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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반 고흐-136화 (91/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136화

31. 갈등(5)

앙리 마르소는 비다 라바니의 낡은 이젤과 듬성듬성 비어 있는 파스텔을 보곤 돌아섰다.

그러자 눈치를 보던 비다 라바니가 물었다.

“가, 가시게요?”

앙리 마르소가 귀찮은 듯 고개를 돌렸다.

“왜.”

“그게. 그……. 거리에서 종종 그림을 사 주신다고 들었거든요. 혹시.”

비다 라바니가 우물쭈물했다.

앙리 마르소는 모든 예술가가 동경하는 인물이었고 그것은 비다 라바니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에게 작품을 파는 것만으로도 화제가 되었으니까.

작가의 명성이나 배경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기에, 일부는 앙리 마르소의 눈에 띄기 위해 거리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비다 라바니는 자신에게도 그런 행운이 찾아온 거라 생각했다.

“하.”

앙리 마르소가 기가 차 웃고 말았다. 그는 놀라서 눈을 크게 뜬 비다 라바니를 비아냥댔다.

“저건 프랑스의 상징이야. 그런 것을 그따위로 그려놓고 팔길 바라? 주제 파악해.”

“아…….”

비다 라바니가 조금 전 자신을 위협하던 남자들을 떠올렸다.

그들도 앙리 마르소와 비슷한 말을 했었다. 무슬림 따위가 그려도 되는 게 아니라고.

“남한테 팔고 싶으면 실력부터 키워. 저딴 쓰레기 사 줄 사람 아무도 없어.”

앙리 마르소의 일침에 비다 라바니가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무슬림으로 보지 않고 화가 지망생으로 대하는 그에게, 그의 말에 희망을 본 듯했다.

“정말요? 그러면 제 그림 사 주시는 거예요?”

앙리 마르소가 입술을 씰룩였다.

“저도 마르소 님이 사고 싶은 그림 그릴 수 있을까요?”

“흥. 만 장은 그려야 할걸?”

앙리 마르소가 보기에 비다 라바니는 재능이 없었다. 거기에 기본 교육조차 받지 못한 듯했다.

색을 활용하는 방법을 전혀 몰랐고 무엇을 표현하고 싶은지도 보이지 않았다.

“…….”

비다 라바니가 고개를 숙였다.

재능도 없고 교육도 받지 못했더라면 죽을 만큼 노력이라도 해야 할 텐데, 만 장을 그려야 한다는 말에 좌절하는 것을 보니 더더욱 가망이 없었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10년 이상 자신을 갈아 넣을 각오가 없다면 전업 화가가 될 생각은 접는 게 나았다.

앙리 마르소는 소년을 뒤로하고 자동차를 돌려서 온 아르센에게로 향했다.

“만 장…….”

혼자 남은 비다 라바니가 중얼거렸다. 만 장이나 그리기엔 파스텔이 부족했다. 종이도 부족했다.

작년 생일에 선물 받은 파스텔을 아끼고 또 아껴 썼지만 몇몇 색은 다 써버렸고 이젠 사용할 수 있는 색이 얼마 남지 않았다.

12월 생일까지는 다섯 달이나 남았다.

‘만 장은 그려야 할걸?’

욕심이라는 건 알지만.

비다 라바니는 앙리 마르소의 말을 잊을 수 없었다.

* * *

고훈이 휘트니 미술관에서 시간을 보낼 무렵.

고수열은 홀로 페르디난도 곤잘레스를 찾았다.

단둘이 만나고 싶다던 그는 마스크를 착용한 채 나이 많은 친구를 반겼다.

“어서 와요.”

“자네.”

고수열은 고작 2달 사이에 눈에 띄게 마른 페르디난도의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락부락한 상박 때문에 터질듯했던 소매가 이제는 제법 여유 있었다.

“들어와요.”

페르디난도가 안으로 안내했다.

“몸이 안 좋다더니. 대체 어떻게 안 좋길래 사람이 반쪽이 돼?”

페르디난도는 마스크를 벗지 않은 채 헛웃음을 지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요, 수열. 난 괜찮으니.”

“괜찮지 않아 보이니 하는 말일세. 지난번 아팠던 게 몸살이 아니었어?”

페르디난도는 씁쓸히 웃곤 냉장고에서 병 음료를 꺼냈다.

고수열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루이는 어디 나갔나?”

페르디난도의 연인 루이 레이콕이 보이지 않았다. 그가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니 루이라도 닦달할 요량이었다.

