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131화
30. 73점과 100점(4)
“그럼 거실에 있을게.”
방태호가 밖으로 나갔다.
무엇부터 시작해야 좋을지 몰라서 선물도 받았겠다, 앙리 마르소 색칠놀이를 한 장 꺼냈다.
“오늘은 이거 해보려고요.”
└저게 뭐얔ㅋㅋㅋㅋㅋ
└앙리 마르소 아님?
└ㅁㅊ 댕잘생김.
└저런 걸 왜 가지고 있엌ㅋㅋㅋ
└왤케 커 ㅋㅋㅋㅋ 훈이 키만 하넼ㅋㅋㅋㅋ
채팅창을 보니 사람들이 좋아한다. 그렇게까지 재밌는 일인가 싶다.
“마르소가 생일 선물로 보내줬어요. 며칠 생각할 게 많아서 머리 비우고 싶었는데 괜찮을 것 같아요.”
쓰고 남은 물감을 적당히 정리하면서 말했다.
생일 선물로 왜 저런 걸 주냐는 사람들이 많다.
역시 나만 이상하게 생각한 게 아니다.
“원본이 어떤지 몰라서 마음 가는 대로 칠해보려고요.”
원래 작품은 <앙리 마르소 99>라고 하는데 찾아보기 귀찮다.
그의 채색 방식과 색감은 충분히 느꼈으니 굳이 따라 해볼 필요는 없다.
건강하다기보단 비정상적으로 맑은 피부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그런 고민을 하면서 배경으로 칠할 회색을 풀었다.
└젯소 안 발라도 됨?
└이번에는 리퀴드 화이트 안 바르네?
└아 제육덮밥 먹고 싶다.
└밑칠 안 해요?
└젯소가 뭐임?
└요즘엔 다 젯소 발려서 나옴.
“젯소 처리 되어 있고 오일 프라임도 발려 있어요. 밑칠은 선이 안 보일 것 같아서 넘어가려고요.”
아는 사람도 보이는데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다.
채팅창이 물음표로 도배되었다.
“캔버스 위에 바로 유화 물감을 바르면 안 좋아요. 착색도 덜 되고 까끌까끌해서 원하는 질감이 잘 안 나와요.”
장미래가 채팅으로 나중에 그림이 갈라질 수도 있다고 설명해 주었다.
“밑칠 같은 경우는 좀 달라요. 저는 붓 터치 느낌 때문에 하는데 이 캔버스는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복숭아색과 흰색 비율을 맞춰가며 설명했다.
“근데 보통 하는 게 좋아요. 처음 올린 물감을 기준으로 명도 가늠하면서 그려야 대비를 잘 잡거든요.”
갑자기 강의처럼 되었다.
“숙련된 사람은 팔레트에서 만든 색을 그대로 올려도 되는데 사실 잘 그리는 사람도 이렇게 해요. 처음 그리게 되면 버릇 들이는 걸 추천해요.”
사실 캔버스 위에는 정답도 법칙도 없다.
밑칠을 무슨 색으로 하는 것은 당연하고 하고 안 하고도 자유다.
다만 사물을 구별하고 좀 더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색을 다루는 방법은 알 필요가 있다.
또 이건 따 둔 선을 따라 채색하는 거니 밑칠을 해선 선이 안 보이게 된다.
얼굴부터 칠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저런 걸 알지?
└그거 그렇게 하는 거 아니다.
└할아버지한테 배웠어?
└앙리 마르소랑 무슨 말 해요?
└선에 딱 맞춰서 칠하진 않네.
└오늘은 뭐 했어요?
“그리다 보면 알게 돼요. 더 잘 그리고 싶으니까.”
그렇게 하는 거 아니라는 채팅이 신경 쓰인다.
불어이기도 하고 고압적인 태도가 앙리 마르소를 연상시키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아이디가 그의 이메일 주소와 똑같다.
“오늘요? 학교에서 시험 봤어요.”
무시하고 다른 사람의 말에 대답했다.
└헐. 나도 시험 봤는데.
└앙리 마르소랑 놀면 뭐 하고 놀아요?
└오. 갑자기 코 생김.
└초등학교 시험 없어지지 않았나?
└한국 초등학교는 말만 초등학교지 다른 곳임.
└그렇게 하는 거 아니라고.
