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147화
33. 해송(3)
아르센이 전화기를 꺼내자 고훈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무리하지 말아요.”
“아까부터 자꾸 헛소리하는데. 나 앙리 마르소야. 내가.”
“심사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고훈이 앙리의 말을 가로막았다.
“심사관이 못 된다는 말도 아니고. 그냥 그림 이야기 나누고 싶다는 말이에요.”
소년은 앙리 마르소가 또다시 괜한 고집을 부려 무리하길 바라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좋게 끝났지만 뉴욕에서 사인회를 할 때처럼 몸을 혹사하지 않길 바랐다.
“무리하지 말라는 말도 사정이 있는데 굳이 시간 쪼개서 심사 맡지 말란 뜻이었어요.”
고훈이 어깨를 으쓱였다.
앙리 마르소가 고훈을 노려보던 중 아르센이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할까요?”
앙리가 손을 휘저어 그만두라는 신호를 보내자 고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그가 심사를 맡지 않더라도 앙리 마르소와는 작품 이야기를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마르소도 작품 보여주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해요. 전화도 괜찮고.”
방송에서 자기 말은 조금도 안 듣던 고훈이 언제든지 전화하라고 하니 기가 찼다.
간절히 빌어도 시원치 않을 일을 선심 쓰는 척 권하니 배알이 꼬였다.
“웃기지 마.”
“싫어요?”
“당연하지!”
“난 마르소랑 작품 이야기 많이 하고 싶은데.”
앙리 마르소가 눈을 부릅뜨고 이를 갈았다.
지금껏 그렇게 호의를 베풀었음에도 자존심을 긁던 녀석이 인제 와서 작품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하니 황당할 뿐이었다.
“그런데 정말 왜 안 해요?”
“뭘.”
“심사요.”
“내가 하든 말든 뭔 상관이야?”
“마르소가 한다고 하면 화제도 될 텐데. 작가들도 거부감 덜하고.”
“아부하지 마.”
앙리 마르소는 고훈마저 다른 이들과 같이 아부하길 바라지 않았다.
“역시 인성이 문제인 거죠?”
“이 꼬맹이가 아까부터 인성, 인성! 내 인성이 뭐가 어때서!”
“궁금해서 묻는데 닥치라고 하질 않나. 기껏 솔직하게 말했더니 아부한다고 하질 않나. 성격 문제라는 생각밖에 더 들어요?”
고훈이 한마디도 지지 않자 앙리 마르소의 얄팍한 인내심이 한계를 보였다.
“너 미쳤어? 날 이렇게 대하고 무사할 것 같아?”
“안 미쳤대요.”
“……뭐?”
“할아버지랑 정신과 가서 검사받았어요. 정상이래요.”
“뭔 말이야?”
“안 미쳤다고요.”
고훈의 태연한 태도에 앙리 마르소는 기가 막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숨을 들이마실 뿐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지금 그 말 하는 게 아니잖아!”
“흥분하지 말고 좀 차분히 얘기해 봐요. 이야기가 자꾸 돌잖아요. 그래서 왜 안 하냐고요.”
“흐흐읍.”
미셸 플라티니의 입술 사이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어머니 셰리 가도와 자신을 제외하고 앙리 마르소가 타인에게 이렇게까지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꼴은 처음이었다.
즐겁게 담소를 나누는 두 사람이 그저 귀여울 뿐이었다.
앙리 마르소가 고개를 저었다.
“말을 말자.”
“난 얘기하고 싶다니까요.”
“싫다고.”
“나 좋다고 귀찮게 굴 땐 언제고.”
“내가 언제!”
“그랬잖아요. 방송할 때마다 들어와서 방해하고.”
“방해는 무슨! 네가 날 신경 쓰기라도 했어?”
“그래서 삐졌어요?”
“킄핰항핳하앟학캏핳!”
두 사람의 만담을 듣던 미셸이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앙리가 정색하고 소리를 질렀다.
“뭐가 웃겨!”
“으흐응? 으흫흫흑흑흫.”
미셸은 그가 화를 내는 것마저 웃겼다. 얼굴을 보니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잠시 후.
