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148화
33. 해송(4)
2028년 8월 3일. 오후 5시.
고수열 한국대학교 미술대학 학장의 정년 퇴임식을 맞이해 여러 이가 용산 WH시네마를 찾았다.
교육계, 예술계 유명 인사는 물론 정‧재계 거물들의 면면을 심심치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그런 만큼 언론 또한 큰 관심을 보이는지라 취재 경쟁이 치열했다.
기자들 사이를 비집고 인터뷰를 시도하던 대한일보 이인호가 몸싸움에 밀려 나오고 말았다.
미술계 취재에 나선 지 1년뿐이나 이렇게까지 과열된 상황은 처음이었다.
“미치겠네.”
“김형우 작가님! 김형우 작가님!”
한숨을 푹 내쉬던 중 이인호의 귀에 유독 한 사람의 목소리가 꽂혔다.
월간지 예화의 김지우가 기자들 틈바구니에서 목이 터져라 김형우 작가를 불러대고 있었다.
그러나 가까이 있는 이들과 몇 마디 나눌 뿐, 김형우에게 목소리가 전달되지 않은 듯했다.
김지우는 떠나가는 김형우의 뒷모습을 보고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리처드 필립스다!”
그러다 누군가의 외침에 고개를 번쩍 들고 또다시 소리쳤다.
“필립스 씨! 고수열 화백에 대해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열정적이라 이인호는 잠시 그녀를 지켜보았다.
“어떻게 만나게 되셨나요! 고수열 화백의 최근 화풍에 관해서 접하신 바 있으신가요! 헤드폰은 계속 안 접히게 만드실 건가요?”
평범한 체구에서 어떻게 저런 힘이 나오는지 결국 파인애플사의 수석 제품 디자이너 리처드 필립스가 고개를 돌렸다.
“수열의 작품은 오랫동안 봐 왔습니다만 최근 몇 년은 그러지 못했네요. 내일 전시회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김지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필립스 씨께도 비밀로 했다면 어마어마한 대작을 작업하고 있었을까요?”
“하하. 그건 모르는 일이죠.”
리처드 필립스가 씩 웃고는 돌아섰다.
“유출되었다고 알려진 새 플래그십 스마트폰 사진 보신 적 있으신가요? 실제와 차이점이 있습니까? 새 에이폰 출시는 언제인가요!”
김지우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질문을 쏟아냈다.
그러다가도 다른 사람이 눈에 띄면 곧장 다른 질문을 꺼냈다.
“이사장님! 마틴 얀센 이사장님! 반 고흐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신다는 루머가 사실인가요?”
이인호 기자뿐만 아니라 주변에서도 김지우의 기세에 질려 조금씩 자리를 비키고 있었다.
반 고흐 재단 이사장 마틴 얀센이 김지우의 질문에 답했다.
“루머가 아니에요. 빈센트 반 고흐를 기리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정말요?”
김지우는 마틴 얀센의 대답을 진심으로 반겼다.
그 반가운 마음이 표정과 억양에 그대로 반영되어 마틴 얀센의 기분도 좋아졌다.
“그동안 소문만 무성했는데 이번에 결정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요? 투자금 문제였나요?”
“제작비는 문제가 될 수 없죠. 오랜 세월 준비한 일입니다.”
마틴 얀센이 자부심을 보이기 위해 고개를 굳게 끄덕였다.
“그럼 불후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러빙 빈센트와 차별점은 무엇인가요?”1)
“그의 죽음을 궁금해하는 사람은 많지만 정작 그의 삶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적죠.”2)
마틴 얀센이 영화 <러빙 빈센트>의 대사를 인용하여 대답했다.
자신이 준비하는 다큐멘터리가 11년 전 영화가 말하고 싶었던 바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뜻이었다.
“우리 재단은 반 고흐 연구소와 오랜 세월 협력하여 새로운 평전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다큐멘터리는 그것을 영상화하는 일이죠.”
“언제 볼 수 있을까요?”
“내년 이맘때 정도면 영화관에서 볼 수 있을 겁니다.”
김지우가 주먹을 쥐고 몸을 들썩였다.
반 고흐 재단과 반 고흐 연구소에서 준비한다는 평전과 다큐멘터리가 기대되어 어쩔 줄 몰라 했다.
이인호 기자가 슬쩍 다가갔다.
“대단하시네요.”
“아. 대한일보.”
김지우가 검지를 들고 고민에 빠졌다. 고훈 관련 기사를 집중적으로 내기에 잘 알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이인호입니다.”
“아하하. 맞다. 죄송해요. 깜빡했어요.”
