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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반 고흐-134화 (89/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13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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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갈등(3)

토마스 아서는 눈을 감은 채 애써 마음을 다스리는 고수열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섣불리 위로할 수 없어 말을 꺼내지 못할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간 고수열이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미안합니다. 부동산이 있다고요.”

“네. 파리 고블랭구에 빌라 한 채, 런던 뉴몰든에 아파트가 하나 그리고 이곳까지 총 세 채입니다.”

고수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블랭구와 뉴몰든 모두 한인이 모여 사는 곳이라 그나마 생활하기 편했을 터였다.

며느리 이수진이 가끔 연락을 해왔기에 사진으로나마 본 기억도 있었다.

“현재는 이곳을 제외하고 모두 세를 주고 있습니다. 여기, 관련 서류입니다.”

고수열이 토마스 아서가 넘긴 서류를 받아들었다.

월세를 주고 있다면 그쪽에는 처리할 짐이 없을 듯했다.

“특별한 일 없으면 계속 관리해 주셨으면 합니다.”

“네. 그리고.”

토마스 아서가 고해성과 이수진의 계좌 내역 사본과 정리한 문서를 함께 보였다.

토마스 아서가 정리한 고해성의 자산은 미화 72,000달러로 이 외에도 자동차 두 대, 미술품 몇 점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수진은 주식과 채권, 현금을 합하여 미화 890만 달러와 자동차 한 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뜻밖의 액수라 고수열이 숫자를 다시 확인했다.

버뱅크의 집과 파리 빌라, 런던 아파트만 해도 적지 않은데 유동 자산이 이렇게 많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이렇게 많다고요?”

아들 부부가 대외적으로 인정받는 줄은 알았지만 어디까지나 맥스 스튜디오의 직원이었다.

인센티브를 받았다고 해도 예상하기 힘든 액수였다.

“영화 트리니티 워와 엔드페이즈의 러닝 개런티 덕분에 자산이 크게 늘었습니다.”

토마스 아서의 설명에 고수열이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2010년대 맥스 스튜디오가 제작한 영화 세이버즈는 월드와이드 박스오피스 28억 달러의 진기록을 수립했었다.

“그리고.”

토마스 아서가 사진 두 장을 꺼내서 고수열 앞에 두었다.

“이걸 어떻게.”

두 장의 사진은 고수열이 한창 왕성히 활동할 시기에 발표한 작품으로 그조차 30년간 못 보았던 <소나무 3>과 <소나무 6>이었다.

“해성이 모으고 있었습니다.”

토마스 아서는 고해성의 말을 빌려 상황을 설명했다.

“찾기도 힘든데 비싸기도 만만치 않아서 언제 다 모아 전시회를 할지 모르겠다고 투덜대곤 했습니다.”

고수열은 같은 직장에서 같은 직책과 직급으로 일했던 아들과 며느리의 현금 자산이 크게 차이 나는 이유에 탄식했다.

“……미련한 놈.”

다시는 안 볼 것처럼 싸우고 나서.

애비 전시회를 해주겠다고 최소 수십억 원이 나가는 그림을 하나씩 사들였던 아들의 미련함이 그보다 안타까울 수 없었다.

이런 짓보다 전화 한 통을 더 바랐던 고수열은 이내 자신도 아들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애비고 자식이고 이렇게 어리석을 수가 있나.’

고수열은 아들의 전화번호를 보며 몇 번이고 망설였던 자신을 탓했다.

그 자존심이 뭐라고.

“정리는 다 되었습니다. 이제 훈이가 서명하고 세금 관련 문제만 해결하면 문제없이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상념에 빠져 있던 고수열이 토마스 아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상속 절차를 밟고 이곳의 짐을 어떻게 처리할지도 정해야 했다.

“훈아.”

고수열이 손자를 불렀다.

대답이 없어 한 번 더 불렀지만 어디 있는지 반응이 없었다.

“훈아. 어딨어?”

고수열이 일어나 손자를 찾았다.

