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139화
31. 갈등(8)
1885년 3월 26일.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전보를 받았다.
큰 사람이 되어 당당히 찾아뵙고 싶었거늘 이토록 허무히 가시고 말다니.
‘아버지.’
대체 언제부터 사랑하지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을까.
케이를 사랑했을 때였나.
아니면 화가가 되기로 한 날부터?
확실하진 않지만 시엔을 만나면서, 아니, 그녀를 떠나보낸 뒤로는 아버지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1)
내 입에서 무슨 말이 튀어나올지 몰라 의도적으로 피했었다.
영혼을 잠식하듯 끓어오르는 원망을 가슴에 담아둘 뿐이었다.
한데.
만날 수도 대화할 수 없는 지금에 와서야 담아두었던 말들이 입안을 맴도는지 모를 일이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내뿜은 담배 연기 너머로 아버지께서 주신 성경이 눈에 들어왔다.
개혁 교회 목사셨던 아버지께서는 항상 당신의 길을 이어가길 바라셨다.
한때는 그 바람을 받들어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걸으려 했던 적도 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신학을 공부할수록 하나님의 은혜와 거룩한 말씀과 구원에 대조되는 교회를 발견할 뿐이었다.
교회에 있을 바에는 차라리 가난한 자들의 곁에서 복음을 전파하고자 전도사가 되었다.
벨기에 보리나주 광산촌에서 광부들의 삶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길 바라며 사역했다.
광산주들에게 직원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힘 있는 이들은 작은 교리에 집착하여 주님 아래 평등한 형제자매를 구속했다.
욕심에 눈이 멀어 주님의 말씀은 아랑곳하지 않고 가난한 이들의 고혈을 빨아먹었다.
기꺼이 가장 낮은 곳에 임하신 예수를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내 선택이 아버지 마음에는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잘못하지 않았다.
가난하고 불쌍한 이들과 서로를 보듬고 살길 바랐을 뿐이다.
그것을 이해해 주지 않은 아버지를 원망했거늘 분명 그러했거늘.
왜.
왜 이다지도 아프단 말인가.
다시는 보지 말자고 다짐한 주제에 왜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던 걸 후회한단 말인가.
“끄. 끄윽끄끄끅.”
입술을 비집고 꺼내지 못했던 말과 감정이 흘러내린다.
한번 토해내니 자꾸만 비집고 올라오는 설움을 게워냈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한참을 울고 나니 비로소 마음을 추스르고 머릿속을 정리할 수 있었다.
이념이라든지. 도덕이라든지.
신념 같은 것보다 사랑이 앞선다는 걸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어찌 창부를 만나느냐고 꾸짖던 아버지나, 보듬어 주지는 못할망정 불쌍한 이를 내치려 하시냐고 소리쳤던 나나 단지 서로 생각이 달랐을 뿐인데 아버지와 아들 관계까지 파탄 냈어야 했던 것일까.
아니. 그렇지 않다.
이렇게 후회할 바에야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사랑을 나눴음이 옳다.
지금이라도 가능한 많은 것을 사랑해야지.2)
아버지가 주신 성경을 놓고.
이제 그분이 떠났음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꺼진 촛불을 그려 넣었다.
그 앞에 둔 에밀 졸라의 『삶의 기쁨』은 차마 아버지가 바라던 삶이 아니라 나만의 길을 걸으나.
더는 아버지를 미워하고 원망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자 후회다.3)
비록 끝끝내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니까.
사랑하니까.
* * *
끝내 화해하지 못하고 아버지를 떠나보냈던 일이 떠올랐다.
헤어지고 나면 사랑한다는 말도 미안하다는 말도 고맙다고도 할 수 없거늘.
사랑하기에도 짧은 인생을 서로 다르다는 이유로 싸우는 이들이 안타깝다.
조금이라도 방법을 찾고 싶어서 한 번 더 여쭸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요?”
“글쎄.”
할아버지가 손을 주무르며 부정했다.
“어느 한쪽을 설득하려고 하면 싸움이 난단다.”