페르디난도가 고수열에게 음료를 권하며 앉았다. 몇 번 말을 삼키고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자 고수열이 재차 물었다.

“말을 해야 알 것 아닌가. 집안 꼴은 이게 뭐고 자네가 이리 아픈데 루이는 어디 갔는데?”

“……병원에 있어요.”

페르디난도의 목소리가 떨렸다.

“병원?”

고수열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어디가 안 좋나?”

페르디난도는 고민했다.

자신들만의 고민을 털어놓을 상대가 없었기에 지금껏 숨겨왔던 이야기를 더는 비밀로 할 수 없을 듯했다.

누군가에게 털어놓지 않으면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페르디난도는 루이와의 관계를 이해해 준 고수열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하며, 가슴에 곪은 상처를 쥐어짜듯 말했다.

잠긴 목소리였다.

“많이 아파요. 많이 아픈데. 너무 늦었대요.”

고수열이 눈매를 좁혔다.

눈앞의 젊은 친구가 당장에라도 무너져내릴 것 같았다.

“난 자네 편이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단지 그가 6년 전 동성애자란 사실을 고백했을 때처럼 망설이고 있기에 그때와 같이 위로하고 지지할 뿐이었다.

페르디난도가 힘겹게 침을 삼켰다.

“에이즈예요.”

페르디난도가 고개를 들었다.

“저도.”1)

고수열의 시선이 흔들렸다.

페르디난도 곤잘레스는 예술계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교조화된 주류 예술계를 비집고 예술과 대중 사이를 연결한 선구자였다.

그렇게 지금까지 해온 업적을 말로 다 할 수 없음에도 앞으로 더 많은 일을 해나갈 터였다.

앞날이 창창한 젊은 예술가이자 오랜 벗에게 찾아든 비극에 고수열은 침통했다.

그가 조심스레 물었다.

“방법이 없는 건가?”

“이것저것 해봤지만.”

긴 침묵 끝에 페르디난도는 고잘레스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이번 전시회가 마지막이 될 것 같아요.”

부우웅- 부우웅-

고수열의 한숨에 맞춰 페르디난도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그는 다급히 전화기를 귀에 가져갔다.

“네. 곤잘레스입니다.”

-병원에 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죠?”

-환자분께서 기다리십니다.

페르디난도가 벌떡 일어나 외투를 둘렀다.

* * *

페르디난도 곤잘레스가 할아버지와 단둘이 만나고 싶다고 해서, 휘트니 미술관을 찾았다.

첫 주보다는 사람이 적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이 휘트니 비엔날레를 즐기고 있었다.

미술관을 들어서니 페르디난도 곤잘레스의 <무제-완벽한 연인>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두 달 전과 달리 왼쪽 벽시계는 아예 움직임을 멈췄다.

오른쪽 벽시계도 곧 멈출 것처럼 초침이 힘겹게 움직인다.

“미스터 고.”

일전에 휘트니 비엔날레를 안내해 주었던 존 카터가 반갑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잘 지냈죠?”

“그럼요. 이렇게 멋진 작품들과 함께하는데 못 지낼 리 없죠.”

멋진 작품이라고 하니 페르디난도 곤잘레스의 작품이 신경 쓰였다.

작품 관리에 철저한 휘트니 미술관이 건전지를 갈아 주지 않은 걸 보면 곤잘레스가 의도한 건가 싶기도 하다.

“시계를 갈지 않은 걸 보면 원래 저렇게 두길 바랐나 봐요.”

“네. 전시하기에 무척 간소한 조건이었죠.”

존 카터는 Simple이란 단어를 쓰며 곤잘레스의 작품을 설명했다.

“세계 어디서든 같은 모델의 시계를 두 개를 구해서 같은 건전지를 동시에 넣어서 나란히 걸어두는 게 전부입니다.”

존 카터의 설명을 들으니 이 작품을 보며 생각했던 방향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완벽하게 같은 조건이라 할지라도 언젠가는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음을 알았을 것이다.

<완벽한 연인>이라는 부제를 고려하면 자신과 동일시되는 연인과 같은 시간을 보내지만.

이내 끝까지 함께할 순 없음을 나타낸다.

언젠가는 이별하는 날이 오더라도 연인을 완벽하다고 했으니 페르디난도 곤잘레스가 사랑을 어떻게 하는지 알 수 있다.

“신기해요.”

솔직한 감상을 내놓자 존 카터가 눈썹을 올렸다.

“저는 이미지를 중요하게 생각하거든요. 형태나 질감, 색채감 같은 거요.”