1층을 둘러본 고수열이 정원을 내다보았다.

곤충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손자가 또 이상한 벌레를 잡고 있는 건 아닐까 싶었다.

함께 집을 둘러보던 토마스 아서가 고수열에게 다가갔다.

“1층에 없는 걸 보니 위에 있나 봅니다.”

고수열이 고개를 끄덕이곤 계단으로 향했다.

계단이 시작하는 벽에는 고훈의 키가 얼마나 컸는지 확인하는 금이 그어져 있었다.

집 곳곳에 아들 부부와 손자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한 계단, 두 계단 오르던 고수열이 한 번 더 고훈을 부르다가 깜짝 놀랐다.

손자가 계단 위에 쓰러져 있었다.

“훈아? 훈아!”

황급히 고훈에게 다가간 고수열이 손자를 살폈다. 아무리 부르고 흔들어도 반응이 없었다.

지난 사건으로 놀랐던 가슴이 철렁였다.

“아서, 아서!”

고수열이 다급히 토마스 아서를 불렀다.

심상치 않은 목소리에 뛰어 올라온 그가 고훈을 발견하자마자 핸드폰을 꺼냈다.

“훈아! 정신 좀 차려 봐! 훈아!”

* * *

문득 정신이 들었다.

울부짖는 테오의 목소리가 멀어지고 마침내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거늘.

어찌 된 일인지 의식이 돌아왔다.

눈을 뜰 수 없다. 따뜻한 물 안에 있는 것 같다. 몸을 힘껏 비틀어 보니 사방이 막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과연.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은 결과가 이것인가.

눈을 뜰 수도 없으며 마음껏 숨조차 못 쉬는 비좁은 공간에서 영원히 살아가는 것이 벌이라면 벌이리라.

‘움직였어.’

‘정말?’

얼마나 흘렀을까.

두 남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불어도 영어도 라틴어도 아닌 생전 처음 듣는 언어다. 이해할 순 없지만 설렘과 행복에 찬 목소리다.

‘핑구, 벌써부터 엄마 힘들게 해?’

이곳은 고독이란 형벌을 주는 지옥이 아니었던가.

비록 알아들을 순 없어도 이따금 들려오는 사랑스러운 목소리를 기다리게 되었다.

웅크린 채 손발을 제한적으로 움직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날이 이어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 따뜻한 목소리가 신음하기 시작했다.

이런 것이었나. 그럼 그렇지.

이토록 편안히 내버려 둘 리 없다.

‘아윽. 아아아으.’

‘다 왔어. 숨 길게 쉬어. 후~ 후~’

‘아아아악!’

사랑 가득한 목소리가 신음하고 비명을 질렀다.

말을 걸어주길 기다렸던 그녀가 고통스러워하니 나조차 불안해진다.

탈이 나는 건 아닐까.

대체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괴롭히는 걸까.

찢어지는 비명은 끝없이 이어졌다.

그러다 안락했던 작은 감옥이 몸을 압박해 오기 시작했다.

괴롭다.

그녀의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온몸이 짓이겨지는 듯하다.

이제야 씻어내지 못할 죄의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후회는 없다.

선택지 따위 없었으니까.

혹여나 삶을 영위해 나가더라도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치열하게 살아가는 동생의 짐이 되어 숨만 쉰다면 그것은 시체와 다르지 않다.

아니, 망자보다 못하리라.

차라리.

스스로 삶을 끊어낸 죗값을 치르더라도 이것이 옳다.

‘아아아악!’

여자의 비명과 고통이 절정에 이른 순간.

고통도 비명도 사라지고 온몸의 감각이 눈을 떴다.

아무래도 눈을 뜰 수 없는 상황에 멀리서 들리던, 조금 전까지만 해도 비명을 질러대던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였다.

“내 아들. 내 아들.”

이곳이 정녕 지옥이라면.

이토록 따뜻할 수 있을까.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귓가에 속삭이는 것만으로 이렇게 가슴이 벅차오를 수 있을까.

