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126화
29. 해바라기씨(9)
할아버지가 이상하다.
밥은 안 드시고 입을 벌렸다가 닫길 반복한다. 뭔가 할 말이 있으신 것 같아서 기다리는데 벌써 1분은 지난 것 같다.
답답한 마음에 물었다.
“왜 그러세요.”
“아니다.”
“전 할아버지한테 감추는 거 없는데.”
할아버지가 입을 앙다물고 고민하시더니 조심스레 물어 보신다.
“전에 입원했던 병원 알지?”
“네.”
“거기서 상담해 주던 선생님도 기억하고?”
고작해야 1년도 안 된 일인데 기억하지 못할 리 없다. 고개를 끄덕이자 드디어 본론을 꺼내셨다.
“할아버지 생각에 훈이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것 같아.”
아마 어제 일로 걱정이 많으신 듯하다.
“혹시 훈이는 모르게 아플 수도 있고 안 좋은 영향을 받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검사 한번 받아 볼래?”
“네.”
별일도 아닌 걸 가지고 속을 태우고 계셨던 모양이다.
냉큼 대답하고 열무김치를 집어 먹었다. 빨간 김치들과 달리 열무김치는 맵지도 않고 그리 짜지도 않다.
입과 속이 시원해지니 김치 중에 으뜸이 아닐까 싶다.
고개를 들자 할아버지가 짐짓 놀란 표정을 짓고 있다.
“그래도 되겠어?”
“검사받는 게 뭐 어때서요.”
할아버지가 잠시 생각하시더니 고개를 끄덕이셨다. 내 숟가락 위에 소고기 장조림을 얹어주신다.
이 소고기 장조림과 열무김치라면 두 공기는 거뜬히 먹을 수 있다.
간장이 적당히 밴 소고기는 살짝 질긴데, 그 사이마다 열무김치가 아삭아삭 시원하게 식감을 더하고.
반쯤 먹었을 때 따뜻한 흰 쌀밥을 넣어주면 천국이 따로 없다.
할아버지에게도 소고기 장조림을 얹어드렸다.
최대한 내 입장에서 생각해 주시려고 하지만 역시 내 말을 믿기 힘드신 듯하다.
사실 내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일이니 병원에 가자고 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할아버지와의 유대를 확인한 만큼 앞으로 굳이 증명하려고 노력하진 않을 거다.
문제는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하느냐인데, 농담으로 치부하기엔 이미 너무 멀리 와 있다.
“…….”
어떻게든 되겠지.
설령 세상 모든 사람이 미쳤다고 해도 그림을 그릴 수 있고 할아버지와 함께할 수 있다면 문제없다.
다음 날.
학교를 마치자마자 할아버지와 함께 WH한국병원을 찾았다. 처음 눈을 뜬 곳이기도 하고 두 달이나 머물렀던 탓인지 어쩐지 반갑다.
“훈아,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돼.”
병원 주차장까지 와 놓고도 할아버지가 망설인다.
“괜찮다니까요. 어디 아픈 건 아닌지 검사하는 것뿐이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내가 미쳤을 리 없다고 굳게 믿으시는 덕분에 할아버지답지 않게 갈팡질팡하신다.
예전에 테오도 마찬가지였는데 정작 정신병원에 가라고 그렇게 말해서 스스로 들어갔더니만, 불편한 건 없는지 못되게 구는 인간은 없는지 수시로 편지를 보내오곤 했다.
테오도 할아버지도 나를 그렇게 사랑한다.
* * *
지난 며칠간 김희원은 고훈의 심리 상태를 파악했다.
심도 있는 대화를 통해 고훈이 정돈되고 고급스러운 회화를 구사하고,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데 무리가 없으며 불안 행동이 없음을 확인했다.
고훈은 포테이토 피자, 짜장면, 소고기, 귀뚜라미, 나비, 해바라기, 하늘소와 같은 단어에 몹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동시대 미술, 스펀지빵, 앙리 마르소와 같은 명사, 고유 명사에는 매우 복잡한 심리 상태를 보였다.
