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141화
32. 사랑과 용기와 사탕(2)
다 먹은 수박 접시를 싱크대에 놓고 돌아왔다.
오늘은 종이를 책상에 두고 그릴 생각이라, 그림이 잘 보이도록 캠을 위에다가 설치했다.
이런 일이 제법 많을 것 같은데 내일 방태호에게 캠을 하나 더 사달라고 해야겠다.
“어디까지 나와?”
차시현이 옆에 앉아서 모니터를 확인했다. 자기랑 종이가 나오지 않는 걸 확인한 뒤에야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방송을 켜자 사람들이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한다.
└훈하!
└훈하
└이게 얼마 만이야 방송 주기 좀 제발 ㅠㅠ
└오후 2시에 방송 켜면 사람들 많이 못 봐요.
└얼굴 어디 갔어!
└난 잘 보는데? ☆월급★루팡☆
└미국 여행 재밌었음?
└먹방 채널 아니었나요? 음식은 안 보이고 붓이랑 도화지만 있네요.
“안녕하세요.”
전보다 사람이 좀 줄었는데, 주기적으로 해야 사람들이 많이 볼 수 있을 듯하다.
시간대가 일러서 직장이나 학교 다니는 사람들이 보기 힘든 건 생각 못 했다.
“한번 생각해 볼게요. 언제가 좋겠어요?”
방송을 보기에 가장 편한 시간을 물어보았다.
└7시? 저녁 먹을 때가 젤 좋을 듯.
└24시간 풀방송 해줘요.
└방송 접은 줄 알았는데 또 하네. 돈 떨어졌냐? 돈 벌려고 방송하네.
└10시. 보다가 잠드는 게 최고임.
└아침! 아침!
“7시 괜찮을 것 같아요.”
다른 시간대를 말한 사람들이 불 모양 이모티콘을 마구 올리기 시작한다.
마음에 안 들 때는 꼭 저런다.
열 받는다, 화난다 같은 감정을 저렇게 표현하는 것 같다.
“24시간 내내 어떻게 해요. 그럼 은결 님도 24시간 내내 일해요.”
적어도 밤 10시에는 자기로 할아버지랑 약속했다고 설명하던 중 방태호가 돈 떨어졌냐는 질문을 삭제했다.
“돈 벌려고 방송하냐고 하셨는데. 일은 돈 벌려고 하는 거죠.”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자 채팅창이 소란스러워졌다.
└ㄹㅇㅋㅋ
└아 그럼 돈 벌려고 하지.
└애한테 못 하는 말이 없네.
└tu dis quoi? en français!1)
└돈은 인정이지
└꼭 백수 새끼가 방구석에 처박혀서 저런 말 하더라. 훈이 말대로 일을 돈 벌려고 하지 수입 없으면 그게 봉사지 일이야?
└ㄹㅇ 돈 못 벌면 방송 왜 함ㅋㅋ
└훈이가 돈 없어서 방송하진 않을 텐데. <서리 밀밭> 판 돈만 100억 이상인데.
└나갔엌ㅋㅋㅋ
“돈 많긴 해요.”
솔직하게 말하자 사람들이 ‘ㅠ’를 반복해 쓴다.
“마르소처럼 갤러리도 짓고. 또 마르소처럼 어렵게 사는 사람들 도와주고 싶어요. 마음 맞는 사람들이랑 같이 그림 그리면서 살고 싶고. 그러니까 더 많이 벌 거예요.”
└[백유진 님이 1,000원 후원하셨습니다]: 미아내 누나가 거지라서 이것밖에 못 줘 ㅠ
“그런데 왜 돈을 줘요. 태호 아저씨, 이거 어떻게 돌려드려요?”
방송을 보고 있을 방태호에게 묻자 사람들이 키읔을 연달아 올렸다. 옆에 있던 차시현도 웃었다.
“왜 웃어?”
“정말 그래서 말씀하신 거 아니잖아.”
“거, 아니, 돈 없다고 하시잖아. 가난하다고 말하는 거 보통 용기로 할 수 있는 말 아니야.”
차시현은 아직 가난이 얼마나 사람을 비참하게 하는지 모르기에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거다.
채팅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야 ㅠ 나 거지 아니야 ㅠ
└시청자 순식간에 천 원도 없는 거지 만들깈ㅋㅋㅋㅋㅋ
└방송으로 돈 벌긴 그른 듯.
