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149화 (104/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149화

33. 해송(5)

“히끅. 합. ……해끅.”

어머니와 함께 보던 드라마에서 저런 장면이 종종 나오곤 했는데, 어떻게 싸울지 궁금하다.

최규서란 사람이 여유롭게 웃는다.

“하긴 너도 좀 해야겠다. 소개해 줄게. 연락해.”

“아니야. 바빠서 그럴 시간이 없거든.”

성형 수술 이야기에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던 최규서의 얼굴이 굳었다.

“부럽다. 나도 좀 한가하게 살고 싶은데, 너처럼 자기관리할 시간도 갖고.”

“그래. 관리 좀 해. 누군 시간 남아서 그러겠어?”

“더 늦기 전에 그래야 할까 봐. 그래도 불러주는 곳이 너무 많은 걸 어떡하겠어. 다음 주 세미나도 준비해야 하고.”

“……MMCA?”1)

“맞다. 전에 네가 했다며? 잘 안 됐나 봐. 이백 명 온다고 하니까 엄청 좋아하던데.”

최규서가 진행하던 세미나가 잘 안 되었던 모양인데, 장미래가 맡으면서 호응을 얻은 것 같다.

어머니와 함께 보던 드라마대로면 이제 곧 어느 한쪽이 따귀를 올리든 물을 끼얹든 할 것이다.

“히끕.”

막 흥미진진해지던 차에 마르소가 다가왔다.

“가지고 오라니까 너 혼자 먹고 있어?”

“많이 있어요.”

앙리 마르소가 초콜릿과 딸기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딸기와 블루베리가 든 것을 집었다.

“왜. 흐흥. 초콜릿도 먹어봐요.”

“싫어.”

“흐흥흥. 그거 아까 먹었잖아요. 초콜릿 먹어요.”

딸기 트라이플은 이미 먹어봤으면서 초콜릿 트라이플을 포기하다니.

안정적인 선택을 하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새로운 것에 도전할 용기가 없으면 그 즐거움도 누릴 수 없다.

“왜 이렇게 실실대?”

“재밌잖아요. 바보. 흐흐흥.”

앙리 마르소가 눈을 크게 뜬다.

초콜릿 트라이플의 깊고 감미로운 단맛을 눈앞에 두고도 즐기지 못하는 바보답다.

“바보. 바보.”

“이 꼬맹이가 또 헛소리네.”

“자, 먹어 봐요. 아~”

“왜 이래?”

무슨 일인지 앙리 마르소의 건방진 태도에도 기분이 나쁘지 않다.

빨리 초콜릿 트라이플을 맛보여 주고 싶어 상의를 잡아당겼다.

“야, 놔.”

“흥흐흐흥흫. 맛있다니까요.”

“미쳤어? 놓으라고!”

“항하핳핳하.”

당황해하는 표정이 재밌다.

앙리 마르소가 또 고집을 부리기에 손에 힘을 주자 갑자기 시야가 높아졌다.

장미래는 물론 할아버지보다도 크다. 키가 큰 모양이다.

“가만있어!”

시선을 내리자 앙리 마르소도 나를 올려다본다.

“……쪼그만 게.”

“뭐?”

“한 번만 더 꼬맹이라고 해봐. 혼내줄 거야.”

또 재밌는 표정을 짓는다.

“너 설마 취했냐?”

앙리 마르소가 이상한 말을 한다.

“술을 마셔야 취하지. 바보. 흐흐흥. 어.”

키가 다시 줄어들었다.

앙리 마르소가 초콜릿 트라이플을 한 입 먹어 보곤 연달아 몇 번 더 먹는다.

역시 맛있어할 줄 알았다.

“맛있지?”

“빌어먹을. 좀 든 거 같기도 하고. 아르센, 아르센!”

“나도.”

“먹지 마.”

앙리 마르소가 또 심술을 부린다.

저렇게나 많은데 혼자 먹으려는 걸 보면 괜히 알려주었다.

“…….”

이건 뭐지.

테이블에 작은 병들이 줄지어 있다. 미니어처라고 하는 것 같은데 술병들을 작게 만들어 놓으니 귀엽다.2)

예사 솜씨가 아니다.

접시에 놓은 걸 보면 장식품은 아닌 듯해서 포장지를 뜯어 보니 초콜릿이 들어 있다.

“합.”

한입에 먹기 적당한 크기다.

지금까지 먹던 초콜릿과 달리 살짝 단단한데 가운데에 뭔가 들어 있다.

비강을 짓밟는 듯한 이 독특한 향은 분명 코냑이다.

술을 못 마시는 어린이를 위해서 이렇게 코냑 향을 첨가한 초콜릿을 만든 모양이다.

“흐흐흥.”

이 또한 훌륭하다.

단단한 식감 뒤에 찾아오는 초콜릿의 단맛과 코냑의 농밀한 향이 어우러지니.

이것을 만든 이가 선악과를 권하는 뱀처럼 느껴진다.