또한 문어, 펜싱 등과 같은 단어에서는 극도의 거부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김희원이 다소 긴장한 고수열과 태연한 고훈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크게 걱정하실 건 없어요.”
고수열이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훈이 지금 행복하지?”
“네.”
김희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검사 결과를 보여주었다.
고수열이 고개를 갸웃했다.
“다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만점이 나오는 경우는 없어요. 보통 그런 경우는 매우 위험한 경우고, 훈이 같은 경우엔 스트레스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기능 향상이나 의욕을 위해서도 적당한 스트레스는 도움이 돼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봐요. 도리어 훈이가 교수님을 걱정하잖아요.”
“끄응.”
“다른 검사에서도 모두 정상이에요.”
김희원이 마우스를 움직이다가 고훈을 보았다.
“좋아하는 거랑 싫어하는 게 명확하고 복합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많이 있네요. 이런 것도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단 뜻이에요. 보통 정신질환을 앓는 경우엔 심적으로 둔하거나 예민해지거든요.”
고수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도 논리적으로 하고 욕구에도 충실해요. 지금 훈이가 가장 바라는 건 할아버지예요.”
고수열이 고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훈이 다른 건 필요 없어?”
“맛있는 거요.”
고훈의 대답에 김희원이 웃었다.
“맞아요. 음식에 관심이 많아요. 그래도 너무 많이 먹으면 건강에 안 좋으니까 적당히 먹어야 해?”
“네.”
“다음은 빈센트 반 고흐와 관련한 건데, 훈이 이야기를 들어보면 지금은 조금 긴가민가한 것 같더라고요.”
김희원의 말에 고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훈이는 자기 상황이 이성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걸 명확히 인지하고 있어요. 크게 문제 될 일은 없겠습니다.”
“그럼 왜…….”
고수열은 손자가 왜 본인을 빈센트 반 고흐라고 생각하게 되었는지 알고 싶었다.
그의 마음을 눈치챈 김희원이 예시를 들었다.
“나라는 개념은 학습을 통해 만들어져요.”
고수열과 고훈이 동시에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이 너무 닮아서 김희원이 작게 웃었다.
“철수라는 3살 아이가 있다고 하죠. 철수에게 철수는 파란색이 좋아, 빨간색이 좋아? 라고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하는지 혹시 아세요?”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철수가 파란색을 좋아하는지 빨간색을 좋아하는지 알 수 없었다.
“색만 말하거나 철수는 무슨 색이 좋아. 라고 대답해요.”
고수열과 고훈이 눈썹을 찌푸리며 입을 살짝 벌렸다.
“철수에게는 나라는 개념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무슨 색이 좋아요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불리는 철수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부르죠.”
고민을 이어가던 고수열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고훈은 눈만 깜빡였다.
“흔히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잖아요? 나라는 존재는 객체로 존재할 수 없어요. 훈이가 놓인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면 주변에서 반 고흐 이야기를 많이 하니까 영향을 받을 수 있죠. 검사 결과를 보면 망상으로 보이진 않아요.”
“…….”
“그럼에도 훈이가 본인을 할아버지의 손자라고 명확히 인식하고 있는 건 다른 어떤 말보다 할아버지와의 관계가 중요하고 소중하게 여긴다는 뜻이기도 해요. 시간이 지나서 훈이의 사회화가 좀 더 진행되면 자연스레 해결될 문제 같아요. 사실 지금도 훈이가 심각하게 빈센트 반 고흐라고 주장하는 건 아니니까요.”
고수열이 남은 의문을 던졌다.
“훈이한테 다른 사람들의 말이 안 좋은 영향을 주고 있을까요?”
“아니라고는 할 수 없죠. 그런 스트레스를 잘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혹시 모르니까요.”
“흠.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같은 상황에 반복 노출되어 익숙해지게 하는 방법이 있는데 이건 지금 문제가 많다고 나오고 있어요. 익숙해질 수 없는 스트레스도 있거든요.”
고수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또 하나는 스트레스의 원인에서 떨어지는 거죠. 훈이를 바꿀 순 없으니까 환경을 바꾸는 거예요.”
김희원이 되레 할아버지를 걱정하는 고훈을 보며 말했다.
