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152화
33. 해송(8)
한편 용기라는 이름으로 꾸며진 제1전시관으로 향한 고훈과 차시현도 작품을 감상하고 있었다.
“와.”
차시현이 고수열의 <햇님 달님> 앞에서 입을 벌렸다.1)
정답게 손을 잡은 오누이였다.
왼쪽에 선 오빠는 밤을 보냈으며 나란히 선 동생은 낮을 즐기고 있었다.
마주 잡은 손을 기점으로 삼아 그믐밤에서 한낮으로 이어지도록 바림했다.2)
“나 이거 알아. 햇님 달님이지?”
“맞아.”
고훈이 긍정하자 차시현이 웃었다.
휘트니 비엔날레에 전시된 작품은 이해하기 어려워서 이번에도 그러면 어쩌나 걱정하던 차.
조금이라도 아는 내용을 접하니 반가웠다.
호랑이를 피해서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을 붙잡은 오누이가 해와 달이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왼쪽 밤이랑 오른쪽 낮이랑 똑같은 장소야.”
고훈은 차시현을 위해 일일 도슨트가 되어 할아버지의 <햇님 달님>을 설명했다.
차시현이 그림을 자세히 살피니 과연 오빠 동생이 있는 장소가 같았다.
“둘이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다.”
해가 된 동생, 달이 된 오빠가 서로 못 만나는 건 아닐까 싶어 동화에 아쉬움을 가졌던 차시현은 손을 꼭 잡은 남매의 모습에 안도했다.
“그런데 이게 왜 용기야?”
“글쎄.”
고훈이 조심스레 자신의 견해를 내비쳤다.
“할아버지는 대입하는 걸 좋아해. 밤과 낮이 서로 다른 게 아니라 오누이였다는 것처럼.”
“응.”
“완전히 달라 보이는 두 개념을 나란히 그려서 상대가 나와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시려던 거 아닐까 싶어. 그러데이션이 있어서 가운데는 완전히 같잖아?”
차시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까지가 밤이고 어디까지가 낮인지 명확히 할 수 없지?”
“왼쪽 끝은 밤 아니야? 오른쪽 끝은 낮이구.”
“그렇게 쉽게 구분하는 걸 경계하시는 거야. 이분법은 이해하긴 쉽지만 그만큼 깊게 이해할 순 없게 돼.”
“어려워.”
“그 어색함을 이겨내고 상대를 이해하려는 마음이 용기라고 생각해.”
차시현이 <햇님 달님>을 보다가 웃었다.
“난 잘 모르겠어. 그냥 예쁘다.”
“할아버지가 들으시면 좋아하시겠다.”
고훈은 자신의 해석을 차시현에게 강요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차시현이 나름 사고관을 갖추고, 타인의 의견에 휘둘리지 않음을 알고 있기에 생각을 전했을 뿐이었다.
도리어 차시현이 <햇님 달님>을 보고 그저 예쁘다고 받아들인 것이 좀 더 순수한 자세가 아닐까 생각했다.
선캡과 선글라스를 쓰고 목토시를 한 두 소년은 관람객들에게 또 다른 전시품이 된 채 그렇게 제1전시관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는 거 같아.”
“누군지 못 알아보니까 괜찮아.”
고훈이 말을 내뱉기가 무섭게 한 무리의 관람객이 고훈을 알아보았다.
“귀엽다.”
“친구랑 같이 왔나 봐. 할아버지 그림 설명해 주는 것 같던데.”
“근데 왜 저러고 왔지?”
고훈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자 차시현이 친구의 선캡과 선글라스를 벗겼다.
“왜 들키지?”
“미술관 안에서 어린애가 꽃무늬 선캡과 선글라스, 목토시를 하고 있으면 이상하지.”
“많이 이상해?”
“창피해.”
차시현이 고훈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고훈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모자와 선글라스를 다시 챙겨 썼다.
“이제 제2전시관 가면 되지?”
복도로 나선 차시현이 양옆을 둘러보고 물었다.
“응.”
“근데 넌 다 봤던 그림이니까 재미없겠다.”
“그럼 따로 다닐까?”
“싫어.”
차시현이 단호히 나오자 고훈이 피식 웃었다.
“그림은 볼 때마다 느낌이 달라져. 여기 있는 그림은 나도 못 봤고.”
“너한테도 비밀로 하셨어?”
“그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까.”
고훈은 사랑이라는 이름이 붙은 제2전시관으로 들어서며 고개를 돌린 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너야.”
차시현이 고훈을 보며 말했다.
제2전시관은 포테이토 피자를 먹는 고훈과 쪼그려 앉아서 곤충을 관찰하는 고훈, 엎드려서 화집을 구경하는 고훈, 붓을 놀리는 고훈, 도화지를 찢는 고훈, 소고기를 먹고 눈을 빛내는 고훈 등으로 가득했다.
