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146화 (101/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146화

33. 해송(2)

할아버지와 장미래가 갑자기 애틋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빨리 끝내고 오면 되지. 같이 가자.”

예상 밖으로 효과가 좋아 내심 당황스럽지만 다행히 큰 걱정을 끼친 것 같지 않다.

뷔페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개기일식 이야기를 나누며 저녁을 마저 먹었다.

“그럼 내일 모시러 갈게요.”

“아니다. 번거롭게 그러지 말고 영화관에서 봐.”

주차장에서 장미래와 헤어지곤 집으로 오니 할아버지가 긴 여행으로 조금 지친 듯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샤워하시는 틈에 짐을 정리하고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유자차를 두 잔 탔다.

향도 좋을뿐더러 설탕이 가득 들어가서 달콤하다.

씻고 나온 할아버지가 캐리어 가방을 찾으신다.

“훈아, 옷 치웠어?”

“세탁기에 넣어놨어요.”

유자차를 건네자 싱긋 웃으셨다.

“뜨거운 물 조심해야 해. 손 덴다.”

할아버지는 꼭 고맙다는 말을 돌려서 말씀하신다.

“그거 드시고 캡슐 들어가서 좀 쉬세요.”

“아니다. 오늘은 할애비랑 같이 자자.”

할아버지가 뜻하지 않은 말을 꺼내셨다.

차시현이 자녀 보호 잠금 장치를 해제해 준 덕분에 요즘에는 뉴튜브에서 드라마나 밥 로스 동영상을 보다가 잠을 청한다.

‘같이 자면 못 보는데.’

일주일간 떨어져 있어서 오랜만에 같이 자고 싶으신가 싶다.

“혼자 있기 무서우면 빨리 말을 하지 그랬어. 그게 뭐 창피하다고. 자, 이불 펴자.”

“…….”

이런 부작용이 생길 줄은 몰랐는데.

어머니, 아버지가 일하는 걸 구경하고 싶거나 늦은 시간에 하는 쇼 프로그램을 보기 위해 즐겨 썼던 방법에 문제가 생겼다.

* * *

앙리 마르소에게 연락하니 이미 한국에 와 있다고 한다.

살롱전 관련해서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다고 하자 점심때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집 앞까지 와 준다고 해서 그러기로 했다.

“할아버지, 저 잠깐 나갔다 올게요.”

“어딜?”

“친구 만나러요.”

“친구? 시현이?”

앙리 마르소를 만나러 간다고 하면 걱정하시겠지만 거짓말하고 싶진 않다.

“앙리 마르소요.”

할아버지가 눈을 깜빡이신다.

“그 녀석하고 마음이 맞나 보구나.”

예전처럼 펄쩍 뛰며 반대하진 않으시고 대신 내 생각을 물어보셨다.

사실 그와 관련한 일만 아니면 항상 내 생각을 존중해 주셨기에 큰 걱정 없다.

아마 할아버지도 내가 숨기는 것 없이 솔직하게 말씀드리니 믿어 주시는 것이리라.

“나쁜 사람은 아닌 거 같아서요. 살롱전 좀 물어보려고요. 프랑스 국립 예술 협회 이사래요.”

“흠.”

할아버지가 고민하시더니 고개를 끄덕이셨다.

“무슨 일 있으면 꼭 전화하고. 어디서 보기로 했어?”

“집 앞 카페에서요.”

“같이 안 가도 되겠어?”

“괜찮아요. 다녀오겠습니다.”

집에서 나와서 3분 정도 걸었다.

할아버지와 가끔 마카롱을 사러 들르는 카페에 이르자 무슨 일인지 조용하던 매장 주변을 험악한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다.

다가가자 문을 열어준다.

“고맙습니다.”

안으로 들어섰다.

카페 주인장은 안 보이고 앙리 마르소와 미셸 플라티니 그리고 아르센뿐이다.

마르소는 상아색 면 바지를 입고 검은색 셔츠를 갈색 벨트가 보이도록 앞부분만 집어넣고 있다.

비싸 보이는 선글라스와 시계는 볼 때마다 달라진다.

“마르소, 미셸. 아르센.”

인사를 건네니 마르소가 고개를 돌리곤 콧방귀를 뀐다.

미셸과 아르센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잘 지냈어?”

“네. 미셸은요?”

“나야 항상 잘 지내지.”

딱히 뽐내는 행동이나 말을 하는 것도 아닌데 항상 당당해 보이는 점이 참 멋지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요?”