“훈이는 지금 자기가 누군지 확실히 알고 있어요. 다른 아이 같으면 이렇게 상담을 같이 받지 않게 했을 거예요.”
“흠.”
“훈이는 자기가 고훈이고 할아버지의 손자라는 걸 부정하지 않아요. 걱정하시는 일도 훈이가 성장하면서 자연스레 해결될 거예요.”
김희원은 고훈의 상태를 감수성이 풍부한 어린아이의 일시적인 현상으로 판단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고훈이 고수열의 등을 토닥였다.
고수열의 걱정과 달리 고훈은 무척 행복하고 외부 스트레스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되레 할아버지를 저렇게 걱정하니 기특할 뿐이었다.
“선생님도 저 안 미쳤다고 하잖아요.”
“씁.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네가 미치긴 왜 미쳐?”
“자기가 예전에 죽은 화가라고 생각하면 미친 걸 수도 있죠.”
“얘가 진짜 못 하는 말이 없어? 한 번만 더 그런 말 하면 할아버지한테 혼나!”
고수열과 고훈이 아웅다웅 입씨름을 시작했다.
김희원은 지난 며칠을 떠올리며, 저렇게 건강한 가정이라면 고훈의 혼란도 곧 진정되리라 판단했다.
“사실 훈이 상태가 너무 좋아서 굳이 그럴 필요도 없을 것 같아요. 혹시 걱정되신다면 방학 때 잠시 조용한 곳에 가 계시는 것도 좋고요.”
“흠. 알겠습니다.”
고수열과 고훈이 김희원에게 인사했다.
잠시 후.
집으로 가는 길에 고훈의 핸드폰이 울렸다. 방태호가 걸어 온 전화였다.
“네, 아저씨.”
-어. 훈아, 저번에 했던 땅 이야기 있잖아. 학장님께도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 집으로 가려는데.
“지금 집 가고 있어요. 할아버지, 얼마나 걸려요?”
“20분 정도? 방 대표야?”
“네. 아저씨, 20분 정도 걸려요.”
-오케이. 이따 보자.
“네.”
고훈이 통화를 마쳤다.
“무슨 일이야? 방송 때문인가?”
“땅 사고 싶다고 했는데 할아버지랑 같이 말하려고 오신대요.”
고수열이 눈을 깜빡였다.
“땅?”
“네.”
“무슨 땅?”
고훈이 입을 열었다가 순간 멈칫했다.
할아버지에게 쫓겨나면 혼자 지낼 땅을 구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이제는 정말 모든 것을 숨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던 시간이 참으로 짧게 끝나고 말았다.
“왜 말이 없어?”
고수열의 독촉에 고훈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할아버지 퇴임 선물이요.”
“……응?”
“퇴임하시면 저랑 같이 공기 좋은 곳에 가서 그림도 그리고 조용히 살아요.”
고수열이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갸웃했다.
친구들에게서 손자에게 손편지 선물을 받았다, 안마권을 받았다, 종이접기로 만든 꽃을 받았다는 자랑을 듣긴 했어도 땅을 선물 받았단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그걸 왜 네가 사? 네가 돈이 어디 있다고.”
“돈은 많아요.”
“……그렇긴 하지만. 아니, 어느 손자가 할아버지 퇴임한다고 땅을 사 줘?”
혼자 살 생각이었다고 말할 수 없었기에 고훈은 어떻게든 고수열을 납득시켜야 했다.
“의사 선생님도 그랬잖아요. 조용한 곳에서 시간 보내면 좋다고.”
고수열이 눈을 깜빡였다.
전문의가 괜찮다고는 했지만 확실히 정신을 차린 손자가 너무 빨리, 많은 일을 경험했다고 생각했다.
김희원의 말대로 지난 1년간 고훈은 너무나 많은 정보에 노출되었고 그에 따라 잠시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곧 있으면 방학도 하고 하니, 조용하게 지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 일단 그렇게 하기로 하고. 땅은 할아버지가 알아보마.”
“할아버지 선물을 할아버지가 사면 어떡해요.”
“허헛참.”
고수열이 황당하여 헛웃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