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127화
29. 해바라기씨(10)
방태호가 알아봐 준 곳은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이란 한적한 마을로 집에서는 넉넉히 1시간 정도 걸렸다.
수풀이 우거지고 밭도 있으며 가까이에 북한강이 흐르고 있어 마음에 든다.
도심에서는 보기 힘든 곤충들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점도 즐겁다.
한국에는 네덜란드나 프랑스에서 서식하는 곤충과 또 다른 종이 많아서 정확한 이름은 잘 모르겠다.
“할아버지.”
“응?”
“풍뎅이인가 봐요. 예쁘죠?”
집터 주변을 둘러보며 방태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시던 할아버지께 방금 잡은 풍뎅이과로 보이는 곤충을 보여드리니 화들짝 놀라셨다.
곤충을 안 좋아하시나 싶어 방태호에게 들이미니 주춤거린다.
“훈아, 그거 빨리 버려.”
“말 너무 심해요. 이렇게 귀여운 애를 어떻게 버려요.”
“지저분하잖아. 물리면 아프다?”
“뒤뚱거리는 게 귀엽지 않아요?”
손바닥에 올려 자세히 보여줘도 기겁한다.
“아이고. 빨리 놔 주고 손 닦아.”
할아버지가 물티슈까지 꺼내시니 어쩔 도리가 없다.
이렇게 녹색 광택이 예쁜 녀석은 찾아보기 힘든데, 아쉽지만 놓아주었다. 할아버지에게서 물티슈를 넘겨받아 손을 닦던 중 방태호가 땅을 소개했다.
“별장으로 쓰기에 좋아 보입니다. 학장님 댁이랑 그리 멀지 않고 조용하고요.”
“그래 보이네. 여기가 몇 평이라고?”
“대지는 620㎡입니다. 건물 연면적만 신경 쓰시면 호화주택으로 분류되진 않을 겁니다.”
“세금 많이 내는 게 대수인가. 편하게 사는 게 중요하지.”
“해바라기를 키우고 싶어요.”
“해바라기?”
어떻게 할아버지께 선물로 드리게 되었지만 해바라기 밭만은 포기할 수 없다.
“네. 올해는 시기가 지나서 힘들겠지만.”
“서두르면 그렇게 늦지도 않을걸?”
해바라기는 보통 5월쯤 파종을 해야 제대로 큰다고 인터넷에 설명되어 있는데 벌써 6월 중순이다.
전문가는 아니지만 작물은 때를 놓치면 키우기 힘들다고 알고 있다.
“인터넷에선 5월에 씨 뿌려야 한대요.”
“예전 말이야. 날이 워낙 더워져서 이달 안에만 뿌리면 될 거야.”
방태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
“이것저것 쓰는 사람이랑 같이 살면 잡지식이 늘어서 말이지.”
“이것저것 쓰는 사람?”
“와이프가 소설 쓰거든.”
“정말요?”
소설가라고 하면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 떠오른다.
오노레 드 발자크, 귀스타브 플로베르, 에밀 졸라, 기 드 모파상, 찰스 디킨스까지 당시 프랑스에서 이름이 알려진 소설가의 작품은 모두 탐독했다.
방태호의 아내가 소설가라고 하니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꼭 한번 읽어보고 싶다.
“어떤 책 쓰셨어요? 읽고 싶어요.”
“음. 네가 읽기엔 좀 이른 것 같은데.”
방태호가 나를 어린애 취급하는 건 처음이다.
비록 이 시대가 아직 낯설긴 해도 문학 작품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무식하진 않다.
또한 시대를 이해하는 데 문학과 미술, 음악과 같은 문화보다 좋은 일도 없다.
오기가 생겼다.
“사전 찾아가면서 읽으면 돼요.”
“그게 아니라.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그래. 사랑 이야기거든. 조금 복잡한.”
요즘 사람들은 어떻게 마음을 교류하는지,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갈등이 생길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있겠다.
“그게 무슨 문제예요?”
영화에 관람가라는 제도가 있다고 하던데, 폭력이나 선정적인 건 아이들의 정신건강을 위해 어느 정도 분류해 둔다고 들었지만.
사랑 이야기마저 어리다는 이유로 막아설 순 없다.
인류가 가장 지향해야 하고 존속하는 한 끊임없이 고민해야 할 중요한 일 아닌가.
“여기 평당 얼마라 했지?”
한 번 더 따지려는데 할아버지가 화제를 돌리셨다.
“35,000원입니다.”
“흠. 적당해 보이는데. 저 임야도 알아보고 싶은데. 훈이가 해바라기를 키우고 싶다니.”
