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144화
32. 사랑과 용기와 사탕(5)
[현대 미술의 영웅이 지다]
-개념 미술의 대중화를 이뤄-
미국 현대 미술의 상징으로 불리는 페르디난도 곤잘레스가 향년 39세의 일기로 타계했다.
1989년 쿠바에서 태어난 고인은 1994년 모친과 쿠바를 탈출해 미국 플로리다주에 정착했다.
탈출 과정에서 아버지와 동생을 잃은 모자를 반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난민 구호자금이 바닥 난 플로리다주는 곤잘레스 가족에게 어떠한 지원도 하지 못했고 곤잘레스는 어린 시절을 폐차장의 망가진 자동차 속에서 보내야 했다.
2003년 어머니를 잃고 방황하기 시작하여 소매치기로 연명하다가 교도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2006년 추위를 피할 곳을 찾던 페르디난도 곤잘레스는 무료입장이 가능한 휘트니 미술관에 들어서려 하다가 보안직원에 의해 저지당했다.
당시 전시회 일정을 소화하던 고수열 경은 페르디난도 곤잘레스에게도 작품을 관람할 권리가 있다고 변호했다.
고인은 “눈이 내리던 날이었는데 너무 추워서 피할 곳을 찾고 있었어. 미술품? 눈에 들어올 리가. 아마 수열이 따뜻한 코코아를 주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걸”이라고 회고했다.
고수열 경은 페르디난도 곤잘레스가 직장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왔고 곤잘레스는 휘트니 미술관 청소부로 일하며 미술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미술 공부를 전문적으로 받은 적 없는 그는 휘트니 미술관의 작품들을 보며 그림을 그리지 못해도 예술을 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고 2018년 휘트니 미술관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원형 거울 두 개를 나란히 걸어두거나 창문에 커튼을 다는 등 일상의 모습에 의미를 부여하여 평단의 호평을 받았지만 대중의 반응은 냉담했다.
이듬해 휘트니 미술관이 그의 일상을 미니 다큐멘터리로 제작하면서 그의 평가가 달라졌다.
작품 활동에 쓸 돈이 부족하면서도 적은 수입을 나누어 베푸는 그에게 감독이 물었다.
“곤잘레스, 재료비 부족하다고 하지 않았나요?”
“네. 전구 사야 할 돈이었는데.”
“그러면 알고 지내던 사이인가요?”
“아니요.”
“그러면 왜 저 사람에게 돈을 주었습니까?”
“작품은 돈이 없어도 만들 수 있지만 저 사람은 돈이 없으면 굶거든요.”
해당 다큐멘터리에서 곤잘레스는 전구 100개를 사야 할 돈을 노숙자에게 주고, 단 하나의 전구로 이루어진 <무제: 등대>를 발표했다.
그의 선량함에 동조한 이들은 첫 전시회 실패 후 변변한 기회를 잡지 못하던 그를 위해 나섰다.
그렇게 곤잘레스의 두 번째 개인전이 개최된 2019년 겨울은 관계 미학, 개념 미술의 상징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페르디난도 곤잘레스는 살아생전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고 예술은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며, 우리 삶이 거대한 예술이며 우리 각자가 예술의 주체라고 주장했다.
고인의 마지막 작품은 8월 1일부터 전 세계 90개 미술관에서 동시 전시될 예정이다.1)
-아냐 스트레제만(타임즈)
페르디난도 곤잘레스의 사망 소식은 미국을 넘어서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난민 출신으로 미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변변한 교육조차 받지 못한 페르디난도 곤잘레스의 성공담은 21세기판 아메리칸 드림으로 여겨졌다.
유럽에 문화적 열등감을 느끼던 미국인들에게 페르디난도 곤잘레스는 잭슨 폴록, 앤디 워홀, 장 미셸 바스키아, 키스 해링과 같은 미국의 자랑이었다.
7월 27일.
정쟁으로 시끄럽던 미국이 그의 사망일을 맞이해 침묵했다.
* * *
-그래. 할아버지 돌아갈 때까지 이모 말 잘 듣고.
“네. 걱정 마세요.”
전화를 끊기 전 할아버지를 위로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할아버지가 뉴욕에 도착했을 때는 병실을 루이가 있던 곳으로 옮겨서 같이 있었다고 한다.
마지막까지 손을 잡고 있다가 함께 눈을 감았다고 한다.
그가 걸어놓은 두 개의 시계는 동시에 움직이다가 서로 다른 시간을 가리키며 멈췄으나.