└공부도 잘해?
└시험 망한 거 겨우 잊고 있었는데 ㅠ 그러고 뉴튜브 보는 내 인생이 레전드다 진짜.
나중에 방태호에게 앙리 마르소를 차단할 수 없냐고 물어봐야겠다.
“공부 잘 못 해요. 영어나 수학은 괜찮은데 국어랑 사회, 과학은 좀 어려워요.”
쭝쭝이란 사람이 쓴 시험을 망쳤다는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마르소의 목을 칠하며 말했다.
“너무 자책하지 말아요.”
피부를 칠하던 물감에 회색을 아주 조금 섞었다.
“시험 점수는 과정의 단면일 뿐이에요. 내일도 1년 뒤에도 그 점수는 아닐 거잖아요.”
피부를 표현할 때 약간의 회색은 사실적인 분위기를 내면서도 피부에 활력을 부여한다.
이 역시 대조를 활용한 것.
하던 말을 마치고 설명하는 게 좋겠다.
“전 오늘 과학 45점 받았어요.”
채팅창에 웃음이 올라온다.
“그래도 영어랑 수학는 다 맞혔어요. 내일 국어랑 사회는 걱정되지만.”
붓을 바꿨다.
“쭝쭝 씨는 더 잘할 수 있어요. 시험 문제가 쭝쭝 씨의 좋은 점을 발견해내지 못한 걸 수도 있고요.”
피부를 가리키며 말했다.
“회색 섞기 전보다 훨씬 자연스럽죠? 피부에는 생각보다 여러 색이 있어요. 분홍색도 있고 살구색도 있고 회색도 있고 녹색이랑 파란색도 있을 수 있어요.”
이번에는 마르소의 눈을 칠해볼 생각이다. 에메랄드 눈을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이 된다.
└11살이 인생 상담한다.
└쭝쭝 씨랰ㅋㅋㅋㅋ미쳨ㅋㅋㅋ
└얼굴에 회색이 있으면 건강 안 좋은 거 아냐?
└회색은 그렇다 쳐도 녹색이랑 파란색은 뭔데ㅋㅋㅋㅋ
└아 제육덮밥 먹고 싶다.
└근데 진짜 더 리얼해지긴 했다.
└고마워 ㅠㅠ
└앙리 마르소랑 놀러 간 적 있어요?
└[개벽의 앙리 님이 100유로 후원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는 거 아니라고!
└저게 뭐지?
└어디 말이야?
앙리 마르소가 칭얼거린다.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훈수 좀 그만해요.”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앙리 마르소하면 떠오르는 상징이나 마찬가지다.
신중하게 고민하는데 스마트폰이 울렸다.
마르소다.
무시하고 채팅창을 보니 다들 방금 무슨 말을 한 거냐고 물어본다.
“신경 쓰지 말아요. 앙리 마르소랑 놀러 간 적 없어요. 아, 집에는 가본 적 있는데 마담 셰리 가도의 요리 솜씨는 최고예요. 올해 꿈은 셰리 가도의 음식을 다시 먹는 거예요.”
└꿈이 왜 그렇게 소박햌ㅋㅋㅋ 무슨 전시회 하겠다 이런 거 말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ㅋㅋㅋ
└얼마나 맛있었으면 올해 꿈이래?
└그 정도 부자들은 매일 맛있는 거 먹겠지 ㅠㅠ
└전화 받아!
└앙리 마르소네 집에도 놀러 갈 정도로 친해요?
└친구 잘 사귀었네.
“친구라고 하니까 생각난 건데 정말 친구 하나는 잘 뒀나 봐요. 오늘 학교에서 잠깐 갈등이 있었는데 친구가 저 대신 나서주더라고요.”
스마트폰이 또 울렸다. 또 앙리 마르소다. 이대로 두면 계속 방해할 것 같아서 받았다.
“왜요!”
-그거 그렇게 칠하지 말라고! 원본 보고 칠해!
“내 맘대로 할 거라고요. 마르소가 칠한 대로 칠하면 무슨 의민데요.”
-원본이 있잖아! 완벽한 원본!
“그럴 거면 그냥 원본을 보내지 왜 선만 따서 보내요?”
-네가 나 속이고 돌아가지만 않았어도 줬어!
