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129화 (84/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129화

30. 73점과 100점(2)

앙리 마르소는 노먼 스튜디오에서 보내온 고훈의 콘셉트 아트를 보고 있었다.

그는 <총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총탄>은 기존 고훈의 화풍과는 전혀 다른 그림이었다. 총알의 매끈한 표면이 효과적으로 표현되었고 그 위에 비친 인물들의 표정은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

앙리 마르소가 케일 주스가 든 잔을 들었다. 쌉싸름하면서도 단 음료로 머리를 식히고 다시금 <총탄>을 살폈다.

누구보다도 깊이 고훈을 접한 앙리마저도 이번에는 고훈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껏 소년은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기보다는 이미지를 극대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고훈의 뛰어나고 효과적인 표현력은 묘사에 기반한 것이 아니었다. 감각적인 붓 터치와 색채감 덕분이었다.

그런데 <총탄>은 사실주의를 좇는 학부생이 그렸다고 해도 믿을 만큼 뛰어났다.

겨우 몇 달 만에 이 정도 수준까지 기량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웠다.

‘말이 안 돼.’

그러나 천재 앙리 마르소에게 그 정도 일은 특별하지 않았다.

기술이 제법 늘었다곤 하나 그의 눈에는 개선할 부분이 여전히 많았다.

문제는 구도.

가장 인상적이어야 할 장면을 총알위에 담고 인물을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어디에 배치할지.

이보다 완벽할 순 없었다.

이 천재적인 발상은 단순히 시간을 들인다고 가능한 영역이 아니었다.

한국으로 돌아가고 얼마 안 되어 또다시 이런 걸 만들어내니 앙리 마르소는 납득할 수 없었다.

부우웅-

핸드폰이 울렸다.

번호를 확인한 앙리 마르소가 눈살을 찌푸렸다.

처음 보는 번호였다.

그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극히 일부였기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올 리 없었다.

앙리 마르소가 전화를 받았다.

-마르소?

앳된 목소리와 함께 고훈이 화면에 비쳤다.

“너 뭐야?”

앙리 마르소가 다그쳤다.

“이 번호 어떻게 알았어.”

-미셸이 알려줬어요.

앙리 마르소가 입술을 씰룩댔다.

미셸에게 고훈의 전화번호를 물었을 기억이 떠오른 탓이었다.

고훈의 허락이 없으면 알려줄 수 없다던 그녀가 고훈에게는 자기 번호를 선뜻 알려줬다고 하니 속이 뒤틀렸다.

-선물 고맙다고요.

그러나 이어지는 말이 그의 분노를 다스렸다. 감사 인사를 전하려는 꼬맹이가 제법 기특했다.

“그래.”

-그런데 생일이 잘못되었어요. 내 생일 6월 1일이에요.

“뭐?”

앙리 마르소가 미간을 좁혔다.

그가 파악하기로 고훈의 생일은 분명 6월 23일이었다.

“뭔 소리야. 23일이잖아.”

-사정이 있었어요. 할아버지가 1일이 맞대요.

앙리 마르소가 심각해졌다.

지금껏 이해할 수 없는 여러 정보에 더하여 오늘 받아본 <총탄>과 잘못된 생일까지 더더욱 소년이 의심스러워졌다.

-그런데 내 생일은 어떻게 알았어요?

“……어?”

-나도 몰랐던 생일을 마르소가 어떻게 아냐고요.

차마 뒷조사를 했다고 말할 수 없었던 앙리 마르소가 다급히 변명거리를 찾았다.

“찍었어.”

핸드폰 화면에 고훈의 경멸 어린 시선이 비쳤다.

-저번에도 그렇고 마르소는 거짓말하면 안 될 것 같아요.

“거짓말 아니야.”

-아무튼 축하해 줘서 고마워요. 그럼.

“잠깐.”

앙리 마르소가 통화를 마치려는 고훈을 붙잡았다.

“너 이거 언제 그렸어.”

핸드폰을 TV 방향으로 돌려 <총탄>을 보여주자 고훈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저번 달이었던 것 같은데.

“다른 것도 그리면서 이것도 했다고?”

앙리 마르소는 고작해야 보름도 안 되는 기간에 다른 설정화들과 함께 <총탄>을 그렸다는 소년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네.

인정할 수 없었다.

고작해야 재능이 있다는 것만으로 만 10살 먹은 아이가 이런 작품을 그 짧은 시간에 그릴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2~3년 전만 해도 평범했던 아이가.

