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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반 고흐-128화 (83/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128화

30. 73점과 100점(1)

할아버지가 핸드폰에 차단 설정을 해두셨다.

덕분에 뉴튜브든 웹플릭스든 전부 키즈 콘텐츠로 가득하다.

풀어낼 방법을 찾거나 할아버지를 설득하거나 혹은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이 노래하는 상어 가족을 봐야 할 것 같다.

처음에는 몹시 불만이었지만 자꾸 듣다 보니 중독성이 있어 지금은 노동요처럼 틀어놓는다.

“왜 이런 거 봐?”

점심시간.

차시현이 내 스마트폰 화면을 보더니 의아하게 물었다.

“이거 알아?”

“응. 어릴 때 봤어.”

“지금도 어리잖아.”

“한 살밖에 차이 안 나면서.”

차시현이 볼을 부풀린다.

“이거 완전 아기들 보는 거야.”

“틀어놓고 있으면 좋아. 공부할 때나 그림 그릴 때나.”

이번에는 고개를 갸웃한다.

“일정하게 반복되니까 집중돼.”

“우움.”

녀석이 책상에 팔꿈치를 얹고 볼을 감싼 채 입술을 쭉 내밀었다. 그러고는 문제집을 빤히 본다.

“왜?”

“열심히 하네.”

“다음 주가 시험이니까.”

일반 과목은 그런대로 쫓아갈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만약 특별 과목마저 시험을 보게 되었다면 요 며칠로는 감당키 힘들었으리라.

물끄러미 지켜보던 녀석이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주말에 같이 공부할래? 모르는 거 가르쳐 줄게.”

“주말엔 해바라기 심기로 했어.”

“해바라기?”

“땅 보고 왔다고 했잖아.”

“응.”

“거기에서 키우려고. 씨도 사놨어.”

“그게 재밌어?”

“몰라.”

“그런데 왜 해?”

“해보고 싶으니까.”

차시현이 배고픈 강아지처럼 풀이 죽었다.

수채화를 같이 그리기로 했는데 여러 일이 겹치면서 그러지 못해 아쉬워하는 듯하다.

“해볼래?”

“어떻게 하는지 모르는데.”

“나도 몰라. 그냥 해보는 거야.”

이것저것 찾아보고 들은 이야기도 있지만 제대로 키워본 적은 없다.

“그러다가 못 키우면 어떡해?”

“내년에 다시 해보면 되지.”

고민하던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험공부 안 해도 되면 오고.”

“공부는 평소에 하니까 괜찮아.”

잠시 생각하더니 되묻는다.

“너야말로 안 해도 돼? 지금도 틀리는 거 많잖아.”

“좀 틀리면 어때.”

시험 문제 좀 틀린다고 그림 그리는 데 지장은 없다. 학교는 이런저런 지식을 접하고 경험해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럼 갈래.”

“그래. 토요일 아침에 우리 집으로 와.”

* * *

“주말에 시현이도 가고 싶대요.”

“좋지.”

하교하는 길에 할아버지께 차시현 이야기를 했다.

“걱정이 많은 것 같아요.”

“무슨 걱정?”

“해바라기를 못 키우면 어떡하냐. 시험공부 해야 하지 않냐 같은 걱정이요.”

할아버지가 슬쩍 웃으며 물으셨다.

“훈이는 어떻게 생각하고?”

“좀 못 하면 어때요. 한번 해보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어요.”

못 한다고 시도조차 하지 않으면 발전할 수 없다.

해바라기를 키우는 일도 마찬가지.

싹을 틔울 때까지 해바라기 씨앗이 무엇을 준비하는지, 싹은 언제 나고 꽃은 어떻게 피는지, 그러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지와 같이 경험해 봐야 하는 일도 있다.

문자로는 알 수 없는 감동도 있을 거다.

열심히 키운 해바라기가 시들면 슬프기도 하겠지만 그조차 키워보지 않으면 모를 감정이다.

“자유가 좋은 이유지.”