곤잘레스와 루이는 서로 달리 태어나 마지막을 함께한 것이다.
적어도 오늘만은 그를 욕되게 하는 사람이 없길 바라며, 그를 추모하는 방송을 보았다.
-페르디난도 곤잘레스는 살아생전 단 한 점의 작품도 판매하지 않았습니다.
미술계 어디서든 그의 이름을 들을 수 있어서 생각지 못했는데, 그도 나처럼 늦은 나이에 미술계에 입문했다고 한다.
고작 10년도 활동하지 못한 점도 그렇고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점이 내 상황과 겹쳐 보이기도 하다.
그는 마지막에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나와 차시현이 만든 <페르디난도와 루이>가 조금의 위로는 되었을까.
할아버지는 상심이 크시겠지.
연달아 밀려든 충격에 가슴이 답답해진다.
현관 열리는 소리가 났다.
“훈아.”
“이모.”
혼자 있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장미래를 보니 슬픔이 밀려든다.
그녀도 마찬가지인 듯. 항상 당당하고 밝은 얼굴에 그늘이 져 있다.
짜장면이 올 때까지 나란히 앉아서 페르디난도 곤잘레스 추모 방송을 보았다.
패널들이 나와 페르디난도 곤잘레스를 앤디 워홀, 키스 해링과 비교하며 설명하고 있다.
미국을 대표하는 예술가 세 명이 동성애자라고 해서 놀랐다.
“신기하지.”
장미래가 무릎을 끌어안은 채 말했다.
“주변에 동성애자가 저렇게 많은가 싶잖아. 숨기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만 저기 소개되는 사람 중에 절반 이상이 동성애자잖아. 어쩌면 더 많을지도 모르고.”
“네.”
예술가 중에 동성애자가 많은 건가 생각하며 장미래의 말에 귀 기울였다.
“리처드 플로리다라는 경제학자가 한 말인데, 동성애자가 많이 모인 곳일수록 번성하더래.”
“……무슨 근거로요?”
생뚱맞은 말이다.
“들어봐.”
장미래가 무릎을 뻗었다.
“동성애는 사회가 허용하는 다양성의 가장 밖에 존재한대. 그래서 동성애자를 받아들이는 지역은 모든 종류의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거야.”2)
이건 그럴듯하다.
동성애를 무리 없이 받아들일 정도면 머리카락 색이나 피부색, 사투리 같은 것도 크게 신경 안 쓸 것 같다.
“그런데 사회가 발달하려면 뛰어난 사람보다 다양한 사람이 있는 게 유리하다는 거야. 유전학적으로도.”
우수한 소수가 아니라 다양한 여럿이 발전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중요한 건 동성애자가 얼마나 많은지가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는 사회가 건강하다는 말이지.”
“…….”
“전에 말했던 자유론하고도 통하는 이야기 아닐까? 난 그렇게 생각해.”
장미래는 각자의 자유가 인정되었을 때 사회가 더 좋은 방향으로 흘러간다고 말한다.
내가 조속의 <숙조도>를 통해 <해바라기>를 그리고, 앙리 마르소가 <손님>을 보고 <그림자>를 그린 것처럼 타인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앞으로 나아간다는 뜻이다.
처음에는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던 페르디난도 곤잘레스의 <무제: 완벽한 연인>이 지금은 내 안에 깊이 자리 잡아 <페르디난도와 루이>를 만든 것도 같은 일이다.
모든 화가는 각자의 방식으로 회화의 역사를 요약한다는 질 들뢰즈의 말이 지금은 동시성을 띠고 있다.
세상은 더 이상 나와 비슷한 사람들만 만나는 좁은 세상이 아니다.
가족은 피로 이어져 있고.
학교는 나이라도 비슷하고.
마을은 사는 지역이라도 같지만 이제는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접할 수 있다.
인간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공통점을 찾을 수 없는 사람과도 간접적으로나마 만날 수 있다.
정말 다양한 사람이 서로를 알게 되는 세상이니 이야말로 동시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페르디난도 곤잘레스가 남긴 메시지가 되도록 널리 그리고 오래 남아 있길 바란다.
-한편 페르디난도 곤잘레스의 작품 전시를 거부했던 에버리치 미술관이 루이 재단을 지원하기로 나서며 미술계의 분열도 막바지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 * *
8월 1일. 프랑스 파리.
무슬림 소년 비다 라바니가 마르소 갤러리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아침에 친구로부터 마르소 갤러리에서 사탕을 가져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눈치를 보고 있었다.
‘정말일까.’