그렇다.
내가 안톤 반 라파드, 폴 고갱과 멀어지게 된 계기도 내가 그들을 바꾸고 싶어 해서.
그들이 나를 부정해서 생긴 일이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라도, 설령 그것이 옳아도 갈등은 생기게 마련이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 좋을 텐데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를 깊이 이해해야만 한다.
과연 그들이 페르디난도 곤잘레스를 이해하려고 할까.
정말 모르겠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해요?”
“글쎄. 할아버지도 모르겠구나.”
인천 공항에 내려서 집에 도착할 때까지 고민을 거듭했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내게 아직 ‘강한 자’들과 맞서 싸울 용기가 있는지도 아직 모르겠다.
주류에 따르길 거부함으로써 모든 생활이 망가졌으니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삶이 반복되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아주 작은 용기조차 없음에도.
그럴 힘도 없지만.
삶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한 사람을 돕고 싶다.
* * *
고수열의 저택을 방문한 장미래가 고훈을 찾았다.
작업실 문이 닫혀 있어 몇 번 문을 두드렸지만 반응이 없었다.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고훈은 턱을 괴고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이모 왔는데 얼굴도 안 보여주는 거야?”
장미래가 다가갔다. 상어 가족 동요가 나오는 스마트폰을 보곤 웃고 말았다.
“오셨어요.”
고훈이 이어폰을 뺐다.
그 모습에 고민이 묻어나와 장미래는 걱정스레 물었다.
“고민 있어?”
“네.”
고훈이 잠시 간격을 두었다가 스마트폰을 껐다. 페르디난도 곤잘레스에게 일어난 일을 언급하니 장미래가 팔짱을 낀 채 책상에 기대었다.
고훈은 곤잘레스를 돕고 싶다는 뜻을 비췄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 고훈의 말을 자르지 않고 끝까지 들어 준 장미래가 씩 웃었다.
“경우는 좀 다른데. 나도 그런 일 당한 적 있거든.”
“이모도요?”
“응.”
장미래가 생각을 정리하고 이야기를 풀었다. 어린아이에게는 조금 어려울 수 있겠지만, 고훈이라면 충분히 알아들을 것 같았다.
“국전이라고 신인들은 전부 상 받고 싶은 공모전이 있거든. 지금은 폐지됐지만.”
“네.”
“그때 협회장 딸이 대상을 받은 거야. 내가 있는데.”
“…….”
고훈이 장미래의 자신감에 당황해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그녀의 작품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화가 나서 바케스에 물감이랑 물 가득 채워서 던졌어. 심사위원들한테.”
“바케스가 뭐예요?”
“아, 미안. 양동이.”
어느 정도 크기의 양동이인지는 몰랐으나 그 무거운 것을 던졌다고 하니 장미래가 얼마나 이를 갈았는지 알 것 같았다.
장미래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고 나니까 내가 나쁜 인간이 된 거야. 피해자는 난데.”
고훈이 장미래의 손등에 손을 얹어 위로했다.
“처음에는 당당했지. 근데 전시하고 싶어도 받아주는 곳은 없고 주변에는 이상한 소문 퍼져 있고. 인터넷에서 나쁜 말 올라오고 제정신이 아니었어.”
“힘들었겠어요.”
“응. 선생님이 도와주지 않으셨으면 그대로 포기했을지도 몰라.”
“어떻게 도와주셨어요?”
“유학 알아봐 주셨어.”
고훈은 잠시 망설였다.
문제를 피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겠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었다.
더욱이 페르디난도 곤잘레스가 처한 상황에 적용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내가 왜 도망가야 하나 싶어서 싫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
고훈이 의아해하며 고개를 들었다.
“해외에서 아득바득 공부하다 보니까 조금씩 알아봐 주는 분들이 생기고. 그렇게 팬들이 느니까 자연스레 우리나라 사람들도 좋아해 줬어. 나 험담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도.”
“아.”
