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153화
33. 해송(9)
<사랑7>이 마르소 미술관에 전시되는 일만은 막아야 한다.
라파엘로, 모네, 피카소, 할아버지 등등 그 걸작품 사이에 내가 얼굴에 짜장면을 묻히고 있는 그림을 놓을 순 없다.
“훈아, 받은 게 있으면 베풀 줄도 알아야 해.”
“저 사람한테는 안 그래도 돼요.”
“할아버지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네가 말하지 않았니.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가만 고민해 보니 서로 자극이 될 수 있을 것 같더구나.”
그제 할아버지께 내 입으로 직접 말씀드린 말이다.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알고 보면 좋은 구석도 있다고.
특별 전시회는 거절했지만 그간 내 그림을 사 주고 그것을 휘트니 비엔날레에 전시해 준 사람이니 그 친절에 보답하는 일 또한 사람으로서 마땅히 할 도리다.
“할아버지 생각은 그런데. 훈이 생각은 어떠니?”
이 상황에서 몇 마디 말로 할아버지를 설득하긴 글렀다.
기대를 걸어볼 것은 앙리 마르소.
대화와 이해, 타협이라고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그라면 사고 싶은 작품을 다른 그림으로 대체하진 않을 것이다.
“어쩔 수 없군.”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거절해야죠!”
이 인간이 갑자기 왜 이리 순순하게 구는지 모를 일이다.
“왜?”
“…….”
마르소가 되레 왜 거절해야 하는지 물어보니 말문이 막혔다.
그가 <그리움>을 사고자 고집부리면 내가 나서지 않아도 할아버지가 거절할 텐데.
이렇게 쉽게 수긍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저거 사고 싶다면서요. 갖고 싶잖아요. 갖고 싶으면 가져야 하는 사람이잖아요.”
“가족 이야기라잖아.”
이 인간이 갑자기 왜 상식 있는 척을 하지.
당황한 나머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으니 차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은 소중해.”
주변을 감싸고 지켜보던 사람들도 차시현의 말에 동조했다.
“가족은 소중하지.”
“앙리 되게 의외다. 상식적인 면도 있네.”
“그러게.”
“보기 좋은데? 돈이 아니라 작품으로 인사하는 거. 왜 앙리도 마르소의 보석 줬잖아.”
“맞네.”
내 바람과 생각, 염원과 달리 저들에게는 이 황당무계한 상황이 훈훈해 보이나 보다.
할아버지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앙리 마르소에게 말했다.
“전시회 끝나면 챙겨 가게.”
할아버지가 한 번 더 권하자 타협이라고는 전혀 모르던 인간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화가 나는데 어쩔 도리가 없다.
모처럼 할아버지가 전시회를 열었는데 더 소란을 일으킬 순 없어서 분한 마음을 가라앉히고자 미팅실로 향했다.
“친하게 지내는 것 같아서 그랬지.”
뒤따라 온 할아버지가 뒤늦게 달래려고 하시나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이런저런 일로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식으로 답례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뭐야?”
할아버지에게 서운함을 내비치려 할 때 차시현이 밀크 푸딩을 입에 권했다.
“맛있어.”
“……합.”
일단 받아먹으니 할아버지가 진지하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구나. 훈이가 창피해할 줄 몰랐어.”
“창피한 게 아니라. 합.”
할아버지가 자책하는 게 마음에 걸린다.
창피하긴 해도 나를 사랑하는 마음을 온전히 느낄 수 있어 기쁘다는 걸 전해야 한다.
동시에 크게 주목받는 마르소 미술관에 전시되는 게 문제라고 말하려던 차.
차시현이 밀크 푸딩을 한 번 더 들이밀었다.
탱글탱글한 푸딩이 혀를 희롱하며 춤춘다. 겨우 붙잡으면 고소한 향미를 풍기는데 은은한 단맛이 기가 막힌다.
“내일 다 내릴 테니 너무 마음 쓰지 마.”
“그건 안 돼요. 할아버지가 어떻게 그린 그림인데. 그만!”