이를 어찌 거스를 수 있을까.

“합.”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마르소와 눈을 마주쳤다.

“야!”

자기는 혼자 먹으려고 했으면서 초콜릿 두 개 먹었다고 소리친다.

“돈도 많으면서 왜 자꾸 쪼잔하게 굴어요. 먹고 싶으면 같이 먹으면 되지.”

하나를 집어 손에 쥐여 주니 테이블에 내려놓곤 내 손을 잡고 끌었다.

“어. 어.”

왜 이렇게 어지럽지.

“훈아.”

할아버지 목소리다.

“흐흐흥. 할아버지.”

“얘가 왜 이래? 어?”

“트라이플에 와인이 좀 많이 들어간 것 같습니다. 술 초콜릿도 먹었고.”

“으잉?”

“거짓말. 흐히힛힝.”

할아버지가 얼굴을 가까이해서 냄새를 맡더니 인상을 쓰신다. 불쌍한 우리 할아버지. 멋진 할아버지. 사랑하는 할아버지.

꽉 안아드리자 또 키가 컸다.

할아버지의 어깨 너머로 장미래와 차 뭐시기가 보인다. 이제 안 싸우나 보다.

“이제 안 싸워요?”

“어?”

장미래가 눈을 크게 뜨고 묻는다.

“네 이웃이 네 곁에서 평안히 살거든 그를 해하려고 꾀하지 말며 지혜 없는 자는 그의 이웃을 멸시하나 명철한 자는 잠잠하니라.”3)

싸움은 좋지 않다.

싸움은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모든 싸움은 그럴 의지에서 시작한다.

“행복하게 사는 사람을 해코지하지 말고. 히끕. 멍청한 사람만 깔본다는 말이에요끅.”

초콜릿 하나만 더 먹고 싶다.

“드라마가 재밌는 건 실제가 아니라서 재밌는 거라고요. 그러니까 물 같은 거 뿌리지 안 돼요.”

내 설교가 통했는지 장미래에 차 뭐시기가 더는 싸우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나 멋진 선교자다.

그런데 이런 나를 무급으로 쓴 것으로도 모자라 자질이 부족하다고 박해하니 괘씸해도 아주 괘씸하다.4)

……그땐 정신적으로 힘들긴 했었지만.

코냑맛 초콜릿이 있었더라면 조금 더 힘낼 수 있었을 거다.

하나 더 먹고 싶다.

“이 녀석아, 뭘 먹어서 이래?”

“흐. 초콜릿. 할아버지도 드실래요? 초콜릿 많이 먹진 않았는데 딱 두 개만 먹었거든요. 근데 그게 작은 병 모양이라서 엄청 귀여워요. 귀여워서 두 개만 먹었거든요? 두 개만 있는 건 아닌데 암튼 두 개만 먹었어요. 그런데 작은 병 모양인데 엄청 섬세해요. 그림이랑 문구도 다 적혀 있어서 귀여워요. 그걸 두 개만 먹은 거예요. 초콜릿 먹으면 행복해지잖아요. 그 초콜릿은 두 개 먹었는데도 엄청 행복해져요.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작게 만들었을까? 귀엽거든요.”

“아이고. 이 녀석이 할애비 앞에서 술주정을 부리네.”

“술주정?”

“그래. 이 녀석아. 아이고 술 냄새.”

“술주정이 뭐예요?”

“취했다고.”

“아.”

우리 할아버지는 내가 모르는 단어가 있어도 프랑스어로 잘 가르쳐 주신다.

“할아버지 좋아요.”

“그래. 그래. 미래야 나 훈이 좀 집에 데려다주고 오마.”

“제가 갈게요. 선생님은 계세요.”

“안 돼!”

오늘 뷔페를 얼마나 고대했는데 벌써 집에 가라니 그럴 순 없다.

게다가 할아버지의 은퇴식을 지켜봐야지.

“나 안 취했어요.”

“안 취하긴 뭘 안 취해. 할아버지가 모르는 거 막 주워 먹지 말랬지.”

“맛있는데? 할아버지도 드릴까요? 봐요. 이런 게 많은데 저는 딱 두 개만 먹었어요. 엄청 귀엽죠. 그런데도 두 개만 먹었어요.”

“훈아, 이모한테 와. 이모랑 집에 가자.”

“싫어요. 할아버지랑 있을 거예요.”

장미래가 나와 할아버지를 떼어놓으려고 해서 목을 꽉 끌어안았다.

“컵. 훈아, 숨 막혀. 숨 막힌다고!”

“……할아버지 죽어?”

이제 겨우 기억이 돌아왔는데.

겨우 1년밖에 안 되었는데.

앞으로 함께하고 싶은 일이 얼마나 많은데 벌써 죽는다고 하신다.

“흐으으응. 끄읍. 죽어요?”

“훈아. 이거.”

“우리 할아버지 살려주세요. 끄으으응. 살려주세요.”

“훈아, 힘 빼! 할아버지 힘드시잖아!”

