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125화
29. 해바라기씨(8)
할아버지가 안도하며 숨을 내쉬었다. 한참을 그러고 계시다가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 이수진의 일기를 통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셨을 텐데, 나를 대하는 마음만은 변치 않으셨던 듯하다.
“할아버지.”
걱정스레 부르자 잔뜩 지친 얼굴을 드셨다.
갑자기 오래전에 죽은 사람이라는 이상한 말을 꺼낸 것으로도 모자라 손자가 아니라고 하니 많이 놀라신 듯하다.
무리도 아니다.
“또 한 번 그런 말 꺼내면 그땐 정말 혼날 줄 알아.”
“……네.”
그래.
할아버지 말씀처럼 설령 피가 이어져 있지 않다고 해도 나는 이분을 친할아버지보다도 마음 깊이 우러러보고 친아버지보다도 가깝게 느낀다.
아직 모든 오해가 풀리진 않았지만 그 마음만은 변치 않으리라.
할아버지가 끙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밥 먹자.”
할아버지가 싱크대로 향하시더니 세제 물에 담가 둔 설거짓거리를 보곤 스마트폰을 꺼냈다.
“시켜 먹어야겠다. 포테이토 피자 먹을래?”
항상 먹던 피자를 먹겠냐는 질문일 뿐이다.
다만 포테이토 피자를 싫어하는 ‘고훈’에게는 결코 하지 않을 말씀이라 자꾸만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네.”
할아버지가 피자를 주문하곤 거실 소파에 축 늘어졌다. 무릎에 손을 얹자 앓는 소리를 내신다.
“이 녀석아, 오늘 10년은 늙는 것 같다.”
“……전 20년 정도요.”
“농담이 나와?”
할아버지가 몸을 일으키더니 나를 빤히 관찰하신다. 이마에 손을 얹어 열이 있는지도 확인했다.
“어디 아픈 것 같아요?”
“그래.”
예전에 죽은 화가라고 했으니 아프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제 이야기 좀 하자꾸나. 왜 그런 생각을 했어? 반 고흐라니. 무슨 말이야.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준 할아버지께 굳이 내가 누군지 알릴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기사 때문에 그래?”
할아버지가 나를 ‘빈센트 반 고흐’의 아류로 평하거나 ‘작은 반 고흐’로 칭하는 언론과 평단을 언급하셨다.
비단 그들뿐만이 아니라 주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이미지를 벗기 위해서 <가면>을 그렸으니, 그런 심적 부담감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는 듯하다.
“아니요.”
“그럼?”
끝까지 말씀드려야 할지, 이쯤에서 덮어두어야 할지. 혹은 할아버지의 의심에 동조해서 어물쩍 넘어가는 게 좋을지.
무엇이 정답인지 모르겠다.
다만 할아버지는 솔직해져도 당신을 잃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주셨다.
“기억이 나요. 어떻게 살았는지.”
할아버지가 눈매를 좁혔다.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서 어떻게 죽었는지 말씀드렸잖아요?”
작년 겨울에 갔던 오베르 쉬르 우아즈 이야기를 꺼냈다.
마틴 얀센과 반 고흐 연구소 직원들이 찾던 <나무 덤불>의 장소를 알려주었던 일이라면 어느 정도 설명이 될까 싶다.
할아버지가 고민에 빠지셨다.
아마 짐작 가는 일이 꽤 있을 거다.
한국말은 제대로 못 하면서 불어나 네덜란드어는 곧잘 한다든지, 갑자기 그림을 잘 그리게 되었다든지.
“신기하긴 하지만 비약이 있구나.”
할아버지가 뜻밖의 이야기를 꺼내셨다.
“할아버지가 봤을 때 훈이는 관찰력이 좋아. 습관이 되어 있어.”
어딜 가든 주변을 둘러보는 걸 말씀하시는 거다.
“병원에 있을 때 상담받았던 일 기억 나지?”
“네.”
“처음 간 방을 정확히 그렸잖니. 장소를 발견한 것도 나무 덤불하고 엽서를 보고 알았고.”
건물 때문에 가려져 있던 곳을 엽서를 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으니, 할아버지 입장에서는 그 일이 근거가 될 순 없을 거다.
나로서는 단서가 필요했을 뿐이지만 말이다.
“다른 나라 말도 잘하잖아요.”
“엄마 일기 보면 3년 전부터 말문이 트였다고 하더구나. 빠르긴 해도 그걸로 설명하기엔 무리가 있구나. 빈센트 반 고흐가 쓰던 말이 지금도 통용될지도 의문이고.”
“…….”
생각해 보면 언어에 관련해서는 나도 의문이다.
