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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반 고흐-133화 (88/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133화

31. 갈등(2)

방학을 며칠 앞두고 할아버지와 함께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버뱅크에 왔다.

사우스 스팍스 거리 325번지에 도착하니 녹음이 무성한 가로수 뒤로 하얀색 2층 집이 눈에 들어왔다.

도로와 이어진 작은 정원이 있다.

잔디가 고르고 관상용 작은 나무와 꽃 화분이 잘 가꿔진 것으로 보아 누군가 계속 관리를 했던 모양이다.

올려다보자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셨다.

이곳이 ‘부모님’과 ‘고훈’이 살던 집인 듯하다.

“1시간 뒤에 여기서 만나기로 했으니 들어가서 기다리자꾸나.”

할아버지가 스마트폰을 확인하며 도어락 비밀번호를 더듬더듬 입력하셨다.

거실로 곧장 이어진 집 내부는 짐이 많았다.

아이를 키우는 가정이라는 느낌보다는 집 전체가 화실 같은 분위기다.

나란히 놓은 책상에는 컴퓨터 두 대가 있고, 컴퓨터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태블릿과 스타일러스도 있다.

아마 ‘부모님’이 일하던 공간이겠지.

그 옆에 작은 책상에는 아이가 쓰는 크레용과 도화지가 놓여 있다.

‘고훈’은 부모님 곁에서 이렇게 그림을 그리며 놀았던 것 같다.

이유를 알 수 없이 가슴이 먹먹해지는데.

할아버지가 ‘부모님’의 책상을 어루만지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가슴에 담아둔 말이 얼마나 쌓여 있을지.

자식을 잃은 한이 얼마나 무거울지 나로서는 짐작하기 어렵다.

너무 괴로워 보여서 손을 잡아드리고 한동안 서 있었다.

할아버지가 어느 정도 마음을 추스르신 것 같기에 정수기에서 찬물을 받아서 가져다드렸다.

“드세요.”

할아버지가 머리를 쓰다듬곤 잔을 받아들었다.

조금 둘러볼 생각으로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벽에 도화지를 대어 고훈이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한 놀이방인 듯하다.

이 몸이 살았던 곳이라 그런지 왠지 모르게 마음이 포근해진다.

“아.”

고훈도 곤충을 좋아했는지 유럽이나 한국에서는 보지 못한 곤충 그림을 잔뜩 그렸다.

선이 삐뚤빼뚤하지만 제법 자세히 표현하려고 한 모양이다. 관찰력이 좋은지 작은 부위도 열심히 그린 흔적이 있다.

마치 내가 어렸을 적 새로 만난 곤충을 그리며 나만의 도감을 만들었듯이 이름과 특징도 적어두었다.

역시 어린아이에게 곤충만큼 신비하고 흥미로운 존재도 없다.

“…….”

왜 이렇게 마음이 무거울까.

아마 이곳에 살던 사람들과 전혀 관계없다고 생각할 순 없을 듯하다.

할아버지를 친할아버지보다도 사랑하기에 그분의 자식과 손자를 남처럼 생각할 수 없는 것이리라.

작은 책상 위에 스케치북이 놓여 있다. 겉장을 넘기니 이번에도 곤충 도감이다.

엘리뇨라는 현상 때문에 비가 많이 내려서 곤충이 서식하기 좋은 환경이 조성되었다고 한다.

덕분에 그 곤충을 먹이로 하는 거미들도 많아졌단다. 무척 흥미롭지만 물무당벌레 수천 마리가 있는 광경은 조금 섬뜩하다.

“……?”

할아버지 추측대로 외국을 돌아다녀서 한국어를 못 썼던 건지.

아니면 공부를 하고 있었던 건지 몰라도 아이가 구사할 만한 프랑스어가 아니다.

더군다나 이 필체는…….

글자에 힘은 없지만 분명 내가 쓰던 방식이다.

원을 그릴 때 윗부분에서 힘을 주었던 점이나 특정 글자를 길게 뺀다든지, 단어 마지막을 살짝 올려 쓰는 것 등 내 글씨다.

“훈아, 이거 어떻게 하는 거냐?”

밖에서 할아버지가 부르셔서 나가보니 정수기를 이리저리 살피신다.