-아. 그러고 보니.

고훈이 어떤 과정을 통해 그림을 그리는지 확인하고 싶다던 앙리 마르소의 말을 떠올렸다.

-좀 볼래요? 스케치해 둔 거.

“내놔.”

-뜬금없이 내놓긴 뭘 내놔요. 내 거예요.

고훈이 작업실로 향했다. 불을 켜자 도화지가 이곳저곳에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앙리 마르소가 고훈의 작업실 내부를 보곤 눈살을 찌푸렸다.

“좀 치워라.”

-작업하는 중이라 안 돼요.

“너무 지저분하잖아.”

-자기도 일할 땐 지저분하면서.

“뭐?”

-마르소의 보석 전시할 때 면도도 안 했잖아요.

“그땐 시간이 없었고. 적어도 화구는 정돈하면서 썼어. 저 팔레트 대체 언제 닦았어?”

-몰라요. 사흘 됐나?

“매일 닦아. 안 그러면 탁해져.”

-밝은 물감을 따로 써요.

“정교하게 그리려면 자주 닦아. 그렇게 써선 물감 탁해져.”

-알아요.

“대체 뭐 하려고 내버려 둔 거야? 스튜라도 끓여먹게?”

고훈이 카메라 가득 얼굴을 채웠다. 본인도 아는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해대는 앙리 마르소에게 불만을 가득 드러냈다.

-놀려고 둔 거예요.

“놀려고?”

-버리기 아까우니까 연습할 때 쓰는 거라고요. 자꾸 쫑알쫑알하면 안 보여줄 거예요.1)

앙리 마르소가 콧방귀를 뀌었다.

잔소리가 그치자 고훈이 <총탄>을 구상하며 그렸던 스케치를 한 장씩 보여주었다.

“잠깐. 방금 거 다시 보여 봐.”

-이거요?

“그거 전에. 왜 이렇게 빨리 넘겨? 천천히 넘겨.”

-통화 길게 하면 돈 많이 나와요.

“뭔 소리야. 나눠 내잖아.”

-돈 아껴야 해요.

“빌어먹을. 그림 판 돈 다 어쨌어!”

-집이랑 갤러리 지어야 해서 아끼고 있어요. 얼마 전에 땅도 샀고.

고작해야 푼돈 아낀다고 답답하게 구니 앙리 마르소의 분통이 터졌다.

“줄 테니까 그림이나 제대로 비춰!”

-아. 사진 찍어 보낼게요. 그게 덜 들겠네.

고훈이 전화를 끊었다.

앙리 마르소가 스마트폰을 쥐고 부들부들 떨고 있기를 얼마간, 다시 전화가 왔다.

“뭐야!”

-이메일 주소가 뭐예요?

“문자로 보내면 되잖아!”

-돈 많이 나오면 어떡해요.

“이이이익!”

앙리 마르소가 액정을 부술 듯이 이메일 주소를 적어 보냈다.

-개벽의 앙리. 고글. 맞아요?

“그래.”

-흐.

유치한 아이디에 고훈이 웃고 말았다.

그 웃음소리가 또 한 번 앙리 마르소의 심기를 건드렸다.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은 앙리 마르소는 조금 전 보았던 스케치를 떠올렸다.

얼핏 보기로도 수십 장에 달하는 습작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번뜩이는 발상으로 <총탄>을 그렸을 것으로 추측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그 짧은 시간 안에 그렇게 많은 구도를 생각해냈다고 생각하니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는 건가.’

앙리 마르소가 손을 쥐었다가 펴며 고훈이 그림을 보내오길 기다렸다.

어떤 과정을 거쳐 <총탄>을 그려냈는지 자세히 들여다봐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그렇게 5분, 10분이 흐르고.

한 시간이 지난 시점에 앙리 마르소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가 고훈에게 곧장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오래 이어진 뒤에 고훈이 전화를 받았다.

-마르소?

“뭐 해! 그림 보낸다며!”

-사진 찍고 있어요.

“그냥 찍으면 되지 뭐가 이리 오래 걸려!”

-바닥에 두고 찍으려니까 그림자가 져서 각도 찾고 있어요.

“대충 찍어서 보내!”

-소리 지르지 마요. 귀 아파요.

앙리 마르소가 심호흡을 두어 번 하고 다소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떤 과정 거쳤는지만 보면 되니까 대충 찍어서 보내.”

-왜 자꾸 명령조로 말해요. 마르소한테 보내줄 의무도 없는데.