이인호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열심히 하시더니 결국 기사 하나 건지셨네요.”
“그렇죠. 그보다 궁금하지 않으세요? 내년까지 어떻게 기다리나 몰라.”
큰 화제를 일으킬 소식은 아니었지만, 수요가 있는 기삿거리였다. 보통은 오늘 한 건 올린 데 만족할 텐데 김지우는 그보다 반 고흐 다큐멘터리에 관심이 있는 듯했다.
“들어보니 특별히 새로운 이야기는 없을 것 같던데. 제가 모르는 일이 있나요?”
“글쎄요?”
이렇게나 좋아하니 본인이 모르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거라 추측하던 이인호가 당황했다.
“그럼 왜…….”
“그냥 잊히지 않고 계속 말이 나오는 게 좋잖아요?”
김지우는 본인이 좋아하는 화가가 꾸준히 언급되고 회자되는 상황이 즐거울 뿐이었다.
도리어 이인호가 무엇을 묻고 싶은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순간 그녀의 눈에 휘황찬란한 차림으로 주변 사람들을 벌레 보듯 오시하는 키 큰 프랑스인이 들어왔다.
“앙리! 마르소 씨! 한국어 공부하고 계신가요? 훈이 방송 매일 보시던데!”
* * *
“고생하셨습니다. 내일 전시회도 꼭 들르겠습니다.”
“바쁘실 텐데.”
“그렇다고 빠질 수가 있나요. 기대하고 있습니다.”
퇴임식에 앞서 먼저 온 사람들을 위해 다과회가 이뤄지고 있다.
할아버지는 찾아온 손님들을 맞이하느라 정신이 없으시다.
행사를 너무 크게 한다고 투덜대시더니 은근히 좋아하신다. 만나는 사람마다 웃으며 반기신다.
오랜만에 옛사람과 만나니 즐거우신 듯.
보기 좋다.
장미래와 방태호도 여러 사람과 인사를 나누고 있어서 덕분에 눈치 안 보고 디저트를 먹을 수 있다.
점심도 그렇고 오늘은 배가 찢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먹어야겠다.
“합.”
이 초콜릿 케이크는 몹시 놀랍다.
부드러운 휘핑크림과 푹신한 빵을 겹겹이 쌓아두곤 사이마다 신선한 체리를 가득 넣어두었다.3)
위에는 초콜릿을 갈아서 뿌려 둔 덕에 씹을 때마다 식감이 달라진다.
농밀한 초콜릿 향과 체리의 상큼함도 멋지지만 이와 혀, 잇몸 전체로 즐길 수 있는 식감 자체가 재밌다.
케이크를 초콜릿으로 만드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하거늘 어떻게 생크림과 체리를 넣을 생각을 했을까.
한 조각 더 먹고 싶지만 아직 맛보지 않은 디저트가 많다.
“이건 뭐지.”
와인잔처럼 둥근 유리잔에 여러 음식이 층을 이루고 있다.
아래에는 과육이 보이고 그 위에는 크림, 다시 다른 과일과 크림을 얹어 두었다.
맨 위에는 딸기와 블루베리가 있다.
작은 숟가락이 함께 있어서 떠먹어 보니 과일과 함께 눅진한 커스터드 크림이 입안을 유린한다.
조금 더 깊이 떠먹으니 이번에는 귤 잼과 커스터드 크림이 조화를 이룬다.
이 디저트를 만든 사람보다 노란색과 하얀색을 멋진 비율로 섞는 화가는 없을 것이다.
“안 다냐?”
앙리 마르소가 눈썹을 모으곤 물었다.
“혀가 녹을 것 같아요.”
“그런데 왜 먹어.”
“녹을 것 같으니까.”
층별로 다른 맛을 느낄 수 있으니 맨 아래는 어떤 맛일지 궁금하다.
숟가락을 깊이 넣었다.
‘케이크구나.’
이번에는 익숙한 신맛과 함께 푹신한 빵과 함께 커스터드 크림을 즐길 수 있다.
케이크와 크림, 잼, 과일 모두 명확히 아는 맛인데, 단 하나 이 신맛은 대체 무엇인지 모르겠다.
분명 어디서 많이 먹어본 맛인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머니가 사 주셨나?’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어디서 먹어본 맛인지 알 수 없다.
익숙한 만큼 몇 번 더 먹어보면 기억이 날 것이다.
“야, 그만 먹어.”
“맛있어요. 마르소도 먹어요.”
다 먹고 하나를 더 먹으려고 하자 앙리 마르소가 말렸다.
“이런 데서 하는 음식을 먹으라고?”
“맛있다니까요.”