“그걸 알려주고 싶으셨던 것 같아. 누군가 어떤 악의를 가지고 공격하고 힘 있는 사람이 아무리 짓누르려고 해도 팬들에게 사랑받는 사람은 흔들지 못한다는 걸.”
장미래가 고훈을 보며 씩 웃었다.
“해성 선배, 수진 선배, 선생님이 인터뷰 같은 거 잘해주지 않으셨으면 또 몰랐겠지만.”
고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 그리는 사람에게 힘을 줄 수 있는 건 정치가도 돈을 쥔 사람도 아니었다.
미술관을 찾는 사람들이었다.
장미래의 말처럼 부모님과 할아버지 같은 영향력 있는 사람의 도움이 없었다면 여론몰이에 휩쓸렸겠지만.
그조차 장미래가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을 터였다.
장미래의 작품이 대중에게 사랑받았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화가가 존재할 수 있었다.
고훈은 <무제-완벽한 연인>을 전시한 페르디난도 곤잘레스가 분명 또 한 번 세계를 놀라게 하고.
사랑받으리라 믿었다.
뭔가 대단한 일을 해내지 않더라도 믿고 지지해주는 것만으로도 그에게 힘이 됨을 깨달았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장미래는 무엇을 마음먹은 듯이 고개를 주억이는 고훈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어떻게 생각해?”
“뭘요?”
“이번 일? 왜 돕고 싶은지 궁금해서. 사실 친한 사이도 아니잖아.”
고훈이 말을 정돈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사람이 자기 이야기를 방해받는 건 부당하니까요.”
“응.”
장미래가 호응했다.
“말도 그렇고. 미술도 그래요. 문학이랑 음악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자기를 표현하는 일이 누군가에게 가로막히면 안 돼요.”
“그건 저쪽도 마찬가지잖아?”
장미래가 페르디난도 곤잘레스를 방해하는 사람들을 언급했다.
그들도 그들의 생각을 말하는 게 아니냐고.
“맞아요. 처음에는 서로 생각도 추구하는 바도 다르니까 어쩔 수 없이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장미래가 책상에 엎드린 채 고훈과 눈을 마주했다.
“자기 생각을 말하되, 남의 자유를 침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요.”
고훈의 목소리는 확신으로 가득했다.
“그런데 쉽지 않더라고요.”
장미래가 슬며시 상체를 세웠다.
자유를 추구하되 남의 자유를 침범해서는 안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고 진리였다.4)
그러나 고훈은 한 번 더 앞서 나갔다.
“만약 서로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으려면 모두 함께 침묵하는 수밖에 없어요. 생각은 다르고 언젠가는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런 세상이 정말 건전한 사회일까요?”
고훈의 질문에 장미래가 고개를 저었다.
“서로 다른 걸 인정하면 좋은데 그러기도 쉽지 않죠. 시기하고 질투하고. 또 남의 언행 때문에 실제로 피해를 받아서 억울한 일이 생길 수도 있고요.”
“맞아.”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하기엔 너무나 소중한 일잖아요. 자기를 표현하지 않고 어떻게 살겠어요. 안 되는 걸 알면서도 계속해 나가야 하는 일도 있겠죠. 그러다 보면 뜻이 맞는 사람과 어울릴 수도 있고.”
고훈이 허탈하게 웃었다.
“어려워요.”
그리고 오랜 세월 생각해 온 말을 꺼냈다.
“서로 아끼고 보듬어 주면 좋을 텐데. 너무 이상적인가?”
“아니.”
장미래가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생각하지 못한 답이 있을 수도. 아니, 있을 거라고 믿어요. 계속 고민해 보려고요.”
“너무 멋진데?”
그녀는 본인 또한 답을 내리지 못한 이 문제를 고훈은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했다.
그리고 나름의 방식으로 답을 찾으려 노력하는 모습에 대견하기도 놀랍기도 했다.
해결할 순 없어도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 너무나 와닿았다.
“뭘요.”
“정답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 게 좋아. 사실 정답은 하나일 수도 있고 여럿일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거든.”
고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시현에게도 항상 했던 말이다.