비다 라바니는 친구가 자기를 놀리려고 한 말은 아닐까 걱정했다. 먹을 것을 공짜로 나눠줄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빵과 말간 수프로 끼니를 때우던 소년은 차마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입장하는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갤러리 방문객들은 모두 말끔하게 차려입고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갤러리 내부를 확인할 수 없었던 라바니는 손가락을 꼼지락대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그렇지.’
사탕을 받으려면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저 안으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친구 또한 마찬가지였을 테니 사탕을 받았다는 말은 거짓이 틀림없었다.
“얘.”
라바니가 포기하고 돌아선 순간 미셸 플라티니가 소년을 불러세웠다.
깜짝 놀란 라바니가 뒤돌았다.
“네?”
미셸이 너무나 당황해하는 소년을 보며 싱긋 웃었다.
“들어오려는 거 아니었어?”
“아, 아니요? 그게. 저.”
미셸은 직원으로부터 한 소년이 갤러리 앞에서 눈치를 보고 있단 이야기를 들었다.
30분 이상 갈팡질팡하고 있다고 하여 무슨 일인가 싶어 나와 보니 대충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소년은 여름인데도 두꺼워 보이는 바지를 입고 있었고 그마저도 길이가 맞지 않아 바짓단을 접고 있었다.
“구경하고 가.”
미셸이 상냥히 말했다.
“아, 아니에요. 그게.”
라바니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돌아가지 않으니 미셸은 소년이 갤러리를 구경하고 싶은 거라고 확신했다.
“괜찮아. 구경하는 건 돈 안 들어. 앙리 마르소 좋아해?”
“……좋아하긴 하지만.”
라바니가 우물쭈물거렸다.
미셸은 소년이 편하게 말할 수 있도록 고개를 갸울며 물었다.
“하지만?”
“사탕. ……주시나요?”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였다.
소년이 얼마나 부끄러워하는지 알 수 있었기에 미셸은 미소 지으며 답했다.
“응.”
소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들어가자.”
미셸은 라바니가 마음 편히 사탕을 가져갈 수 있도록 손짓하여 재촉했다.
어쩔 수 없이 갤러리 내부로 들어선 라바니는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주변 눈치를 보았다.
누군가와 눈이라도 마주치며 고개를 숙이기 일쑤였다. 그러면서도 상냥한 어른을 놓칠까 봐 걸음을 재촉했다.
페르디난도 곤잘레스의 <79㎏> 앞으로 안내한 미셸이 뒤돌았다.
“여기서 가지고 가면 돼.”
벽 모서리에 가득 쌓인 사탕을 본 라바니가 눈을 크게 떴다.
아침에 친구가 약 올리며 먹던 그 사탕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라바니는 상냥한 어른과 사탕을 번갈아 보았고 미셸은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였다.
라바니가 조심스레 사탕 하나를 집어들곤 미셸에게 꾸벅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미셸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나한테 고마워할 필요 없어. 페르디난도 곤잘레스란 사람이 주는 거야.”
“페르디난도 곤잘레스…….”
“응.”
미셸이 <79㎏> 옆에 적힌 안내판을 가리켰다. 가져가고 싶은 만큼 마음껏 가져가라는 문구가 페르디난도 곤잘레스의 친필로 적혀 있었다.
“가져가고 싶은 만큼 가져가라는 뜻이야.”
미셸이 영어로 적힌 문구를 알려주었다.
“매일 와도 괜찮으니까 친구들이랑 놀러 와. 온 김에 그림 구경도 하고.”
“정, 정말 그래도 돼요?”
“응.”
미셸이 <79㎏>에서 사탕을 한 줌 가득 쥐어 라바니에게 권했다.
* * *
1)페르디난도 곤잘레스의 모티프가 된 실존 인물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1957~1996)의 삶과는 다름을 밝힙니다.
2)경제학자 리처드 플로리다의 말 인용.
“동성애는 우리 사회에서 다양성의 마지막 전선이고 게이 공동체를 받아들이는 지역은 모든 종류의 사람들을 환영한다.”
리처드 플로리다는 사회의 개방성과 다양성을 측정하기 위해 게이가 밀집해 사는 도시를 순위 매겼다.
그 결과 게이가 많이 거주할수록 첨단산업이 발달해 있다는 결과를 도출했다.
한편 하나의 우수한 유전자가 남은 객체는 환경 변화, 질병에 극도로 취약하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다양한 유전자가 서로 결합해야 환경 변화와 외부 위협에 적응할 수 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