존 카터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 감정이 관객의 눈과 가슴에 닿길 바라며 그렸어요. 그런 작품을 좋아하고요. 그런데.”

페르디난도 곤잘레스의 작품은 아주 단순하다.

나와 할아버지, 앙리 마르소, 장미래와 다르고. 아버지, 어머니와도 또 다르다.

어떻게 해야 감정을 쏟아낼 수 있는지, 그것을 완벽하게 전달할 수 있는지 고민하며 물감을 더하는 나와 다르게.

그는 되도록 많은 것을 배제한다.

“곤잘레스는 아주 단순한 방법으로 호기심을 자극해서 생각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어요.”

나 또한 그를 표현할 때 Simple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사실 그것이 적절한 표현인지는 모르겠다. 결과물은 단순하더라도 의미를 담기 위해서 정말 많이 고민하고 실패를 반복했을 거다.

그런 생각을 전하니 존 카터가 빙그레 웃었다.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가 말했죠. 완벽함은 더 이상 보탤 게 남아 있지 않은 상태가 아니라, 더 이상 뺄 게 없는 거라고.”

일부 공감한다.

시 같은 경우라고 생각한다.

단어와 문장을 철저히 정제하고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어 그 함축된 문장에서 사고와 상상력을 극대화하는 것이니 말이다.

한 번쯤은 도전해 보고 싶다.

부우웅- 부우웅-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앙리 마르소다.

요 며칠 연락하지 않았는데 아마 사과할 마음이 생긴 모양이다.

“전화 좀 받을게요.”

존 카터가 손바닥을 보였다.

전화를 받았다.

“왜요.”

-뭐 해.

“미술관에 있어요.”

-미술관?

“휘트니 미술관. 사과할 거면 빨리해요. 시간 끌지 말고.”

-뭔 사과?

방송을 방해한 것으로도 모자라 기껏 <기암성> 콘셉트 아트를 내놓으라고 하질 않나.

본인이 얼마나 무례한지 의식도 못 하는 듯하다.

-아무튼. 너 왜 방송 안 해.

“……네?”

-왜 안 하냐고.

이 친구는 어쩜 이렇게 신기하게 돌았을까.

기특한 일도 하고 표현이 서툴 뿐이라고 생각하지만 종잡을 수가 없다.

“방송을 하든 말든 내 마음이죠. 용건 없으면 끊어요.”

전화를 끊으니까 곧장 다시 걸려온다.

-경고하는데. 다신 나보다 전화 먼저 끊지 마.

전화를 끊으니 존 카터가 눈을 깜빡였다.

“앙리 마르소 목소리였던 것 같은데…….”

“맞아요. 용건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냥 심심했던 모양이에요. 저 혼자 좀 둘러봐도 되죠?”

“물론이죠.”

부우웅- 부우웅-

존 카터를 계속 기다리게 할 수 없어 보내자 또 진동이 왔다.

-끊지 말라고 했지!

“추근거리지 좀 마요.”

-추, 추근?

“내가 뭐 하고 있단 생각은 안 해요?”

-뭐 하는데.

이 사람이랑 이야기하면 한숨이 는다.

“휘트니 비엔날레 구경할 거예요.”

-나중에 해.

다음에 만나면 일단 턱 한 번 날리고 무엇이 문제인지 천천히 대화해 봐야겠다.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당장 말해요.”

-얘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셰리 가도의 목소리다.

-줘 봐. 훈이니?

“안녕하세요. 셰리.”

-앙리가 너랑 놀고 싶은가 봐.

-무슨 소리야!

“…….”

무슨 소리지.

-가만히 좀 있어 봐. 네가 말 못 하니까 대신해 주고 있잖니.

-내가 언제 그랬어!

-얼굴만 봐도 심심해 보이는데 뭘. 훈아, 맛있는 거 많이 해둘 테니 놀러 와.

“맛있는 거요?”

-그래. 저번처럼 금방 가지 말고 천천히 놀다가 가. 앙리랑 같이 그림도 그리고 그러면 좋잖니.

-오지 마! 오지 말랬어!

“……할아버지께 여쭤볼게요.”

* * *

1)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

1988년부터 1996년까지 짧은 기간 활동했다.

동성애자이자 쿠바 출신 난민 출신으로 주류 예술계를 비판하는 등 소수 입장에서 활동했다.

보수적이었던 당대 미국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킨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는 사망한 뒤에도 매년 전시회가 개최될 정도로 현대 미술의 상징적 존재로 인정받고 있다.

1996년 에이즈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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