“방해받는 건 질색이야.”

앙리 마르소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카페 주인에게 양해를 구한 모양.

미셸과 아르센이 있으니 험악한 방식으로 부탁하진 않았을 거다.

마르소가 아르센에게 눈짓을 주자 젊은 남자가 다가와 메뉴판을 보였다.

이 카페에서 파는 음식도 아니고 가격도 안 적혀 있다.

“이게 뭐예요?”

“점심 식사 메뉴입니다. 바라시는 게 없더라도 요청해 주시면 금방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

황새치 뱃살과 카프리초 염소 치즈 커드, 스모크 토마토. 딱새우 구이, 송로 버섯 소스를 곁들인 돼지고기 등 여러 음식이 적혀 있다.

오늘 밤에 뷔페를 즐길 생각으로 배를 비워둘 생각이었거늘 큰일이다.

할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겨 아침도 먹었는데 점심조차 이런 식이면 뷔페를 맘껏 즐기기 힘들다.

“왜.”

“…….”

“안 먹어?”

“점심 먹고 왔으면 디저트도 있어.”

마르소와 미셸이 날 시험에 들게 한다. 아무래도 저녁까지 운동이라도 해서 소화를 해야겠다.

“메인은 돼지고기로 주세요. 나머지는 추천 부탁드릴게요.”

어떤 음식이 맛있을지 몰라서 메인만 정하고 나머지는 요리사의 선택에 따르기로 했다.

주문을 마치자 마르소가 턱을 치켜들곤 물었다.

“물어볼 게 있다고?”

“살롱전이요. 요강 보니까 심사방식은 심사위원 선발 후 추후 공지라고 나와 있더라고요.”

앙리 마르소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곤 말했다.

“선발 중이야.”

살롱전 특별 전시회가 12월 초니까 공모전은 적어도 11월에 마쳐야 할 터다.

이제 8월인데 너무 늦지 않나 싶다.

인터넷 포럼에서도 이번 프랑스 국립 예술 협회 살롱전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올라오고 있다.

그런 이야기를 꺼내자 미셸이 앙리에게 눈치를 주었다.

“원래 앙리 마르소 작가가 심사위원으로 내정되어 있었는데 거절했거든.”

“마르소 작가?”

연인 사이에 왜 이렇게 거리를 두나 싶다가 눈치를 보니 아르센에게도 비밀인 듯하다.

미셸이 눈을 크게 뜬다.

비밀로 하기로 했으니 굳이 물어보지 않고 화제를 이어나갔다.

“왜 거절했어요?”

“하기 싫으니까.”

참 알기 쉬운 이유다.

“마르소가 하면 다들 신뢰할 텐데. 나도 그렇고요.”

그가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한 번쯤은 그런 데 나가서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긴 한데.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평가받는 일이 유쾌하진 않아요.”

이 모순된 마음은 앙리 마르소도 마찬가지이리라.

아등바등 노력해서 만든 작품을 누군가가 흠잡으면 그것이 설사 정당한 비판이라도 인간인 이상 감정이 상하게 마련이다.

그들의 목소리를 막을 생각도 내게 그럴 권리도 없지만.

평론가들은 자기 기준으로 남을 평하는 일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19세기 때의 경험으로 피해 의식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평론가를 예술가와 대중 사이에서 이간질하는 부류로 여긴다.

나는 그들에게 가르침을 구하지도 않았을뿐더러 그들을 위해 그림을 그리지도 않는다.

나를 평할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작품을 보여주고 싶은 대상뿐.

그 대상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예술가와 대중이다.

“마르소가 심사해 주면 좋겠어요. 저번에 컨셉 아트 감상도 좋았고.”

한 시간 이상 끙끙대며 사진을 찍어 보냈더니 다음날 1만 자가량의 감상문이 돌아와 놀랐었다.

그는 내가 어떤 방식으로 작품을 구상했고 내가 차마 발견하지 못한 점을 알리며 나를 또 한 번 놀라게 했다.

비록 말투는 고압적이었으나 나를 깊이 이해하는 듯해서 만약 누군가가 나를 평한다면 그런 방식이길 바란다.

“……안 돼.”

마르소가 거절했다.

“왜요?”

“안 된다면 안 되는 거야.”

미셸이 재밌는 일이라도 생각났는지 옆에서 쿡쿡 웃는다.

저렇게 웃는 걸 보면 뭔가 말 못 할 사정이라도 있는 모양이다. 앙리 마르소의 자존심이 구겨지는 일이라든가.