“이거 누르면 되잖아요.”

정수기 옆에 버튼을 누르자 물이 한 컵 분량으로 적당량 나왔다.

할아버지가 얼른 잔을 댔다.

“무슨 물 나오는 버튼이 옆에 있다냐.”

“그러게요.”

할아버지 말씀에 동조한 순간 불안이 밀려들었다.

특이한 구조의 정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할 줄 안 것과 더불어 조금 전 고훈의 곤충 도감과.

이 집에 들어온 뒤로 줄곧 느낀 안타까움과 먹먹한 기분 그리고 형용하기 어려운 포근함까지.

조금 전 있었던 놀이방으로 돌아가 고훈의 도감을 뒤졌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아주 미세하게 글자에 힘이 붙고 그림은 나아졌다.

마지막 부근에 이르러서는 정말 내가 썼다고 해도 의심하지 않을 정도로 같다.

“훈아. 뭐 찾아?”

“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놀이방을 둘러보았지만 그림과 곤충 도감 말고는 특별한 게 없다.

밖으로 나와서 2층으로 올라가니 계단 바로 앞에.

해바라기밭이 펼쳐졌다.

* * *

2025년 5월 2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버뱅크 사우스 스팍스 거리 325번지.

“훈아! 그거 먹는 거 아니야!”

어머니를 졸라 겨우 유화 물감을 얻었다.

평소 부모님은 컴퓨터란 것으로 그림을 그리셔서 집 안에서 물감 보기가 어려웠는데, 튜브에 든 물감을 만나니 기쁘기 그지없다.

특히나 렘브란트 207번 물감은 색이 너무 예쁘다.

무슨 느낌일까 싶어 살짝 입에 가져다 대니 어머니께서 크게 소리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뱉어! 뱉어!”

시키는 대로 뱉으니 삼켰냐고, 괜찮냐고, 그걸 왜 먹냐고 대답할 시간도 안 주신다.

“안 삼켰어요.”

붓을 정리할 때는 조금씩 먹긴 했어도 질감을 느끼려고 입에 넣을 때는 삼키지 않는다.

“하아. 훈아, 물감 먹는 거 아니야. 알았어?”

“네.”

뭐가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님께는 어린아이일 뿐이니까 뭐든 걱정하시는 거겠지. 괜한 걱정 안 하시도록 안 보는 곳에서 하면 될 일이다.

화장실에서 몇 번 입을 헹구고 양치질을 하고 나서야 붓을 들 수 있었다.

“자, 훈이 그리고 싶은 대로 그려 봐.”

그동안 꾹 참았다.

아직 몸이 어린 탓에 선도 마음껏 못 썼지만 이제는 힘이 제법 붙고 그림 그리는 일도 손에 익었다.

예전처럼은 아니더라도 조금씩 하다 보면 또 금방 늘 것이다.

오늘은 긴 기다림으로 애태운 마음을 이 큰 문에 맘껏 펼칠 생각이다.

큰 붓에 노란색 물감을 가득 발랐다.

이 얼마나 가슴 벅찬 순간인가.

문 위에 붓을 얹었다.

익숙한 감촉은 아니다.

캔버스도 아니고 익히 쓰던 붓과 달리 빳빳하지도 않으며 물감은 어찌나 부드러운지 모른다.

그러나 다시 색을 칠한다는 게.

붓을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하지 않은가.

팔레트 위에서 색을 만들어 올리는 이 일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모른다.

처음 태어났을 때만 해도 해괴한 광경에 지옥에 온 줄로만 알았거늘.

너무나 행복해서 자꾸만 노란색을 밝게 쓰게 된다.

“…….”

“왜?”

아래쪽에 해바라기를 잔뜩 그렸더니 더는 그릴 장소가 없다.

“너무 높아요.”

발뒤꿈치를 들고 어깨를 있는 대로 뻗어도 손이 닿는 곳이 문의 반뿐이다.

“하하하! 자! 아빠가 들어줄게.”

아버지가 허리를 감싸고 들어주었다. 불편하지만 이 정도는 감수하리라.

“조금만 아래로요.”

“이 정도?”

“네.”

어머니가 팔레트를 받쳐 주셨다.