“공인중개사가 곧 오니 한번 물어보시죠.”
스마트폰을 꺼냈다.
법인 회사 선플라워를 설립할 때 방태호의 아내가 주주로 있어 주었기에 이름을 기억한다.
분명 이한나라는 이름이었는데, 검색해 보니 곧장 소설가라고 소개된다.
대표작 제목은 <피의 낙인>이다.
제목만으로는 감을 잡을 수 없어서 작품 소개란에 들어갔다.
부잣집 도련님이 할아버지의 내연녀를 사랑하게 된다고 소개되어 있다.
주인공의 엄마는 할아버지의 가혹한 학대에 시달리다가 병을 얻어 죽고, 엄마와 연인이었던 여자가 할아버지에게 복수하기 위해 접근한 거란다.
“……?”
이게 무슨 말이지.
단어 뜻을 몰라서 이해 못 하는 이야기는 있었어도 이런 적은 처음이다.
“훈아.”
“네.”
할아버지가 부르신다. 이따 저녁 먹은 뒤에 읽어봐야겠다.
“해바라기 키울 수 있겠어? 보통 일이 아닌데.”
“처음부터 잘할 순 없겠죠. 그래도 해보고 싶어요.”
“그럼 밭에다가 조금만 심어보자. 처음부터 크게 일 벌이면 버거우니까.”
“네.”
“아, 저기 오는 것 같습니다.”
부동산 중개인이 도착했다.
할아버지와 방태호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아무래도 <피의 낙인>이라는 소설이 신경 쓰여 넓적한 돌에 앉아 읽기 시작했다.
* * *
다음 날.
해가 밝아 와 밖으로 나섰다. 집에 계란프라이 냄새가 고소하게 풍긴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일어났어?”
할아버지가 뒤돌아서곤 깜짝 놀랐다.
“또 안 잤어? 시험공부 적당히 하라니까.”
“소설 읽었어요.”
“소설? 무슨 소설?”
“피의 낙인이라고 태호 아저씨네 아주머니가 쓰신 거예요.”
할아버지가 헛웃음 지었다.
“그렇게 재밌었어? 무슨 내용인데?”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설명해도 할아버지는 잘 모르실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야?”
“엄청 복잡하거든요. 주인공이 할아버지랑 사는데 부모는 없어요.”
“음.”
“그런데 할아버지가 엄마를 엄청 괴롭혔나 봐요. 그러다 엄마는 병들어 죽었는데, 그걸 계기로 주인공은 할아버지랑 떨어져 살게 되었어요.”
“원망했구나.”
“네. 그렇게 지내다가 할아버지가 아프다고 해서 내려왔는데 젊은 여자가 곁에 있는 거예요.”
“응?”
“할아버지의 연인이었어요. 나이 차이가 40살이나 나니까 주인공은 그 여자가 할아버지의 재산을 노리고 있다고 의심해요.”
계란프라이를 하시던 할아버지가 뒤돌았다. 미간을 찡그리고 계신다.
“그렇게 의심하면서 그 여자에 대해서 알아가다가 주인공은 자기보다 17살이나 많은 그 사람을 사랑하게 돼요.”
“아니. 잠깐. 그거 네가 읽어도 되는 거야?”
“재밌었어요.”
어깨를 으쓱였다.
할아버지가 뭐라 말씀하시려다가 냄비가 넘치는 바람에 고개를 돌리셨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주인공 엄마랑 그 여자가 결혼하기 전에 연인이었던 거예요. 엄마 입장에서는 동성애를 숨겨야 했었나 봐요. 그렇게 거짓? 위장 결혼했는데 할아버지에게 학대 같은 걸 받다가 죽었거든요. 그걸 복수하려고 접근한 거였어요.”
“너 뭘 본 거야? 응?”
할아버지가 가스레인지를 끄고 국을 떴다. 다가가니 수저를 건네주셔서 나와 할아버지 자리에 놓으며 말했다.
“그런데 그 여자랑 주인공이 진짜 서로를 좋아하게 된 거예요. 궁금하지 않아요?”
“아니. 말이 안 되지. 주인공이 연인의 아들이라며.”
“그러니까요. 그 여자도 처음에는 예전 연인 얼굴이 떠올라서 잘 대해주다가 자기도 모르게 마음에 담은 거예요. 그 갈등 묘사가 정말 엄청나요.”
“암만 그래도 그렇지. 큰일 나. 큰일.”
“맞아요. 둘 다 제정신이 아니에요. 그런데 두 사람이 막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면서 끌어안는 순간 그걸 할아버지에게 들킨 거예요.”
“……그래서?”
