤잘레스와 관련한 일로 시끄럽던 것이 마치 먼 과거의 일처럼 느껴진다.
‘좋다.’
아버지, 어머니도 함께 왔으면 좋았을 텐데.
자존심 따위 내려놓고 할아버지와 솔직하게 이야기 나눴으면 서로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내게 또래 친구가 없다고 걱정하시던 어머니께서 시현이를 보시면 정말 기뻐하셨을 텐데.
이렇게 조용한 날이면 아버지는 분명 귀신 분장을 하고 놀래려다가 나와 어머니께 되레 혼쭐이 났을 텐데.
보고 싶다.
지금이 너무 행복해서.
할아버지와 함께하는 시간이 너무나 즐겁고 행복해서 그럴수록 어머니, 아버지가 그립다.
추울썩- 추울썩-
바다가 너울진다.
그렁그렁 너울진다.
* * *
1)그랑드자트섬의 일요일 오후, 조르주 쇠라, 1884, 캔버스에 점묘화.
신인상주의를 이끈 조르주 쇠라의 대표작. 가로 308㎝ 세로 207㎝의 대작으로 완성하기까지 약 2년이 걸렸다.
팔레트에서 색을 만들어 칠하던 기존 방식을 벗어나서, 원색 점을 병치하고 무수히 찍어내 색채감을 표현했다.
초록색으로 보이는 나뭇잎은 가까이에서 보면 노란색 점과 파란색 점을 촘촘히 찍어 만든 색이다.
산업과 과학이 발달하던 시기, 광학적 색채 이론을 접한 조르주 쇠라는 색이 우리 눈이 인식되는 방식을 깊이 이해하고 그것을 캔버스 위에 적용했다.
2)모티프 인물은 1995년생 배우 티모시 샬라메(Timothée Chalamet).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주연.
3)모티프 작품은 프랭크 밀러의 <배트맨 이어 원>, 1987년 작.
배트맨이 자경단 활동을 시작한 처음 1년을 그린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