무슨 말씀인지 몰라 고개를 돌리니 할아버지가 설명을 덧붙였다.

“배운 대로만 행동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겠지. 훈이가 주말에 시험공부를 좀 더 한다면 한두 문제 정도는 더 맞힐 수 있는 것처럼.”

“네.”

“공부 대신 해바라기를 심으면 시현이가 걱정하는 것처럼 점수는 조금 낮게 나올지도 몰라. 그럼 어느 쪽이 더 좋을까?”

“해바라기 심는 거요.”

“왜?”

왜 더 좋은지는 생각해 본 적 없다.

할아버지가 씩 웃으며 답을 내놓으셨다.

“자유라는 게 그런 거야. 항상 더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기 때문에 좋은 게 아니라, 자유는 그 자체로 좋은 거니까.”1)

할아버지는 자유가 그 자체로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부모나 교사가 일찍이 경험해 본 바를 자식 또는 학생에게 알려주어서 그 아이가 훌륭한 대학에 들어가 존경받는 직업을 가져도 의미가 없단다.

자유가 박탈되었기 때문.

자유 의지는 좋은 결과를 낳기 때문에 중요한 게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거다.

이 얼마나 가슴 벅찬 말인가.

장미래도 어느 인터뷰에서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참으로 멋진 사제다.

집에 도착하고 보니 택배 회사 차량이 집 앞에 서 있다. 상체만 한 물건을 꺼냈다.

겉보기로는 액자 같다.

“택배 온다고 문자가 오더니.”

할아버지께 연락이 갔던 모양이다.

“뭔데요?”

“글쎄. 앙리 마르소가 보냈다고 하더구나. 그림인가?”

할아버지 말씀처럼 액자에 넣어서 보낸 그림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앙리 마르소가 내게 보낼 그림이라면 자화상뿐인데, 그건 또 어디다 보관해야 할지 모르겠다.

왜 자꾸 저런 걸 보내는지.

“감사합니다.”

택배원에게 인사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너무 크고 무거워 할아버지가 대신 들어주셨다.

칼을 가져와서 조심스레 포장지를 벗겨내자 여러 장의 캔버스가 포개어 있었다.

60F 캔버스로 보인다.

“…….”

뒤집어져 있어 돌려 보니 선화다.

앙리 마르소의 자화상인데 원본 같진 않고 색칠놀이처럼 선만 따서 그려놓은 자화상이다.

다른 캔버스도 마찬가지다.

“이게 뭐예요?”

“글쎄다.”

할아버지도 고개를 갸웃하신다.

무슨 의미로 보냈는지 모르겠다.

가장 뒤에서 카드를 찾았다. 반대로 열었던 모양.

백합 문장으로 봉인된 밀랍을 뜯었다.

네가 어물쩍 귀국하는 바람에 내 계획이 수포가 되고 말았다.

괘씸하지만 이해해 주지. 나는 마음이 넓으니까.

“뭐라고 해?”

“헛소리요.”

계속 읽었다.

하지만 네가 순순히 말을 잘 들었다면 내 작품을 하나 더 가질 수 있었을 거라는 건 알아둬.

대신 선화를 따서 선물하도록 하지. 색칠놀이를 좋아한다고 하니 몇 점 더 보낸다.

생일 축하한다.

물감 쓰는 법을 익히기에 딱 좋을 것 같은데 시현이한테 줄까 싶다.

“생일 축하한대요.”

“생일?”

내 생일은 6월 1일인데, 23일이 되어서야 도착한 걸 보면 준비하는 데 꽤 시간이 든 듯하다.

워낙에 꼼꼼한 성격이라 원본이랑 크게 차이가 없도록 신경 써서 만들었을 테니 그럴 만도 하다.

“마르소가 어떻게 네 생일을 알고?”

“틀렸잖아요.”

“지금은 23일로 되어 있어. 바꾸려고 준비하고 있지만.”

“무슨 말씀인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좀 복잡한데.”