디저트가 든 유리잔과 수저를 챙겨주니 오만상을 찡그린다.
“먹어 봐요.”
마지못해 한입 먹으니 슬쩍 인상을 푼다.
“맛있죠?”
“나쁘진 않네.”
“무슨 이름인지 알면 나중에도 먹을 텐데.”
“트라이플.”4)
“……이게요? 영국?”
“그래. 영국인이 만들었다고 하기엔 안 믿기지.”
마르소가 처참한 영국 음식 중에 그나마 먹을 만한 디저트라는 말을 덧붙였다.
내가 알던 트라이플과 다르지만 맛있으면 되었다.
원래 집마다 만드는 방법이 다른 음식이기도 하고 시간도 많이 흘렀으니까.
“미셸 바빠 보이네요. 합.”
“일하는 중이야.”
“내일까지 있다가 간다고요? 합.”
“그래. ……하나 더 줘봐.”
마르소도 이 트라이플의 맛에 홀린 모양이다.
내 것도 하나 더 챙기려고 하는데 묘하게 몸이 한쪽으로 기우는 것 같다.
딸기가 들어간 게 맛있을까 아니면 초콜릿이 더 맛있을까 고민하던 중 누군가 사람을 잔뜩 대동하고 할아버지에게 다가갔다.
할아버지처럼 근육질은 아니지만 체구가 제법 있는 노인이다.
“고 학장, 축하하네.”
“최영수. 자네도 오셨구만.”
할아버지 얼굴이 조금 굳었다.
누군가 했더니 대한예술협회장 이름이 최영수였던 것 같다.
예전에 국전이라는 대회에서 부정을 저질렀다고 들었는데, 지금도 협회장 자리에 있어서 기억하고 있었다.
‘……역시 초콜릿이 좋겠지.’
딸기와 블루베리는 먹어봤으니 이번에는 초콜릿이 좋겠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잘 지내셨죠?”
함께한 젊은 여자도 인사했다.
“……그래. 너도 잘 지냈지?”
“그럼요. 저번 전시회 때 와주셨으면 했는데. 바쁘셨던가 봐요.”
“일이 있었다. 서운했나 보구나.”
“서운하긴요. 훈이랑 여행하신 거 다 알고 있는데. 훈이는 안 왔나 봐요?”
만난 적도 없는데 왜 아는 척을 하는지 모르겠다.
최영수도 그렇고 저 여자도 그렇고 할아버지를 대하는 태도가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딱히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거부감에 몸이 달아오른다.
“와 있지. 마르소랑 같이 있을 게다.”
“앙리 마르소요?”
“그래.”
“선생님, 상일 선배 조금 늦는다고 연락왔…… 어요.”
장미래가 다가오자 분위기가 더 이상해졌다.
최영수와 함께 온 사람들이 장미래를 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장미래 또한 그들을 곱게 보지 않는다.
“오랜만이네?”
여자가 장미래에게 아는 척했다.
인제 보니 아마 저 사람이 최영수 협회장의 딸로, 장미래와 함께 참가한 대회에서 대상을 탄 사람 같다.
“…….”
장미래가 그녀를 노려본다.
“그렇게 보지 마. 좋은 날이잖아.”
여자가 눈을 슬며시 뜨며 미소 지었다. 장미래를 때와 장소 구분도 못 하는 사람처럼 대한다.
“아. 규서구나. 몰라봤어.”
“……뭐?”
“너무 예뻐졌다. 눈 어디서 했어?”
조금 재밌어질 것 같다.
트라이플을 먹으며 구경하고 있으니 딸꾹질이 나왔다.
* * *
1)러빙 빈센트, 도로타 코비엘라‧휴 웰치먼, 2017
2)영화 러빙 빈센트 중 마르게리트가 아르망에게 하는 대사 인용.
“그의 죽음에 대해 그렇게도 궁금해하면서 그의 삶에 대해선 얼마나 아느냐.”
3)슈바르츠밸더 키르시토르테(Schwarzwälder kirschtorte).
초콜릿 스폰지 케이크 층 사이에 생크림과 체리를 채운 독일식 케이크
4)잉글랜드 전통 디저트.
와인에 적신 스폰지, 커스터드 케이크, 휘핑크림, 젤리, 과일 등을 층을 쌓아 올려 만든다.
기록상으로는 16세기에 이미 소개되고 있으며 18세기 무렵에는 육류를 사용하기도 했다고.
영국에 잠시 거주했던 빈센트 반 고흐가 트라이플을 접했을지는 확실치 않으나 현대의 트라이플은 당시 영국인들이 즐겨 먹던 것과 차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