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150화
33. 해송(6)
“훈이 초콜릿 두 개 먹었어요? 맛있었어요? 작고 예쁜 모양이었어요?”
퇴임식을 치른 다음 날.
장미래가 웃으면서 어제 일을 놀려댔다.
차라리 기억이라도 없으면 좋으련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선명해서 어딘가에 숨고 싶을 지경이다.
이미 초콜릿 몽블랑 때문에 인생의 오점을 남겼거늘 이번에는 트라이플과 술 초콜릿으로 전국적인 망신을 당하게 되었다.
인터넷에 내가 앙리 마르소에게 안긴 사진과 할아버지에게 업힌 사진이 속속들이 올라와 있다.
[앙리 마르소의 볼을 꼬집은 천재 소년!]
[고수열 화백 연설 도중 일어나 눈치 보는 고훈]
8월 2일, 한국대학교 미술대학 고수열 학장의 정년 퇴임식에서 웃음을 유발하는 작은 소동이 일었다.
고수열 화백의 손자 고훈 군이 알코올 성분이 든 디저트를 먹고 취해버린 것.
고수열 화백은 잠든 채 떨어지지 않는 손자를 업고 강당에 올랐다.
박수 소리가 이어지는 가운데 정신을 차린 고훈은 슬며시 눈을 뜨고 주변을 살핀 뒤 얼굴을 붉혔다.
한편 식전 다과회에서 고훈과 함께 있던 앙리 마르소와도 훈훈한 광경을 연출했다.
프랑스 유명 화가이자 부호 앙리 마르소는 취한 고훈을 달래기 위해 그를 안아 들었다.
이에 고훈이 그의 볼을 잡고 양옆으로 늘이며 해맑게 웃으며 두 사람 사이의 친분을 과시한 것.
해당 상황은 아래 링크로 확인할 수 있다.
-고화질 영상 바로가기-
└미치겠다 진짴ㅋㅋㅋㅋㅋ 한 번만 더 꼬맹이라고 해보랰ㅋㅋㅋ
└자막 단 인간 누구야. 잘했어.
└앙리 얼굴 문대는 거 왤케 귀엽짘ㅋㅋㅋㅋㅋ
└와 저걸 참네.
└앙리 짜증 내면서 화는 안 냌ㅋㅋㅋㅋ 상냥해ㅠㅠ
└둘이 찐친이었구나ㅋㅋㅋ 앙리 얼굴을 떡 주무르듯ㅋㅋㅋㅋㅋ
└그러니깤ㅋㅋ 세상에 누가 저 미친놈을 저렇게 대해 ㅋㅋㅋ
└할아버지한테 업힌 거 행복해 보인다.
└앙리가 고생이 많네.
미치겠다.
기억이 나긴 하지만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저랬는지 알 수 없다.
당분간 앙리 마르소와는 마주치지 말아야겠다.
기사를 보곤 한숨을 내쉬자 장미래가 볼을 감싸고 웃는다.
“오구오구. 귀여워. 부끄러워요?”
“하지 마요.”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다들 좋아하잖아.”
내가 봐도 귀여운 얼굴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행동 때문에 귀염받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1)
그런 이미지가 생기면 내가 아무리 멋진 그림을 그려도 온전히 전달되지 않을 거다.
진중한 면모를 보일 방도를 찾아야겠다.
기사를 좀 더 보니 어제 취한 일은 기사가 많지는 않다. 할아버지와 관련한 이야기가 많아서 다행히 크게 눈에 띄진 않는다.
[한국 예술계의 거목이 전한 당부]
한국대학교 미술대학 20대 학장 고수열 화백이 교육계를 떠났다.
80년대, 소나무를 비롯하여 한국적 정서가 담긴 회화로 주목받은 해송 고수열 화백은 한국화의 저변을 다진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모두 세계화를 외치던 시기에 한국화만의 개성을 살린 그의 화풍은 세계적으로 큰 사랑을 받았으며 그의 <소나무10>은 1992년 영국 소더미 경매장에서 2,750만 파운드에 낙찰된 바 있다.
한국 미술계의 크나큰 거목이었던 고수열 화백은 2009년 한국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에 부임한 이래 김형우, 이상일, 장미래와 같은 걸출한 후학을 양성하였으며.
2023년 학장직을 맡아 미술 교육계에 공헌하였다.
어제 2일, 퇴임식에서 그는 “여러분이 앞선 화가들을 보고 꿈과 용기를 키웠듯 어린 화가들의 꿈과 용기가 되어 달라.”라고 말하며 “나 또한 그러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덧붙였다.