“뭐?”

-남한테 뭐 부탁할 때는 공손하게 하는 거예요. 다시 해봐요.

앙리 마르소의 얼굴이 뒤틀렸다.

“잊었어? 100만 달러 투자한 것으로도 모자라?”

-그건 노먼한테 한 거잖아요.

앙리 마르소가 입술을 씰룩였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당장에라도 터질 것 같았다.

-싫으면 말고요.

“…….”

-끊어요.

앙리 마르소가 이를 갈며 통화를 끊었다. 스마트폰을 내려다보다가 분을 못 이겨 집어던지려던 차, 소리가 울렸다.

고훈이 이메일이 도착했다는 알람이었다.

마땅치 않게 여기며 메일을 확인한 앙리 마르소가 눈매를 좁혔다.

고훈이 보낸 메일에는 106장의 고용량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그림자가 지지 않는 각도를 찾은 후에도 쉬지 않고 찍어야만 가능했을 듯했다.

“…….”

앙리 마르소가 첫 번째 이미지를 열었다.

순서는 제각각이라 무엇부터 그렸는지 알 수 없었지만, 크게 11개의 콘셉트로 분류할 수 있었다.

최종적으로 선택한 총알에 비친 장면은 구도만 20번 넘게 수정했다.

스케치를 확인하던 앙리 마르소가 작게 신음했다.

중간중간 <총탄> 못지않게 괜찮은 스케치도 있었지만 대부분 고훈이 그렸다고 하기엔 부족해 보였다.

그 어설픈 시도들이 앙리 마르소의 마음을 복잡하게 했다.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재능도 아니고 갑작스레 찾아든 뮤즈도 아니었다.

고훈은 <총탄>을 완성하기 위해 생각하고 그리길 반복했다. 꽤 괜찮은 구도가 나와도 타협하지 않고 과감히 폐기했다.

앙리 마르소 본인처럼.

“…….”

어려서부터 피나는 노력 끝에 성공한 젊은 예술가는 고작해야 천부적 소질에 자신이 뒤처진다고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고훈의 스케치를 보고 있으니 소년이 자신과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106장의 스케치를 그리는 과정이 눈앞에 선했다.

갈피를 잡지 못해서 무작정 연필을 들고 그리다가 지우고 버리고 다시 도전해 보지만 좌절하고.

고민 끝에 괜찮은 그림을 그렸지만 이내 만족할 수 없어서 버려야 하는 안타까움.

여기서 끝인가 싶어도 결코 포기할 수 없어서 그 과정을 수없이 되풀이하는 괴로움.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긴 싸움을 거쳐 만신창이가 되고 나서야 마침내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 고통이 느껴졌다.

재능이라는 말 따위로는 설명할 수 없는, 천재라는 말이 되레 모욕처럼 느껴지는 그 과정을 만 10세 꼬맹이가 해내고 있었다.

<해바라기>, <손님>, <행복>, <서리 밀밭>, <가면> 그리고 <총탄>에 이르기까지.

앙리 마르소는 고훈의 스케치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는 달과 별이 가장 빛나는 시간을 지나 태양이 떠오를 때까지 고훈이 무작위로 보낸 스케치를 재배열했다.

고훈이 어떤 생각을 하며 그렸을지 생각하며, 콘셉트별로 시간 순서를 추측해가며 순서를 정리했다.

그 과정에서.

자신과 소년이 다르지 않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 * *

1)유화 물감은 천천히 마르기에 팔레트 위에 짜 두고 며칠 정도는 사용할 수 있다.

굳어서 사용할 수 없게 되면 긁어내는데, 섬세한 작업을 하는 작가들은 매일 닦아주기도 한다.

작업에 필요한 물감의 양을 완벽히 계산할 수 있다면 버리게 되는 물감이 없고 조금씩 짜서 쓰면 되지 않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쉽지 않다.

물감을 사는 비용조차 아쉬웠던 빈센트 반 고흐라면 남은 물감을 활용할 방법을 찾았을 테고, 남은 물감으로 작은 그림이라도 그렸던 버릇이 있을 것이라는 설정이다.

이는 클로드 모네의 경우도 마찬가지.

그는 남은 물감을 처리하기 위해 작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곤 했다. 굳이 완성하려고 부족한 물감을 더 짜진 않았는데 덕분에 그의 소품에는 미완성 작품이 많다.

아침에 짠 물감을 모두 사용할 때까지 붓을 놓지 않은 클로드 모네의 열정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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