무슨 말만 하려면 차시현이 푸딩을 먹이는 바람에 할아버지와 대화가 진전되지 않는다.
이대로라면 할아버지가 정말 제2전시관에 걸어둔 작품을 내릴 것 같기에 다급히 말했다.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내리지 말아요. 그냥.”
“그냥?”
“……그냥 조금 부끄러운 거예요.”
부끄럽긴 하지만 할아버지가 날 생각하며 그린 작품을 내리고 싶진 않다.
19년간 기다린 할아버지의 팬에게는 한 점, 한 점이 소중할 테고 할아버지 또한 아쉬울 터다.
작품으로도 뛰어나고 말이다.
“아~”
“……합.”
우유 푸딩을 먹으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생각해 보면 앙리 마르소가 <사랑7>을 마르소 미술관에 걸지만 않으면 될 일이다.
나중에 대화를 시도해 봐야겠다.
‘설마 휘트니 비엔날레처럼 하진 않겠지.’
휘트니 미술관에 내 작품을 연달아 전시해 둔 것처럼 세계적인 미술 축제에 전시하지 않길 바랄 뿐이다.
“정말 괜찮겠어?”
“괜찮아요. 애도 아니고.”
“우리 애 맞는데?”
차시현이 옆에서 또 딴지를 걸었다. 노려보자 또 우유 푸딩을 권한다. 어쩔 수 없이 받아먹으니 씩 웃으며 묻는다.
“맛있지?”
화낼 기분도 안 든다.
그래.
좋게 생각하자.
첫인상처럼 나쁜 사람도 아니고, 유치한 구석이 있지만 그렇다고 그림으로 누굴 놀려먹을 정도로 생각이 어리진 않을 터.
찬찬히 이야기하면 알아들으리라.
* * *
프랑스 파리의 유서 깊은 액자상 샤똥의 대표이자 장인 피에르 말로가 <사랑7>을 감상하는 앙리와 미셸에게 다가갔다.
“축하해요. 멋진 작품을 얻었네요.”
미셸이 고개를 돌려 반겼다.
“말로 씨.”
피에르 말로가 앙리 마르소와 눈인사를 나누곤 미셸에게 안부를 물었다.
“살롱전 기획하신다고 들었어요. 축하해요.”
프랑스 국립 예술 협회가 주최하는 살롱전 이야기였다.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살롱전에서 큐레이터로 활동하는 건 크나큰 영광인 데다 미셸 플라티니는 그중에서도 최고 결정권을 가진 삼 인에 속했다.
“감사합니다. 소문이 빠르네요.”
“안 그럴 수 없죠. 마르소 갤러리에서만 활동한 미셸이 처음 외부 활동을 하게 되었으니.”
피에르 말로가 둥글게 말린 콧수염을 매만지며 앙리 마르소를 보았다.
오랫동안 거래해 왔기에 앙리의 독점욕을 익히 아는 피에르 말로는 그가 무슨 일로 미셸의 외부 활동을 수락했는지 무척 흥미로워했다.
앙리 마르소가 그 시선을 느끼곤 눈썹을 모았다.
“하고 싶은 말씀이라도?”
“아뇨.”
피에르 말로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변했어.’
그는 다시금 <사랑7>을 감상하기 시작한 앙리의 옆모습을 관찰하며 생각했다.
독선적인 천재 화가가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줄곧 자신만을 그려 온 그가 <그림자>를 통해 본인 외 사물을 표현했을 때부터 의아했다.
아니, 고훈의 <손님>을 마르소 갤러리에 전시했을 때부터 기미를 느꼈다.
미셸 플라티니의 외부 활동도 그러하고 조금 전 <그리움>을 포기한 일도 예전이라면 상상하기 힘든 언행이었다.
“말로 씨도 잘 지내시죠?”
미셸이 말을 붙였다.
“그럼요. 앙리 군과 고훈 군이 매일 즐겁게 해주는 덕분에요.”
피에르 말로가 슬며시 미소 지었다.
“조만간 또 멋진 이야기 들려주시길 기대할게요.”