“주인공은 할아버지에게 지난날의 한을 다 쏟아내고 여자도 할아버지를 비난하는데, 세상에. 알고 보니 할아버지랑 엄마가 실은 서로를 사랑했던 거예요. 모질게 굴었던 것은 남편이랑 주변 사람을 속이려고 했던 연극이었고요.”
“잉?”
“그 인간들이 어떻게 행동할지, 또 무슨 이야기가 이어질지 궁금해서 멈출 수가 없었어요.”
할아버지가 눈을 끔뻑끔뻑하신다.
저러시는 것도 무리가 아닌 게, 나도 하나 같이 정신 나간 등장인물을 욕하면서 그들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분노하고.
그럼에도 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 섬세한 심리 묘사에 끌린 탓이다.
말만 해서는 <피의 낙인>의 진면목을 이해할 수 없다.
“훈이 핸드폰 가져와 봐.”
“읽어보시게요?”
할아버지에게 핸드폰을 넘겨드렸다. 뭔가를 한참 만지시더니 소설은 안 보시고 돌려주신다.
“봐. 여기 15세 관람가라고 적혀 있지?”
“……네.”
“훈이 몇 살이야?”
“……11살이요.”
“보면 돼? 안 돼.”
“……안 돼요.”
뭘 하시나 싶었거늘.
맘껏 결제하라고 저장해 주신 할아버지 아이디와 결제 방식이 지워져 있었다.
웹플릭스랑 뉴튜브, JH시네마도 로그인이 안 되어 있다.
영화와 드라마 보는 재미를 이제 조금 붙여가고, 정신을 차린 뒤에 처음 읽은 소설도 재밌었는데 너무나 가혹하다.
“보고 싶은 거 많은데.”
“보고 싶은 거 있으면 앞으로 할아버지한테 허락받고 봐.”
의사가 내게 불필요한 자극이 좋지 않다고 해서 예민하게 받아들이시는 것 같다.
“내용이 자극적이라 그렇지 묘사를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저도 소설 등장인물이 이상하다는 것 정도는 알아요.”
“안 돼.”
“예술 하려면 다양한 이야기를 접해야 하잖아요.”
할아버지가 고개를 저으셨다.
15살이 되기 전에는 절대 허락 안 하실 듯하다.
이런 적정관람가는 대체 누가 정하는지. 누굴 죽인다든가, 야한 장면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규정이 너무 빡빡하지 않나 싶다.
* * *
미셸 플라티니가 퇴근 준비를 하던 중, 앙리 마르소의 사무실에서 나오는 직원을 발견했다.
평소에는 앙리가 직원들을 부르는 일이 거의 없는데, 오늘은 꽤 자주 들락거렸다.
“무슨 일 있어?”
“제본시키신 일 있었거든요.”
“제본?”
“사업 아이템 구상 중이신가 봐요. 컬러링북 샘플 나와서 보여드리고 있었어요. 멋있던데요?”
앙리 마르소에게 아무런 이야기를 들은 적 없는 미셸이 고개를 갸웃했다.
‘또 뭔 일이야?’
직접 물어보면 될 일.
“수고했어. 시간 늦었다. 어서 퇴근해.”
그녀가 직원을 보내곤 앙리 마르소를 찾았다.
앙리는 몇 가지 샘플 스케치북을 살피며 심각하게 고민 중이었다. 그가 작품 활동 외에 진지한 모습을 보이는 건 오랜만이라 미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
“뭔데 나한테 말도 없이 준비해?”
“뭘?”
“이거.”
미셸이 컬러링북 샘플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앙리 마르소의 자화상이 선화로 그려져 있었다.
“제본 이렇게 하면 안 돼. 요즘엔 제본을 아예 안 하고 낱장으로 묶어서 팔더라.”
“그래?”
앙리 마르소가 접지를 실로 엮은 양장 제본 방식과 사철 제본 샘플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제작 단가도 높아져서 수익률이랑 판매량에도 영향이 생길걸. 애초에 네 자화상 컬러링북이면 심심풀이로 하려고 사는 사람은 많이 없으니 따로 보관하기 쉽게 낱장으로 주는 게 나아. 상품화하려면 타깃을 확실히 해야 해.”
“고훈이야.”
앙리의 말에 미셸이 눈을 깜빡였다.
“어?”
“고훈이라고. 생일 선물.”
“……팔려고 만드는 게 아니고?”
“네 말대로 책으로 엮어 주는 것보다 낱장으로 보내는 게 낫겠네. 똑똑한데.”
왠일로 진지하나 싶었거늘.
미셸이 한숨을 쉬곤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