식사가 준비되고 나서야 진정한 미셸이 고훈에게 물었다.
“마르소 작가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맞아요.”
앙리가 헛기침하여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지만 두 사람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왜 생각이 달라졌어?”
고훈이 시간을 두고 고민했다.
“여러 일이 있지만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미셸이 눈을 빛내며 관심을 보였고 앙리는 귀를 쫑긋거렸다.
“프랑스 국립 예술 협회요. 어려운 예술가들 돕는다면서요?”
“그렇지?”
“그 예산을 마르소가 대고 있다고 들었어요. 멋지더라고요.”
고훈에게 프랑스 국립 예술 협회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 단체였다.
고티에, 들라크루아, 마네 등이 1861년에 창설한 프랑스 국립 예술 협회는 당시 미술계를 쥐고 흔들던 왕립 미술원에 반발하여 설립되었다.
19세기 미술계 주류에게 혹독한 평가를 받고 이내 외면당했던 그에게 프랑스 국립 예술 협회는 희망이었다.
언젠가는 미술계에도 변혁이 일어나리란 믿음.
일찍이 빈센트 반 고흐라는 이름으로 살았던 화가는 선배들이 보여준 용기에 힘입어 작품활동을 이어나갔었다.
없어진 줄 알았던 그곳이 샤반, 듀란, 로댕에 의해 다시 설립되고 지금은 앙리 마르소를 필두로 운영되고 있다고 하니.
고결한 정신을 이어온 그들 모두에게 경의를 표할 뿐이었다.
“저도 언젠가 돈 많이 벌어서 그런 공동체를 이루고 싶어요. 마르소처럼 어려운 사람들 도우면서.”
미셸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앙리를 좋게 봐주니 연인 관계를 떠나, 예술가 앙리 마르소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기쁘기 그지없었다.
“뭔 소리야.”
앙리가 나섰다.
“난 자원봉사자가 아니야. 돕긴 누굴 도와?”
“노블레스 오블리주 아니었어요?”
“그런 취미 없어.”
고훈이 눈을 깜빡이다가 미셸에게 물었다.
“이것도 부끄러워하는 거예요?”
미셸이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저었다.
“협회가 지들 멋대로 구는 게 마음에 안 들었을 뿐이야.”
앙리 마르소의 설명에 생략이 많았기에 아르센이 나섰다.
“이전 협회 구성원들에게 문제가 많았습니다. 공모전을 조작하여 국가 예산을 독식한다거나 협회 소속 예술가들에게만 국립 박물관 사용권을 주는 식으로 말이죠.”
고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르소 미술관 전시품을 확보하기 위해 무명 화가의 작품을 사들이는 것과 같이 결과적으로는 좋은 이야기였다.
“작가님에게도 루브르에서 전시하고 싶으면 협회에 가입하라고 강요했죠.”
“그래서 들어간 거예요?”
“그래서 먹었지. 건방진 놈들.”
아르센은 앙리 마르소가 그의 자존심을 건든 인간들을 어떻게 쫓아냈는지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그들의 비참한 말로를 전하기에 고훈은 너무 어리다고 판단했다.
고훈도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대신 앙리 마르소에게 확인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다시금 언급했다.
“작품은 자유롭게 만들면 된다지만 심사위원이 정해지지 않은 걸로 이야기가 많더라고요.”
앙리 마르소가 눈썹을 찌푸렸다.
그나마 보는 눈이 있는 이들로 구성하고 있으나 백 명을 채우기가 쉽지 않았다.
“백 명이요?”
고훈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공정한 평가를 위한 장치야.”
미셸이 설명했다.
앙리 마르소는 2024년 프랑스 국립 예술 협회를 장악하며 관련 사업을 대대적으로 개혁해 왔는데, 공모전 심사 방식도 그 일환이었다.
특정 인물에게 힘이 쏠리는 것을 방지하고, 객관적일 수 없는 심사위원단의 숫자를 늘려 주관의 보편성을 확보하고자 함이었다.
설명을 듣던 고훈이 한 가지 의문을 가졌다.
“많긴 한데. 그래도 백 명 정도는 모을 수 있지 않아요?”