“혹시 선발 과정에서 떨어진 거예요?”

“뭐?”

“그렇잖아요. 거절할 이유가 없는데 안 된다고 하니까. 심사위원 되는 과정이 까다롭나 봐요.”

마르소가 입술을 씰룩였다.

* * *

앙리 마르소는 기가 찼다.

살롱전은 물론이거니와 프랑스 국립 예술 협회 자체를 쥐고 흔드는 그로서는 고작 심사위원 선발 과정에서 탈락했냐는 질문이 가소로울 뿐이었다.

“웃기지 마. 내가 못 하는 일 따위 없어.”

“그럼 왜 안 해요?”

고훈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차마 익명으로 참가해 고훈과 경쟁한다고 설명할 수 없었다.

“바빠.”

“뭐 하는데요?”

거짓말에 약한 앙리 마르소는 둘러대지 못하고 인상만 쓸 뿐이었다.

“그것 봐요. 할 일 없으면 그냥 해요. 다른 사람들도 마르소한테 평가받으면 좋아할 거예요. 저번에 보내준 거 도움이 많이 됐어요.”

고훈은 진심으로 앙리 마르소의 감상과 조언이 고마웠다.

앙리 마르소가 수상 기회를 잡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에게 본인의 지성을 베푼다면 그 또한 아름다운 일이라고 여겼다.

“……어디가.”

앙리의 질문에 고훈이 눈을 깜빡였다.

“어디가 그렇게 좋았냐고.”

“총알을 가로로 그린 구도에서 인물을 위치를 비틀어도 좋았을 거란 말이요. 촬영이 가능할까 싶어서 배제했는데 노먼에게 물어보니 아마 하려고 했으면 어떻게든 가능했을 거라고 하더라고요.”

앙리 마르소가 괜히 헛기침했다.

“그 정도는 누구나 생각할 수 있어.”

“난 몰랐어요.”

“……그것뿐이야?”

“총알이 유리창을 관통하는 구도는 클리셰로 많이 사용되었으니 유리를 거울처럼 쓰라는 발상도 좋았어요.”

고훈은 미처 자신이 생각해내지 못한 점을 접하며, 앙리 마르소가 어떤 과정을 거쳐 작품을 만드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하나의 작품을 두고 두 천재가 대화를 나누며 서로를 이해해나가는 과정은 서로에게 또 다른 영감을 주었다.

“협회 일도 그렇고. 무명 화가 그림 사는 것도 그렇고 결국 미술 하는 사람들 돕는 일이잖아요.”

“그게 무슨 상관이야?”

“심사평도 도움이 될 거예요. 나처럼.”

귀찮은 일이나 고훈의 말대로 나쁘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더욱이 건방진 꼬맹이가 자신을 인정하고 나서니 우쭐해졌다.

“해봐요.”

고훈이 다시 한번 설득하자 앙리 마르소가 문득 정신을 차렸다.

“싫다고 했어.”

그는 이번 공모전을 통해 자신이 고훈보다 우위에 있음을 확인해야만 했다.

고훈이 앙리 마르소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고집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본인도 심사 자체를 나쁘게 생각지 않은 듯한데 거절할 이유가 조금도 없어 보였다.

“역시 떨어진 거죠?”

“아니라고!”

“떨어질 수도 있죠. 뭘 그리 화를 내요. 인성 문제였어요?”

고훈의 인성 발언에 곁에서 지켜보던 미셸 플라티니가 결국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본 고훈은 앙리 마르소가 심사위원에 발탁되지 못했고 자존심 때문에 그 사실을 숨기고 있음을 확신했다.

“그러게 솔직해지면 얼마나 좋아요. 말투만 바꾸면 오해도 안 살 텐데.”

“아니라고 했어!”

“그럼 이유가 뭔데요.”

“네 알 바 아니잖아!”

“심사위원 못 한다고 흠 되지 않아요. 마르소가 대단한 건 다들 알고 있으니까.”

앙리 마르소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돋아났다.

“대신 노력은 해봐요.”

“닥쳐.”

고훈은 표현에 서툰 앙리 마르소를 이해한다는 듯 일어나 그의 어깨를 툭툭 위로했다.

“솔직하게 표현하면 다들 마르소를 좋아하게 될 거예요. 그러면 다음에는 심사뿐만 아니라 다른 일로도 초대받을 테고.”

그 행동이 앙리 마르소를 자극하고 말았다.

“……아르센.”

“네, 작가님.”

“심사 맡는다고 해.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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