“사랑해.”

그것은 구원이었다.

어떻게 잊을 수 있지.

사랑으로 벅찬 나날을.

행복했던 시간을.

태양보다 따사롭던 시선과 온화한 목소리로 내게 새 삶을 주셨던 그분들을.

손을 잡고 나란히 걸었던 그때를 어찌하여 이다지도 까맣게 잊고 살았을까.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은 탓에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영락없이 지옥에 떨어졌다고 믿었다.

나조차 사랑받을 수 있음을 알려주신 분들을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그 순간마저도 나를 감싸셨던 그분들을 잊고 아무렇지도 않게 살 수 있었지.

그렇게 뻔뻔하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이렇게나 사랑하는데.

이렇게나 아픈데.

두 분 얼굴만 떠올려도 눈물이 고이는데 어떻게.

어떻게.

“훈아!”

할아버지다.

할아버지가 또 그때처럼 병원에서 날 찾을 때처럼 애타게 부르신다.

할아버지는 알고 계실까.

내가 할아버지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너무나 좋아했단 것을.

아버지가 실은 할아버지를 누구보다도 존경했단 것을.

부모가 없었던 어머니가 할아버지를 친아버지처럼 생각했던 것을 알고 계실까.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할아버지가 흥분해서 의사를 다그친다.

아무 이상이 없는데 왜 일어나질 못하냐고.

또 걱정을 끼친 모양이다.

일어나야 하는데.

어서 일어나서 할아버지와 함께 아버지, 어머니를 찾아야 할 텐데.

차고 습한 흙 아래에서 기다리고 계실 텐데. 이렇게 건강히 살고 있다고 너무나 죄송하다고 잊어서 죄송하다고 찾아가야 할 텐데.

너무 아파서.

가슴이 너무 아파서 일어날 수 없다.

너무나 소중한 걸 찾았는데, 이제는 그분들을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뭉개지는 듯하다.

할아버지는 이 고통을 어떻게 견디셨을까.

“어디 아픈 게 아니면 갑자기 쓰러져서 이러겠어요!”

평소 할아버지가 아니다.

그래. 아마 나 때문에 버티셨을 거다. 그때도 지금도 내가 있으니 어떻게든 괜찮은 척하셨을 거다.

지금 내가 할아버지를 걱정하는 것처럼 당신도 나를 위했을 것이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내가 슬퍼하지 않도록 그 많은 상처와 깊은 슬픔을 홀로 삭여 오셨을 거다.

이대로 있을 순 없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슬퍼하고만 있을 순 없다. 정신 차리고 일어나 할아버지를 위로하고 슬픔은 그 뒤에 충분히 흘려보내자.

할아버지가 뺨을 어루만진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어서 일어나라고 말하는 듯하다.

“할아버지.”

몸에 힘이 없어서 눈을 감은 채 할아버지를 불렀다.

얼굴을 감싸고 있던 손을 움찔하더니 이내 두 손으로 얼굴을 부여잡으셨다.

“정신이 들어? 응?”

“네.”

할아버지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으니 도리어 마음이 조금은 차분해진다.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있는 그대로 더하지도 덜지도 않고 말하는 게 최선이리라.

“아버지, 할아버지 싫어 하지 않았어요.”

슬며시 눈을 뜨자 할아버지의 눈이 잔뜩 흔들리고 있었다. 눈썹 사이의 주름이 깊다.

“매일 핸드폰 들고 고민했어요. 아마 할아버지께 전화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훈아…….”

숨을 길게 내쉬었다.

“어머니는 할아버지 이야기 많이 해주셨어요. 정말 좋은 분이시라고. 한국 가면 할아버지랑 같이 놀자고. 엄청 예뻐해 주실 거라고.”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날 끌어안으셨다.

“저도 할아버지 많이 보고 싶었어요.”

할아버지가 몸을 들썩였다.

어깨가 축축해지는데,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할아버지 품에 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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