└Ou en anglais.2)
└방금 거지라고 하려고 했엌ㅋㅋ
└제육덮밥 먹고 싶다.
└돈 벌려면 더 달라고 해야지!
└옆에 누구 있음?
“정말인 줄 알았잖아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후원 안 해주셔도 돼요. 이거 뉴튜브 올리면 그걸로도 돈 번대요.”
“많이 봐야 할걸?”
“많이 봐주세요.”
앙리 마르소가 자꾸 방송을 불어나 영어로 하라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보는데 왜 자꾸 불어로 하라고 해요. 내 방송 보는 사람이 마르소뿐이에요?”
└무슨 말이지?
└불어 아님?
└앙리 또 왔나 보넼ㅋㅋㅋ
└앙리가 방송 불어로 하라고 해서 훈이 화났음ㅋㅋㅋㅋㅋㅋ
└한국어 배우면 되겠넼ㅋㅋㅋ
└근데 영어로 하는 게 시청자는 더 많아질 듯. 뉴튜브에 자막도 다세요.
“영어로 하는 게 나아요?”
“영어 쓰는 사람 많으니까 그게 더 좋지 않을까?”
시청자들이 이응과 니은을 번갈아 올리던 중에 차시현이 답했다.
확실히 우리나라 말보다는 더 많은 사람이 사용하겠지만, 내 방송을 보는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인이다.
“다 영어 할 줄 알아요?”
확인차 물어보니 ‘그건 좀’, ‘그림 공부하는 것도 모자라서 이제 영어까지 배우게 생겼네’ 같은 부정적인 답변이 올라온다.
뉴튜브에 올릴 영상은 영어 자막을 달든, 나중에 따로 촬영해야겠다.
“모르는 사람 많아요. 방송 보고 싶으면 나중에 영상으로 보든가 한국어 배워요.”
└마르소한테 왜 그렇게 차가웤ㅋㅋㅋㅋ
└뭐래? 뭐라고 했는데?
└방송 보고 싶으면 한국어 배우랰ㅋㅋㅋㅋ
└제육덮밥 먹고 싶다.
└원래 다른 나라 사람 덕질하는 게 젤 빡셈.
앙리 마르소가 전화를 걸었지만 또 이야기가 산으로 흐를 것 같아서 방송 끝나면 전화한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은 수채화 그릴 거예요. 옆에 누구 있냐고 물어보셨는데, 학교 친구예요.”
“친구예요.”
차시현도 따라 답했다. 채팅창에서 목소리가 귀엽다 같은 말이 올라오자 웃는다.
“저도 얘도 잘 몰라서 오늘은 강의는 아니에요. 우선 물감은 이렇게 짜두었고. 좀 다른 시도를 해보려고 해요.”
평붓에 물을 묻힌 뒤 수채화지에 고루 발랐다.
“수채화는 자연스럽게 번지는 게 예쁘더라고요. 이렇게 물을 먼저 바르고 물감을 바르면 자연스럽게 돼요.”
노란색을 덜어내서 물을 섞어 콕 찍었다. 작은 노란색이 은은하게 번져나간다.
채팅창을 보니 뭐 그리는 거냐는 질문이 많다.
“사랑이요.”
차시현이 이상하게 본다.
“왜?”
“사랑을 어떻게 그려?”
“해보려고.”
차시현의 얼굴과 채팅창에 물음표가 가득하다. 하트를 그리는 거냐, 연인을 그리는 거냐 같은 말도 가끔 올라온다.
노란색 점을 몇 개 더 찍으며 물었다.
“혹시 8월부터 WH배움 미술관에서 페르디난도 곤잘레스 작품 전시하는 거 아세요?”
미술에 관심 있는 사람들인지라 아는 사람이 많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 절반이다.
“꼭 한번 가보세요. 정말 멋진 작품 만드는 사람이에요.”
“아, 휘트니 비엔날레에서 시계 건 분이지?”
“응.”
대답하면서 차시현이 어떻게 그리는지 확인했다. 나를 따라서 젖은 종이에 점을 콕콕 찍는다.
└무슨 작품이지?
└페르디난도 그 사람 요즘 미국에서 말 많던데.
└너 왜 공모전 나가.
└왜?
└커밍아웃하면서 작품 못 받는다는 미술관이 좀 있었음. 차별한다고 표현의 자유 막는다고 막 싸우던데.
└네가 공모전 나가면 다른 사람이 상을 못 받잖아!
└헐. 요즘도 그런 일 있음?