“중요한 건 답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자세지. 생각하길 멈추면 죽은 거나 다름없어.”
“맞아요.”
고훈은 누구에게나 각자의 답이 있고 그것이 서로 상충할 수 있음을 절실히 경험했다.
페르디난도 곤잘레스의 일은 새로운 경험이 아니라 기억을 환기시키는 일이었다.
한때 자신과 다른 사람을 설득하고자 했고 고치려고 했던 고집스러운 화가는.5)
과거 여러 사람과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어쩌면 그런 자세가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고 사랑한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한 기억이 그때와 같은 문제를 마주한 그를 한 단계 더 성숙하게 했다.
자신의 자유와 타인의 자유가 부딪칠 때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작은 용기가 싹을 틔웠다.
* * *
1)빈센트 반 고흐와 아버지 테오도로스 반 고흐의 관계는 그가 시엔을 만나면서부터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아들이 알코올 중독자에 창부를 만나는 걸 용납할 수 없었던 아버지는 아들을 꾸짖었고 그 과정에서 빈센트는 시엔을 떠나보내게 되었다.
빈센트는 시엔을 담은 그림에 “어찌하여 이 땅 위에 한 여인이 홀로 버려져 있는가?”라는 문구를 적었다.
동생 테오에게 “그녀도 나도 불행한 사람이다. 그래서 함께 지내면서 서로의 짐을 나눠서 지고 있다”는 편지를 보낸 것으로 추측했을 때 빈센트는 시엔과 본인을 동일시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가 시엔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 빈센트에게는 아버지에게 자신이 부정되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2)인생을 가장 멋지게 사는 방법은 가능한 많은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가 동생 테오도르에게 보낸 편지 中-
3)성경이 있는 정물, 빈센트 반 고흐, 1885, 캔버스에 유화
4)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5)빈센트 반 고흐는 사람을 사귀는 데 서툴렀다.
1879년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 “다른 사람들처럼 나에게도 친구, 사랑 그리고 믿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라는 문구를 보면 그가 얼마나 외로움을 느꼈는지 알 수 있다.
1880년. 동생 테오도르의 권유로 안톤 반 라파드와 교류하게 되었다.
반 고흐와 달리 라파드는 부잣집 출신이었지만 첫 만남의 어색함은 그림을 향한 열정으로 금세 사라졌다.
문제의 발단은 아카데미.
프랑스 왕립 미술원의 정형화된 가르침에 심한 거부감을 느꼈던 반 고흐는 아카데미에 입학하려는 라파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서로 의견이 충돌하면서 빈센트 반 고흐는 친구 라파드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사사건건 참견했다.
라파드가 누드 모델을 고용하면 옷 입은 사람을 그리라고 했고 수채화를 그리면 흑백 그림을 그리라고 했다.
반 고흐는 항상 ‘내가 너무 고집스러운지 몰라도’란 말을 덧붙이면서도 끝끝내 자신의 생각을 라파드에게 주입하려고 했다.
1885년. 반 고흐는 그가 처음으로 ‘작품’이라고 여기는 그림을 완성했는데 바로 <감자 먹는 사람들>이었다.
당연히 가장 가깝게 지내던 친구 라파드에게 스케치를 보내어 그 기쁜 사실을 알리려 했다.
그러나 그때까지 반 고흐에게 시달렸던 라파드는 “자네가 이런 걸 진지하게 그렸다고 생각하진 않아.”라며 <감자 먹는 사람들>을 혹평했다.
반 고흐는 당시 라파드가 보낸 편지를 그대로 돌려보냈고 그렇게 두 사람의 관계는 끝나고 말았다.
시시비비를 떠나서.
<다시 태어난 반 고흐>에서 소개된 고훈이 그림을 대하는 법과 사람을 대하는 방식은 그런 과거 자신의 언행을 후회하고 반성하고 있다는 설정으로 그려졌다.
또한 앙리 마르소와 다투면서도 그와의 관계를 끊지 않는 건 그에게서 자신의 과거를 보았던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