이대로 그림을 완성하고 싶지만 내가 아무리 몸집이 작아도 계속 들고 있기 힘드실 터.

“내려주세요.”

“다 그렸어?”

“아니요. 위에는 아버지랑 어머니가 그려주세요. 전 밑에 거 더 그릴래요.”

이 행복한 집을 혼자만의 색으로 칠하기엔 너무나 아깝지 않은가.

이 행복한 순간을 혼자 즐기기엔 너무나 아쉽지 않은가.

“글쎄. 아빠는 별론데.”

“왜요?”

“아빠가 그리면 훈이 그림이 너무 못나 보이잖아.”

“고해성!”

아버지가 또 어머니께 얻어맞았다.

저렇게 행복하게 웃으니 아무래도 어머니께 맞는 걸 즐기시는 듯하다.

* * *

고수열이 아들 부부의 집을 둘러보며 회한에 잠겨 있기를 얼마간.

고해성, 이수진 부부의 변호사 토마스 아서가 버뱅크 사우스 스팍스 거리 325번지를 방문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고수열 경.”

“처음 뵙습니다.”

두 사람이 악수했다.

토마스 아서는 고수열의 눈시울이 붉은 것을 확인하곤 고개 숙여 위로를 전했다.

사무적인 관계뿐 아니라 종종 저녁 식사를 하며 친분을 유지했던 터라 토마스 아서는 고수열과 고해성 사이의 일은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사이가 멀어진 채 그대로 사별하고 말았으니 그 애석한 마음에 위로를 건네고 싶었다.

유서라도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불의에 찾아온 사고가 그마저도 허락지 않았다.

“여기, 해성과 수진의 재산 목록입니다.”

토마스 아서가 직분을 다하기 위해 고해성, 이수진이 사망한 후 관리하던 재산 목록을 꺼냈다.

고수열은 그것을 힘없이 받아들곤 살펴보지도 않은 채 소파에 앉았다. 그러고는 토마스 아서에게도 앉을 것을 권유했다.

이야기가 짧게 끝나지 않을 터이기에 그도 간격을 두고 자리했다.

“우선 이곳과 파리, 런던에 있는 부동산이.”

토마스 아서가 설명을 시작하자 고수열이 슬며시 고개를 저었다. 몇 번 말을 삼키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바쁘신 분께 괜한 말 꺼내는 것 같은데.”

“괜찮습니다. 편히 말씀하시지요.”

긴 한숨이 이어졌다.

“……애들 이야기 좀 해주시겠소?”

그 말에 토마스 아서가 입을 꾹 다물었다가 손바닥을 비볐다.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런던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경매장에서 한 작품을 두고 경쟁하다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죠.”

고수열은 토마스 아서가 전하는.

자신은 모르는 아들과 며느리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해성이 따지더군요. 저 때문에 그림을 너무 비싸게 샀다고. 황당해서 싸우다 보니 술 한잔하게 되었고 그렇게 친구가 되었습니다.”

고수열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일을 했는지는 몰라도 그 성격은 어디 가지 않았던 듯했다.

“미국으로 옮긴 뒤에는 해성과 수진의 계약 서류와 저작권 보호를 맡았습니다. 한 달에 한 번은 만나서 이야기를 주고받았죠.”

담담한 어조를 유지하던 토마스 아서가 침을 삼켰다.

잠긴 목소리를 애써 감추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해성은 제 생에 가장 멋진 괴짜였습니다.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일했죠. 맥스 스튜디오 팀원들은 그들의 디렉터를 싫어하면서도 존경했어요. 그보다 멋진 결과물을 내는 사람은 없었으니까요.”

고수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격은 개차반이지만 실력만큼은 인정했다.

“퇴근하면서 맥주 한잔하면 꼭 옆 테이블과 시비가 났습니다만 8시가 되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집에 들어갔죠. 수진과 한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고수열이 눈썹을 들어 올리는 것으로 무슨 약속이었냐는 질문을 대신했다.

“훈이 잠들 때까지 곁에서 책을 읽어주라는 약속이었습니다. 해성 말로는 수진이 먼저 잠들었다고 합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화목하게 살았다고 하니 이제는 그럴 수 없음에 가슴이 짓이겨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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