한편 19년 만에 열린 고수열 화백의 개인전은 오늘 3일부터 한 달간 서울 미술관에서 감상할 수 있다.
└고수열은 신이야! 어르신!
└이분 진짜 멋진 게 매해 청년 자립 사업에 1억 원씩 기부함.
└아동이나 불우이웃이 아니라?
└사회문제를 20~40대 청년 계층이 건물주, 사업장, 기성세대에게 착취당해서 생겼다고 보는 관점임.
└건물주랑 회사는 돈을 더 버는데 정작 청년들은 뼈 빠지게 일해도 서울에서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드니까. 결혼 못 해서 출산율 떨어지지, 경제 활동 인구 줄지, 돈만 많이 벌면 뭐든 괜찮다는 인식 생기지. 맞벌이 아니면 살 수가 없으니 아기 봐줄 사람도 없지. 그러다 보니 인성 문제 있는 애들도 많아지고.
└장문충 극혐;;
└고수열 그림 진짜 좋아하는데 실물로는 한 번도 본 적 없음.
└내일 볼 수 있을 듯?
└고수열 교수님한테 처음 수업 들은 날 울었는데 ㅠ
└왜?
└한국화 그려본 적 있냐고 물으셔서 자신 있게 사진 보여드렸는데 엄청 상냥하게 한 번도 그려본 적 없구나라고 하셨음 ㅠㅠㅠ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너무햌ㅋㅋㅋㅋㅋㅋ
└뭐야? ㅋㅋ 네 그림은 그림이 아니라는 말이야?
└그게 아니라 내 그림이 정말 한국화라고 생각하냐고 물으셨어. 서양화인지 동양화인지 현대미술인지 생각해 보라고. 잘 모르겠더라.
└한국화가 뭔데?
└교수님도 모른다고 같이 생각해 보자고 하심.
└?
└고수열하면 한국화 대표하는 화가 아님? 그런 사람이 모르면 어떡함?
└그냥 학생들한테 생각할 기회 주는 거 아닐까?
└또 어려운 이야기 나왔다. 개념이 뭐가 중요해. 그냥 좋은 게 좋은 거지.
할아버지의 전시회를 반기는 사람이 많은 만큼, 퇴임을 아쉬워하는 사람도 많아 보인다.
띵동-
초인종이 울렸다.
발판에 올라 버튼을 누르자 방태호가 인사했다.
“이거 좀 높긴 하다. 내릴 수 없나?”
장미래가 좋은 말을 해주었다.
그동안 골프채를 활용했는데 너무 무거워서 힘 조절 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한 번은 인터폰 액정을 깨 먹어서 할아버지가 발판을 놓아 주었다.
방태호가 현관을 열고 들어와 잊고 싶은 이야기를 꺼냈다.
“훈이 괜찮아?”
“안 괜찮아요.”
“왜? 머리 아파?”
“창피해서 이제 밖에 못 다녀요.”
“흐흐흫흐. 아, 안녕하세요. 교수님.”
“안녕하세요. 선생님 씻고 계세요.”
“네. 시간 좀 남았으니까요.”
방태호가 나를 보더니 또 웃는다.
“어제 사람들이 걱정하길래 커뮤니티에 괜찮다는 글 올렸거든. 댓글 봤어?”
생각해 보니 인터넷 방송을 켜면 또 얼마나 놀림당할지 끔찍하다.
“안 볼래요.”
“흐흫. 그렇게 맛있었어? 생각보다 도수가 있더라고. 4도던데.”
방태호가 내가 어제 먹은 술 초콜릿에 든 알코올 도수가 4도였다고 알려주었다.
그게 얼마나 높은지 몰라도 내 생각에는 아마 트라이플을 먹을 때부터 취했던 것 같다.
“그렇게 맛있었어?”
장미래가 묻는다.
“……맛있긴 했어요.”
“어떡해. 벌써부터 술 좋아하면.”
술이 원수다.
납중독의 심각성이 널리 알려진 만큼 예전처럼 술에 납 성분을 넣진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언젠가 적당히 즐길 생각이었지만.
이런 추태를 반복할 순 없다.
합법적으로 술을 마실 수 있는 나이가 되어서도 절대로 안 마시리라.
“전 커서도 술 절대 안 마실 거예요.”
“정말? 그런 말 하던 사람이 꼭 많이 마시던데.”
“안 마셔요. 절대로.”
“그래, 이 녀석아. 할아버지 앞에서 주정 부리는 애가 세상 어디 있어?”