할아버지가 턱을 쓸며 이야기를 풀어내셨다.

“훈이가 태어났을 때 곧 죽을 것 같다고 했어. 태어나자마자 인큐베이터에 들어갔고.”

“인큐베이터가 뭐예요?”

“아픈 아기들 보호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돼. 나쁜 균 같은 거 안 들어가고 따뜻하게 있을 수 있도록.”

요람 같은 것으로 이해하면 될 듯하다.

“다들 정신이 없었어. 그래서 아빠가 할아버지한테 출생 신고를 부탁했거든.”

“할아버지요?”

“나 말고. 네 아빠의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아빠.”

“……증조할아버지라고 하시면 되잖아요?”

“그래. 훈이 증조할아버지가 아주 못돼서 훈이가 죽는 줄 알고 출생 신고를 안 했던 거야.”

사산아가 많았던 예전에는 일상인데 할아버지는 증조할아버지가 아주 큰 잘못을 한 것처럼 말씀하셨다.

“그러다가 네가 인큐베이터에서 나온 날에 출생 신고를 했는데 생일도 기억 못 해서 그날로 적었던 거야. 엄마아빠가 나중에 알고 고치려고 했는데 너무 바빠서 못 했다고 하더라.”

어머니가 일기에 적어 놓으셨나 보다.

“잘되었지. 어차피 기억도 못 하는 생일이면 차라리 이번 기회에 원래 생일로 고쳐서 알면 되잖아?”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가 지금 상담받고 있으니까 곧 고칠 수 있을 거다. 증조할아버지가 옛날 사람이라 그래.”

증조할아버지 이야기는 아무래도 좋다.

“그럼 23일이나 아팠던 거예요?”

“그래. 난리도 아니었어. 그때 네 엄마랑 아빠, 할머니가 얼마나 울었는데.”

내 생각엔 할아버지가 제일 많이 울었을 것 같다.

“어디가 아팠는데요?”

“태어났는데 울지도 않고. 애가 안 우는 건 숨을 못 쉰다는 거거든. 숨은 쉬어서 다행이었지만 몸도 너무 작은데 막 발광하고. 너무 어린 아기는 힘이 없어서 자기 목도 못 가누거든. 그런데 막 발작하니까 놀랐지.”

막 태어난 아이가 울지도 않고 발작하면 나 같아도 놀랄 것 같다.

“그래도 차차 나아져서 좀 진정하더구나. 그러니까 건강해야 해. 또 아프면 할아버지가 제 명에 못 살아.”

할아버지가 내게 양치질 잘하고 손 잘 씻고 로션 잘 바르고 조금이라도 아프면 꼭 말하라고 당부하시는 게 모두 두 번이나 크게 아팠던 탓인 듯하다.

“그럴게요.”

할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선물이지만 선물이라고 할 수 없는 선화를 작업실로 옮겼다.

마음에 들진 않아도 인사 정도는 해야 할 것 같아서 스마트폰을 찾았다.

앙리 마르소의 번호가 없어서 미셸 플라티니에게 전화했다.

연결음이 길게 이어지다가 그녀의 목소리가 반갑게 들렸다.

-훈아.

“안녕하세요, 미셸. 잘 지내죠?”

-그럼. 너도 잘 지내?

“최고예요.”

미셸이 작게 웃었다.

-무슨 일이야?

“마르소가 선물을 보내서 인사하려는데 번호가 없어서요. 어디로 연락하면 되는지 알려주실 수 있어요?”

-잠깐만.

미셸 플라티니가 곧 메시지를 보냈다.

conard라는 이름으로 저장되어 있다.

내가 알던 conard는 다른 뜻인데 지금은 연인 사이의 애칭처럼 쓰이나 보다.2)

“고마워요. 연락해 볼게요.”

-응. 생일 축하해.

* * *

1)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2)conard[kɔnaːʀ](불): 형용사, 명사 [속어] 멍청한 (사람)

출처 동아출판 프라임 불한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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