피에르 말로가 앙리 마르소에게 시선을 주곤 자리를 피했다.
“뭔가 하실 말씀 있으시던 것 같은데.”
“눈치 빠른 사람이야. 공모전 끝날 때까진 접촉하지 마.”
앙리 마르소가 나지막이 말했다.
고훈과 정당히 경쟁하고자 공모전을 예년과 달리 준비하는 그로서는 아주 작은 일이라도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혹시나 본인이 참가한다는 게 알려지면 앙리 마르소란 이름의 위명에 가려 심사가 공정하게 이뤄지지 않을 수 있었다.
“설마.”
“나를 잘 알아. 조심해서 나쁠 것 없어.”
두 사람이 공모전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김지우가 조심스레 말을 붙였다.
“저…….”
그녀가 있음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앙리와 미셸이 깜짝 놀랐다.
“안녕하세요. 예화의 김지우입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질문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김지우가 영업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앙리가 김지우를 노려보았다.
영어를 쓰긴 하지만, 그것이 불어를 못 하는 증거는 될 수 없었다.
조금 전 대화를 이해했는지 의심스러웠다.
“죄송합니다. 예정에 없는 인터뷰는 거절하고 있어요. 약속 잡고 부탁드릴게요.”
미셸이 나섰다.
“정말 딱 하나면 되는데. 어떻게 안 될까요?”
앙리 마르소가 김지우를 천천히 살피곤 자국어로 물었다.
“뭐가 알고 싶지?”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김지우가 눈만 깜빡거렸다.
불어인 듯한데 여러 언어에 능통한 앙리 마르소가 굳이 자국어를 쓰니 대화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김지우가 우울한 표정으로 인사했다.
그 반응으로 앙리 마르소는 일단 걱정을 접어두었다.
툭-
이미 여러 언론에 미움을 샀지만 그나마라도 관리하고 싶었던 미셸이 앙리에게 눈치를 주었다.
앙리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김지우를 불러세웠다.
“어이.”
“네?”
“하나만 물어.”
어깨를 축 늘어뜨렸던 김지우가 돌변했다.
“정이품송에는 관심이 없으신데 그리움은 사고 싶으셨던 건지 아니면 두 작품 모두 사려고 하셨는데 거절당하신 건지 그래서 얻게 된 사랑7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순식간에 이어진 여러 질문에 앙리 마르소가 뒤로 주춤하며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
“하나만 물어보라고 했지.”
“한 문장인걸요!”
초롱초롱한 눈빛을 마주한 앙리는 김지우의 욕심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모처럼 나쁘지 않은 질문을 받았기에 아량을 베풀었다.
“정이품송은 살 생각 없어.”
“왜요? 고수열 화백 작품 수집하고 계신 걸로 알고 있는데. 또 엄청난 대작이니까.”
“…….”
앙리 마르소가 김지우를 노려보았다. 그녀가 멋쩍게 웃으며 말을 멈추니 시큰둥하게 답했다.
“세상의 모든 걸작을 살 필요는 없어. 날 움직인 것만으로 충분해.”
김지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변을 유도했다.
“그 작품도 훌륭하지만 난 그것이 내포한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
“아.”
김지우가 앙리 마르소를 이해했다.
한국에 관련한 지식이 없다시피 한 그에게 대한민국이 보낸 고난의 역사와 그것을 이겨낸 한국인의 강인한 의지를 표현한 <정이품송>은 크게 와닿지 않을 수 있었다.
“반면 그리움은 이해하기 쉽지. 그뿐이야.”
“지금까지의 고수열 화백의 작품과 화풍이 다른 점도 유효했나요?”
“그래.”
“그럼 사랑7은요?”
앙리 마르소가 씩 웃었다.
그가 웃는 모습을 처음 본 김지우가 깜짝 놀랐다.
<사랑7>을 얼마나 높이 평가하면 저렇게까지 좋아하는지 궁금했다. 용기를 내 인터뷰를 시도한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놀려 먹기 딱 좋지.”
대단한 답변을 기대했던 김지우가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