“아.”

손에 힘을 풀자 할아버지가 기운을 차리셨다.

다행이다.

* * *

오후 6시 10분.

사회자 유진이 사람들 앞에 섰다.

“그러면 지금부터 고수열 한국대학교 미술대학 학장님의 정년 퇴임식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녀는 영화관을 가득 채운 사람들과 기자들을 둘러보고 감탄했다.

“보통 정년 퇴임식이라고 하면 슬프고 안타깝고 아쉬운 경우가 많은데, 고수열 학장님의 퇴임식은 분위기가 사뭇 다르네요. 아마 고수열 화백의 활동을 기대하기 때문이겠죠.”

방문객 일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 식순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학장님께서 먼저 여러분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이 시대의 참교육자로 활동해 주신 고수열 학장님을 모십니다. 박수로 환영해 주세요.”

고수열은 자질구레한 절차보다 본인을 잊지 않고 퇴임식을 찾아준 이들에게 감사 인사가 우선이라고 판단했다.

뜨거운 박수갈채가 이어지는 가운데 고수열이 술에 취해 매미처럼 달라붙은 손자를 업은 채 강당 위에 올라섰다.

“…….”

고수열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고훈은 쌔액쌔액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얘가 술이 든 초콜릿을 주워 먹어서. 이해 좀 부탁드립니다.”

기자들이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술 초콜릿 먹고 취했대.”

“귀엽다.”

“어떻게 저렇게 찰싹 붙어 있지? 교수님하고 떨어지기 싫은가 봐.”

방문객도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를 따뜻하게 지켜보았다.

“영악한 놈.”

앙리가 중얼거리자 미셸이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귀여운 척해서 이목 끌려는 거잖아.”

고훈에게 몇 번 희롱당한 앙리 마르소는 이마저 고훈이 계획한 일 아닐까 싶었다.

“엄청 귀엽나 봐?”

“……시끄러워.”

고수열이 목을 풀곤 마이크 앞에 섰다.

“우선 제가 뭐라고 이렇게 야단스러운 행사를 준비해 주셨는지. 학교와 학생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짝짝짝짝-

박수 소리에 고훈이 눈을 움찔했다.

“오해가 있어서 그것부터 풀고자 이렇게 자리했습니다. 오늘 이후 작품활동을 재개한다는 기사를 접했는데, 그간 외부 활동을 하지 않았을 뿐 그림은 꾸준히 그려 왔습니다.”

카메라 셔터 소리가 간간이 이어지는 도중에 고수열은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러다 보니 교육자로 활동했기에 작품활동을 그만두었단 오해가 생긴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대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한 시간 또한 소중한 시간이니 작품활동에 지장을 주었단 추측은 자제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고수열의 목소리에 잠에서 깬 고훈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상황을 파악했다.

“퇴임하면 무슨 일을 할 거냐는 질문도 많이 받았는데. 그림 그리는 일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그걸 보이고 보이지 않은 문제뿐이죠. 다만 크게 변한 일이 있는데, 이 녀석입니다.”

한숨 자고 일어나 정신을 차린 고훈이 창피해하며 할아버지에게서 떨어지려 했다.

고수열이 슬며시 손자를 내려주곤 머리를 쓰다듬었다.

“훈이랑 같이 그림 그리고. 좋은 곳에 여행도 다니고. 미술관도 돌아보며 살 생각입니다. 아주 즐거울 거예요. 그렇지?”

할아버지의 질문에 고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이 작게 웃자 얼굴을 붉히며 단상을 내려가 맨 앞 줄 빈 좌석에 앉았다.

“그리고 저와 훈이가 지켜볼 미술은 여러분이 쌓아갈 역사입니다. 여러분이 마네, 모네, 반 고흐, 고갱, 클림트, 피카소를 보며 화가의 꿈을 키웠듯이. 훈이가 또 그보다 어린 친구들이 여러분을 보고 꿈과 용기를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 같은 노인은 이제 물러나고요.”

“싫어요!”

한 학생의 진솔한 외침에 사람들이 웃기 시작했다.

“맞아요! 아직 젊으시잖아요! 벌써 물러나시면 어떡해요!”

“훈이한테 꿈을 심어주라니 마지막 과제 너무 어려운 거 아니에요?”

“훈이한테 저희 좀 도와달라고 해주세요!”

“은퇴하시면 울 거예요!”

“요즘 교수님 나이시면 노인정에서도 안 받아줘요!”

제자들의 말들이 고수열의 가슴과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 * *

1)국립 현대 미술관: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MMCA).

2)위스키 봉봉

3)“네 이웃이 네 곁에서 안연히 살거든 그를 모해하지 말며”(잠3:29)

“지혜 없는 자는 그 이웃을 멸시하나 명철한 자는 잠잠하느니라.”(잠11:12)

4)보리나주 탄광에서 무보수로 인하던 반 고흐는 시찰관에게 전도사로서 부적합하다는 평가를 받고 해고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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