할아버지가 젖은 머리카락을 털어내며 거실로 나오셨다.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다.
“학장님.”
“오, 왔는가.”
“대표님, 이제 학장님 아니고 작가예요.”
“아. 그러네요.”
세 사람만 분위기가 좋다.
물론 좋은 날이지만 이목이 쏠릴 것을 생각하면 얼굴이라도 가리고 싶은 마음에 모자를 찾았다.
선캡이라고 얼굴을 가리기에 아주 적합한 모자가 눈에 들어왔다.
유럽 여행 다닐 때 사 주신 선글라스와 할아버지와 등산할 때 쓰는 시원한 목토시도 챙겼다.
“준비되셨으면 출발할까요? 훈아, 얼마나 걸려?”
“다 됐어요.”
가방을 메고 나서자 장미래와 방태호가 또 웃는다.
“크크킄크크흫크. 훈아, 그게 뭐야. 응?”
장미래가 선캡과 목토시를 벗기려고 한다.
“안 돼요.”
“동네 마실 가니? 등산회 가? 빨리 벗어.”
“이거라도 있어야 해요.”
“선생님, 훈이 좀 보세요. 이러고 간대요.”
할아버지가 날 보시더니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셨다.
“내 새끼 옷도 혼자서 잘 입네. 어서 가자.”
역시.
할아버지가 사 주신 것들이니 할아버지 마음에 안 들 리 없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황당해하는 장미래와 방태호를 두고 신발을 신었다.
“훈아, 내일은 할아버지랑 등산할까?”
“등산이요?”
“그래. 산책하는 것처럼 설렁설렁 걷다가 도토리 무침이랑 감자전도 먹고.”
도토리 무침은 먹어본 적 없지만 감자전은 아버지가 해 주신 적 있다.
감자를 갈아서 다른 재료 없이 식용유에 부쳤을 뿐인데 어마어마한 요리가 된다.
가운데 쫄깃한 식감도 좋지만 가장자리가 살짝 바삭거리는 느낌이 너무나 좋았던 기억이 있다.
“가요.”
* * *
어젯밤 고훈과 화목한 시간을 보낸 앙리 마르소는 인터넷에 올라온 사진을 보곤 밤새 이를 갈았다.
완벽하기 이를 데 없는 자신의 얼굴이 고훈 때문에 일그러져 나오니 대한민국 언론사를 모조리 고소해도 직성이 풀리지 않을 듯했다.
“흫끄그윽끟하흫.”
앙리가 미셸을 흘겨보았다.
그녀는 어제 대한일보가 게시한 앙리 마르소의 굴욕 사진을 스마트폰 배경 사진으로 설정하고 있었다.
“당장 지워.”
“싫은데? 흐흫흐흐흫.”
미셸이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앙리의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볼을 모으기도 입술을 만지기도 하면서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좋냐?”
“응. 너무 좋아.”
“…….”
앙리 마르소가 눈을 감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미셸이 이렇게나 웃은 적은 오랜만이었기에 적당히 참아줄 생각이었지만, 코를 뒤집곤 카메라 셔터 소리가 나자 폭발하고 말았다.
“적당히 해!”
미셸이 웃으며 앙리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웃는 그녀에게 더 이상 화낼 수 없었던 앙리가 조용히 타일렀다.
“지워.”
“안 돼. 이거 한 장만.”
“지우라고 했어.”
“대신 소원 하나 들어줄게.”
“소원 같은 거 없어.”
“정말? 뭐든 다 해 줄 텐데?”
앙리가 피식 웃었다.
마음만 먹으면 세상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그에게 소원 따위 필요 없었다.
“내가 못 가질 물건이 있다고 생각해?”
미셸이 일어나서 가방을 찾더니 작은 사인지 하나를 꺼냈다.
“이거 줄게.”
앙리 마르소가 눈썹을 모았다.
고훈이 뉴욕에서 팬들을 상대로 그려준 해바라기 사인이었다.
“무슨 짓이야?”
“어쩔래?”
“하. 웃기지 마. 돈만 주면 얼마든지 살 수 있어.”
미셸이 입술을 내밀었다.
“안 통하네.”
그러고는 무심하게 앙리 마르소에게 고훈의 해바라기 사인을 넘겼다.
앙리 마르소는 험악한 표정을 유지한 채 그것을 챙겨 머리맡에 두었다.
* * *
1)고훈은 빈센트 반 고흐일 적부터 자기 외모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 태어난 반 고흐> 025화 3p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