고훈이 <사랑3> 앞으로 다가갔다.
집 정원에서 그림을 그리는 자신이 담겨 있었다.
수묵채색화로 제1전시관에 있던 유화 작품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이렇게 보고 계셨구나.’
고훈은 <새집>을 그릴 적을 떠올렸다. 자신을 뒤에서 지켜보던 할아버지의 시선이 이보다 따뜻하게 와닿을 수 없었다.
그림을 접한 지 얼마 안 된 차시현도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할아버지가 너 엄청 사랑하시나 봐.”
고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 좀 봐. 진짜 너무 귀엽다.”
“멈춰 있는데 왜 걷는 것 같지?”
반대편 벽에서 웃음소리가 났다.
프랑스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도뷔니 거리를 걷는 고훈을 그린 <사랑 5>였다.
그림을 구경하던 두 사람은 옷을 두텁게 입고 뒤뚱거리며 걷는 고훈의 뒷모습에 즐거워했다.
검은색 패팅을 입고 후드를 쓴 고훈은 하얀 얼굴에 마스크까지 쓰고 있어 꼭 펭귄처럼 보였다.
“흐흐.”
“그림 그리다 졸았나 봐.”
그 옆에선 고훈이 그림을 그리다가 조는 바람에 얼굴을 판화처럼 쓴 그림을 보고 좋아하고 있었다.
“정말 저랬어?”
차시현이 <사랑6>을 보며 웃었다.
“…….”
할아버지의 사랑을 느끼던 고훈이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이렇게 보면 완전 애기네.”
“그러게. 고수열 눈에는 그냥 귀여운 손자겠지.”
또 그 옆에선 입 주변에 춘장을 가득 묻히고 짜장면을 먹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이곳이 사랑스럽고 따뜻한 기억을 추억할 수 있는 공간인 동시에 대한민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전시회라는 걸 인지한 순간.
어제 술에 취한 일과 인터넷 방송에서 노래를 부른 일 등이 떠오르며 얼굴이 화끈거렸다.
“작가님께서 판매할 의향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고훈이 부끄러운 나머지 할아버지를 찾으려던 차 멀리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 * *
최근 창피한 일이 많아졌는데 할아버지께서 방점을 찍으셨다.
다른 건 그렇다 쳐도 짜장면을 잔뜩 묻히며 먹은 건 젓가락 쓰는 일에 서툴던 때다.
할아버지의 시선을 느낄 수 있어 좋지만 저런 그림을 전 세계가 주목한 자리에서 굳이 전시하셨어야 했을까.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다.
선캡과 선글라스를 다시 안 썼으면 부끄러워서 도망갔을 것이다.
“그러니까 왜 안 파냐고.”
앙리 마르소 목소리다.
“죄송합니다. 이번 전시회에서 판매하시는 작품은 정이품송 한 점뿐입니다.”
차시현과 눈을 마주했다.
“무슨 일이야?”
“작품 사려는 것 같은데.”
“그런데?”
“할아버지는 작품 파는 거 안 좋아하셔.”
당신이 남긴 작품이 전시되지 않고 누군가의 거실 혹은 창고에서 투기의 목적으로 보관됨을 무척 혐오하던 분이다.
이번 전시회에서 <정이품송> 단 한 점만 경매에 올리는 이유도 전시회를 열어준 서울 미술관에게 최소한의 이익을 챙겨주기 위함이었다.
“가보자.”
“응.”
무슨 일인지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다가가니 미술관 직원이 난감해하며 앙리 마르소를 달래고 있었다.
“작가님의 의향에 대해선 제가 설명해 드리기 어렵습니다. 방침이 그러하니 이해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앙리 마르소가 눈을 지그시 감고 목근육을 풀었다.
“고수열 경 불러.”
“그게…….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직원이 할아버지를 찾으러 갔다.
“무슨 일이에요?”
앙리 마르소가 시선을 내리더니 거들떠보지도 않고 직원을 닦달하려다가 다시 눈을 마주했다.
“뭐야. 꼴이 왜 그래.”
앙리 마르소도 바로 알아본다.
차시현 말대로 아무래도 변장이 잘못된 듯하다.
“뭐가 어때서요.”
“……뭐가 어떠냐고?”
마르소가 뭔가 말하려다가 고개를 저었다.
“경매 올리는 건 정이품송뿐이에요.”
제2전시관에 걸린 그림들은 처음 보지만, 이번 전시회에서 소개된 작품 중 한 작품만 꼽으라면 단연 <정이품송>이다.
대작이기도 하거니와 할아버지의 기개 높은 화풍이 가장 잘 드러난 걸작이다.