“속이긴 뭘 자꾸 속였다고 그래요? 일정 끝났으니까 왔지!”
채팅창이 물음표로 가득한 가운데 장미래와 몇몇만 키읔을 반복해 치고 있다.
“잠깐만요. 마르소가 자꾸 이렇게 칠하지 말라고 해서요.”
└ㅁㅊㅋㅋㅋㅋㅋㅋㅋ
└마르소? 앙리가?
└선물로 준 거라면서 왜 감시하고 있엌ㅋㅋㅋㅋ
└저 사람이 앙리인가? 아이디가 이상한데.
└제육덮밥 먹고 싶다.
└앙리 마르소랑 고훈이 이야기하는 거 실시간으로 듣고 싶어요. 스피커 모드로 해주세요.
-너! 나랑 통화할 때 딴짓하지 마. 경고야!
“일하는 사람한테 전화해서 무슨 행패예요? 어떻게 칠하건 내 마음이니까 그렇게 알아요!”
전화를 끊었다.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겠지만 사람 열 받게 하는 재주가 매우 탁월하다.
“어디까지 했지.”
뭘 말하고 있었는지 까먹었다. 채팅창에 누가 친구 이야기 하고 있었다고 알려주었다.
“네. 처음에는 말도 제대로 못 하던 애가 그러니까 좀 기쁘더라고요. 멋있었어요.”
* * *
“생각보다 괜찮은데.”
훈이가 시험지를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국어가 70점, 사회가 50점밖에 안 되고 평균 점수는 73점으로 아마 전교에서 꼴지일 거다.
그런데도 국어 점수가 생각보다 잘 나왔다고 좋아한다.
“왜?”
“아니야.”
“넌 어때? 잘 봤어?”
“응.”
훈이가 내 시험지를 보더니 눈을 크게 뜨고 좋아한다.
“백 점이잖아. 전부 다 맞혔어?”
학교 시험을 백 점 받는 게 쉽진 않지만 어렵지도 않다. 나 말고도 전 과목 백 점 받는 애는 많다.
고등학교 형들이 푸는 모의고사 정도가 되어야 만점에 의미가 있다. 우리 학교에서 모의고사 백 점 받는 사람은 나뿐이니까.
선생님도 아버지도 어머니도 모두 내가 장하다고 기특하다고 하신다.
그런데 자꾸만 이 쉬운 시험마저도 평균 73점밖에 못 받는 훈이가 더 대단해 보인다.
부럽다.
어제 방송에서는 300명이나 되는 사람이 훈이 말에 귀 기울였고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는 훈이 그림 보려고 방문하는 사람이 수십만 명이라고 한다.
오늘 아침에는 훈이가 방송을 했다는 기사도 났다.
“대단하잖아. 멋있네.”
“……아니야.”
훈이가 눈을 깜빡인다.
“하나도 안 멋있어.”
훈이가 유명해서 부러운 게 아니다. 그림을 잘 그려서 부러운 것도 아니다.
그림을 더 잘 그리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는 게 부럽다. 그림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찾아갈 수 있는 게 부럽다.
그걸 뽐내지 않고 당연히 여기는 게 멋있다.
“난 뭐가 하고 싶은 걸까?”
훈이가 나를 빤히 보았다. 웃지도 않고 지루한 표정도 아니고 그냥 기다린다.
내가 답을 알고 있다고 믿는 듯이 바라볼 뿐이다.
그런 훈이를 보고 있으니까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알게 되는 것 같다.
“……아빠는 파란색을 좋아해.”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할아버지는 나무를 좋아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이 훈이한테는 너무 유치한 일 아닐까.
앙리 마르소나 장미래처럼 유명한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벌써 그림 한 점에 100억 원 이상 버는 훈이한테 내 고민과 꿈이 시시해 보이진 않을까.
“뭔데.”
그런 걱정이 훈이 말에 녹아버렸다.
“난 아버지랑 할아버지가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어.”
할머니가 할아버지랑 몰래 전화하는 것도 어머니가 가끔 할아버지네 다녀오시는 것도.
명절에 아버지가 굳이 해외여행을 가시는 것도 모두 할아버지랑 싸워서 그런 거니까.
두 분이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다.
같이 밥도 먹고 그림도 그리고.
“이상해?”
“아니. 당연하잖아.”
훈이가 씩 하고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