“쓸만한 인간은 다 죽었어.”
“왜요?”
고훈이 크게 놀랐다.
“늙어 죽었다고.”
“…….”
“남은 놈들은 머저리뿐이야. 작가랍시고 개떡 같은 걸 내놓는 놈들이나 그저 유명하면 손뼉 치는 놈들이나.”
할아버지를 제외하고서도 장미래, 앙리 마르소, 페르디난도 곤잘레스, 백동준처럼 뛰어난 작가들을 여럿 접한 고훈은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었다.
“멋진 작품 만드는 사람도 많잖아요.”
“고수열 경이 네게 그런 것만 보여줬나 보지.”
앙리 마르소가 냉소적으로 반응했다.
“네 말대로 머저리들만 있진 않아. 평단도 마찬가지고. 문제는 99명의 쓰레기 중에서 찾아야 한다는 거야.”
“…….”
고훈이 고민에 잠겼다.
확실히 지금까지 접한 미술은 나라에서 운영하는 박물관에 전시된 걸작이나 휘트니 비엔날레처럼 권위 있는 축제에서 엄선된 작품뿐이었다.
할아버지와 이모가 걱정하던 바를 떠올린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마르소 작가가 너무 편향적으로 봐서 그렇지 뜻 있는 젊은 작가도 있어. 평론가도. 다만 일정에 맞는 사람을 찾기 어려운 거지.”
미셸이 덧붙여 설명했다.
“정리하면 심사 과정에서 생길 문제를 심사원 숫자를 늘려서 해결하려는데 그만한 인원을 구하기 어렵다는 뜻이죠?”
“그래.”
앙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투표로 하는 게 어때요?”
고훈의 제안에 앙리 마르소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뭔 소리야.”
“어차피 미술 애호가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일이잖아요. 그분들에게 선택하라는 게 낫지 않아요? 그런 방식이면 저도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은데.”
“…….”
“글쎄. 좋은 생각 같지만 협회에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거야. 그것도 그들의 권리거든.”
“아니.”
앙리가 미셸의 말을 막아섰다.
“차라리 그게 낫지.”
그 역시 고훈과 같은 생각이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을 힘들게 찾는 것보단 대중에게 누가 나은지 판단을 맡기는 게 더 큰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백 명의 심사단을 꾸리는 일도 객관적일 수 없는 예술을 주관을 모아서 설득력을 얻자는 취지였으니 숫자가 늘수록 합당했다.
미셸도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오케스트라 대전도 작년에는 팬 투표로 정했지.”
“오케스트라 대전?”1)
“몰라?”
“네.”
“세계 클래식 음악 협회가 4년에 한 번씩 여는 축제인데 작년에 두 번째 열렸거든.”
고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첫 번째 대회 때는 심사위원단하고 팬 투표 비율을 적당히 맞췄는데 작년에는 백 프로 팬 투표로 순위를 정했어. 여론 반응은 더 좋았네.”
유리잔을 톡톡 두드리며 고민하던 앙리 마르소가 손을 뻗었다. 아르센에게서 전화기를 건네받은 그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어디에 전화해?”
“셰바송 영감.”
프랑스 국립 예술 협회장의 이름에 미셸이 깜짝 놀랐다.
“지금 몇 신데 전화를 걸어?”
미셸이 시간을 확인하고 앙리를 말렸다.
서울이 오후 1시가 채 안 되었으니 파리는 꼭두새벽일 터였다.2)
곧 아딜 셰바송 회장의 당황한 목소리가 전화기를 통해 전해졌다.
-으허업? 마르소 군?
“심사단 꾸리는 거 중지해.”
* * *
1)세계 클래식 음악 협회가 4년에 한 번 주최하는 오케스트라 경연 대회.
예선을 통과한 상위 12개 오케스트라가 1년간 각자의 연고지를 순회하며 경합을 벌여 최고의 오케스트라를 가린다.
*<다시 태어난 베토벤>과 <다시 태어난 반 고흐>의 세계관에 있는 범지구적 행사.
2)서울이 오후 1시일 때 파리는 오전 5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