앙리 마르소도 모르지 않을 텐데 굳이 다른 작품을 사려는 걸 이해할 수 없다.
“알아.”
“그럼 그거 사요.”
“내가 사고 싶은 건 이거야.”
마르소의 말에 고개를 돌리자 파리에서 살 적에 ‘아비뇽 다리 위에서’라는 동요에 맞춰 율동 추던 장면이 연작으로 그려져 있다.
“…….”
다섯 점으로 구성된 연작들은 모두 <그리움>이란 제목으로 붙어 있다.
인상파만큼이나 인상적인 그림을 그리던 할아버지가 1년 전부터 사실주의적 그림을 그리시더니, 이 작품을 위한 일이었나 싶다.
너무 사실적이다.
“흡. 너 어렸을 때야?”
차시현이 입을 가리고 웃는다.
할아버지가 이 작품을 왜 그리셨는지는 차치하고 이때 일을 어떻게 알고 계신지, 왜 하필 전시하셨는지 모를 일이다.
나도 따지고 싶다.
“마르소가?”
할아버지 목소리가 들려 곧장 고개를 돌렸다.
“할아버지!”
미술관 안이라 마음껏 소리치진 못했지만 내 마음은 충분히 전달되었을 것이다.
성큼성큼 걸어가자 두 팔을 벌리던 할아버지가 눈을 끔뻑거린다.
“왜? 무슨 일 있어?”
“저거 어떻게 된 거예요. 어떻게 알았어요.”
<그리움>을 가리키니 허허 웃으신다.
“미국 집에 갔을 때 컴퓨터 안에 있더구나. 어때. 잘 그렸지?”
“그야 잘 그렸죠! 잘 그린 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아니, 잘 그린 것도 문제야!”
잔뜩 심퉁 난 표정으로 우스꽝스러운 동작을 취하는 게 여실히 드러났으니 이제 얼굴 들고 다니긴 틀렸다.
인터넷 방송에서 노래 부르는 정도가 아니다.
700명 앞에서 주정 부린 것으로도 모자라 그게 기사화되고, 이제는 전 세계가 주목하는 할아버지의 전시장에서 과거에 주접 떨던 모습이 공개되고 있다.
“고수열 경.”
앙리 마르소가 다가왔다.
할아버지가 바둥거리는 날 끌어안고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인가.”
“저 그림 파시죠.”
“웃기지 마! 샀단 봐! 사기만 해봐!”
그것으로도 모자라 앙리 마르소의 손에 들어가면 마르소 미술관에서 대대손손 전시될 테니 반드시 막아야 한다.
“쑥스러워한다.”
“귀여워.”
“뭔데? 왜 저러는데?”
“앙리가 저 그림 사고 싶다고 하니까 화내잖아.”
“악핳하. 저게 뭐야. 유치원인가?”
어느새 사람들이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다들 웃는다.
“흠. 팔 생각은 없네만.”
역시 할아버지.
마르소를 보낸 뒤에 <그리움>을 내리자고 차분히 설득해야겠다.
“굳이 왜 이걸 사고 싶은지 궁금하군.”
“그게 왜 궁금하세요!”
깜짝 놀라 항의했지만 할아버지는 그저 흐뭇하게 웃을 뿐이다.
“이런 화풍은 처음이니까.”
확실히 할아버지가 발표한 다른 작품들과는 이질적인 작품이다. 마치 실사 애니메이션의 장면을 이어 붙인 듯하다.
그렇다고 사도 되는 건 아니다.
“자네 생각은 잘 알겠네만 이건 우리 가족과 관련한 그림이라 팔 수 없네.”
그럼 그렇지.
할아버지가 함께하지 못한 아버지, 어머니, 나의 추억을 다른 사람에게 파실 리 없다.
혹시나 마음이 바뀌실까 두려워 있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사랑7은 어떤가.”
앙리 마르소가 고개를 돌렸다.
짜장면을 묻히고 먹는 그림이다.
“훈이 챙겨주니 언젠가 답례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저 그림은 그냥 주지.”
“그럼 안 되죠!”
* * *
1)<해와 달>, 주요섭, 1922.
<햇님 달님>으로 알려진 동화. 현재 맞춤법 규범 표기는 <해님 달님>이나 동화 <햇님 달님>, 시 <해돋이>에서 문학적 허용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1989년, 연세대학교 국어학과 남기심 교수의 <문법적으로 잘못된 말들>에서도 ‘별님, 달님, 햇님’ 등으로 소개되었다.
2)바림: 색을 칠할 때 한쪽을 짙게 하고 다른 쪽으로 갈수록 차츰 엷게 나타내는 일. ≒그러데이션
출처 표준국어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