└근데 미술관이 전시하기 싫다고 하는 것도 걔들 자유 아닌가?
내 방송을 보는 사람들도 이렇게 의견이 분분한데, 미국은 어떠할지 뻔하다.
그래도 다들 점잖게 대화해서 보기 좋다.
“내가 상 받는단 보장은 없잖아요. 멋진 화가가 얼마나 많은데.”
앙리 마르소는 나를 너무 과하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할아버지나 장미래, 앙리 마르소처럼 잘 그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무엇을 믿고 내가 상을 받는다고 확신하는지 모를 일이다.
못 알아듣는 시청자들도 있어서 상황을 설명하니까 다들 말린다.
└앙리가 맞는 말 했넼ㅋㅋㅋ
└우리 훈이가 상 안 받으면 누가 받아!
└무슨 말이야?
└앙리 마르소가 훈이 살롱전 특별 전시회 참가할 수 있도록 했는데, 훈이가 굳이 공모전 참가하기로 했대. 공모전에서 수상해서 특별 전시회 한다고.
└쉬운 길 두고 왜 돌아서 감?
다들 오해하고 있다.
“마르소한테 의지하기 싫었어요. 지금까지 제가 발표한 그림 대부분 마르소가 샀잖아요. 전시회까지 그러고 싶진 않아요. 그리고 상 받을 거라고 어떻게 확신해요.”
지금까지 상이라는 것을 받아본 적 없다.
지금 내가 작은 명성을 얻긴 했지만 이 시대에는 정말 뛰어난 화가들이 즐비해 있다.
굳이 할아버지, 장미래, 앙리 마르소뿐만 아니더라도 한국대 미대생만 해도 정말 멋진 그림을 그린다.
내가 공정한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으리란 보장은 누구도 할 수 없다.
그런 생각을 전하니 채팅창에 ‘기만자’라는 말이 올라왔다.
조금 억울하다.
사용하던 물감에 물을 더하지 않고 물감만 추가해서 점을 찍기 시작했다.
촘촘한 점들이 번지며 자연스럽게 그라데이션을 이룬다.
조금씩 형태를 잡고자 원을 이루도록 했다. 중간에서 조금 위를 가장 옅게 하고 바깥으로 나갈수록 농도를 짙게 하여 구(球)를 그려나갔다.
차시현이 고개를 갸웃한다.
“이게 뭐야?”
“기다려 봐.”
물감이 조금 말라야 해서 채팅창을 확인했다.
└????
└저게 뭐지.
└구슬 같다.
└[쭝쭝 님이 10,000원 후원하셨습니다]: 노래 불러주세요.
└감도 안 잡히넼ㅋㅋㅋ
└레몬 사탕 아님?
“쭝쭝 님 감사합니다.”
저번에 시험을 망쳤다고 하소연했던 사람이다.
“저 아는 노래 많이 없는데.”
“상어 가족 알잖아.”
“그건 안 돼.”
차시현이 쓸데없는 말을 해서 채팅창에 상어 가족 동요를 불러 달라는 말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뉴튜브에서 검색하면 들을 수 있다고 해도 내가 부르는 걸 듣고 싶다고 난리다.
“…….”
창피하다.
└돈이 부족한 듯.
└부끄러워한닼ㅋㅋㅋㅋㅋㅋ
└그만 괴롭혀 이놈들아!ㅋㅋㅋ
└[장 프랑수아 미래 님이 100,000원 후원하셨습니다]: 노래. 노래.
└후원을 못 받는 줄 알았던 내가 알고 보니 수금 천재?
└헐
└장미랰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10만 원이면 불러야짘ㅋㅋ
└내가 10만 원 받으면 하루 종일 불렀을 듯.
└당황했엌ㅋㅋㅋ
└설마 10만 원 받고도 안 부르나?
└이해해야지. 아직 어리잖아. 돈 귀한 거 모를 나이지.
└이건 불러야지.
“내가 음악 틀어줄게.”
눈치가 없는 건지 빠른 건지.
차시현이 음악을 틀어준다며 스마트폰을 꺼내자 문이 열렸다.
“훈이 노래한다고?”
할아버지까지 들어오셔서 난리다.
* * *
1)뭐라는 거야. 불어로 해.
2)영어로 하든가.
*앙리 마르소가 한국어를 배울 때까지는 불어라는 뜻으로 그의 채팅에 ‘진하게’ 효과를 넣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