새로 만들어진 단어를 익히고 있지만 처음부터 할아버지나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데 큰 문제는 없었다.
분명 138년 전과 지금의 언어는 다르고 서로 이해하기 어려움에도 나는 자연스럽게 지금의 언어를 사용한다.
“그건 저도 모르겠어요.”
“그림도. 네 그림이 반 고흐 느낌이 있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영향을 받은 느낌이지 정확히 똑같진 않잖느냐.”
“그건 다른 그림 보면서 배우는 중이라 그래요.”
할아버지가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러면 정신은.”
“네?”
“반 고흐는 정신질환을 앓았잖아. 할아버지가 보기엔 훈이가 그렇게 보이진 않은데.”
“……몸이 건강해져서 괜찮아진 거 아니에요?”
“그렇게 딱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나?”
할아버지가 고개를 저으셨다.
“평생을 정신질환으로 고통받던 사람이 몸이 건강해졌다고 곧장 정상이 될 리가 없잖아. 안 그래?”
“…….”
대답할 수 없다.
할아버지 말씀을 들어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죽기 직전에는 정말 힘들어 환청이 들리지 않을 때도 스스로 망가졌다고 생각했으니까.1)
환청과 불안, 때때로 주체하기 힘든 감정 변화가 전혀 없는 게 가능할까?
혹은 나았다고 해도 이렇게 한순간에 멀쩡해질 수 있나?
전문 지식이 없는 나와 할아버지로서는 알 방도가 없다. 할아버지가 제기한 의문에 반박할 수도 없다.
내가 나인 것을 증명하는 게 이리도 어렵다.
“정말 네가 빈센트 반 고흐인 것 같아?”
더 말해 무엇하랴.
중요한 건 할아버지가 할아버지고 내가 이분의 손자라는 거다.
“정말 그래?”
“모르겠어요. 이젠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피자가 도착했다.
* * *
다음 날.
고수열이 고훈을 진료했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김희원을 찾았다.
이미 유명인이 된 손자에 관한 안 좋은 소문이 날 것을 우려하여 홀로 방문했다.
김희원이 고수열을 발견하곤 반갑게 인사했다.
“교수님.”
고수열도 정중히 인사하고 마주 앉았다.
“상담하실 게 있으시다고…….”
“네.”
고수열이 숨을 길게 내쉬곤 입을 뗐다.
“훈이 이야기인데 모쪼록.”
“네. 걱정 마세요.”
두 달간 고훈을 담당하며 개인적인 관계도 형성하기도 했고 의사로서도 환자의 신상은 지켜줘야만 했다.
“훈이가 많이 혼란스러운 것 같아요.”
고수열이 조심스레 이야기를 풀어냈다. 손자 고훈이 과거 자신과 지금이 다르다고 생각해 왔고 어제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상세히 전달했다.
김희원은 때때로 고수열에게 질문을 던지기도 하며 귀 기울였다.
“우선 훈이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건 아셔야 해요. 어머니 일기 속의 자신과 지금이 너무 다르니 충격일 수밖에요.”
고수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훈이처럼 완전히 기억을 잃는 경우는 드물어요. 또 사회화 과정도 일반적이지 않고요.”
고수열이 미간을 좁히며 상체를 기울였다.
“교수님도 잘 아시다시피 훈이는 지능도 이성도 성인 수준이에요. 그런 아이가 갑자기 지식이 배제된 상태에 놓였죠.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어요. 자기가 왜 이런지, 갑자기 주어진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겠죠. 다른 아이들이었으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도 비판적으로요.”
김희원이 펜을 한 바퀴 돌렸다.
“혹시 훈이가 빈센트 반 고흐 같다는 말을 많이 들었나요?”
“그런 기사가 많이 나오긴 했어요. 주변에서도 그랬고.”
“훈이가 반 고흐에 관련한 글도 많이 봤고요?”
“네. 화가 이야기를 좋아해서 반 고흐뿐만 아니라 다른 화가 이야기도 찾아서 보고 그래요.”
생각에 잠긴 김희원이 펜으로 책상을 툭툭 두드렸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과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로서의 오랜 경험으로 고훈의 상태를 추측해 보았다.
“주변에서 얻은 정보를 취합해서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고 그걸 믿게 되는 경우도 있어요.”
“그런 일이 정말 가능해요?”
고수열이 확인하듯 물었다.
“황당하게 들리시겠지만 훈이의 특별한 상황을 고려해 보셔야 해요. 지능 수준은 높은데 갑자기 생전 모르는 상황에 처하고 자기가 누군지 기억도 안 나요. 할 수 있는 건 주변 정보를 통해 짐작하는 건데, 그게 반복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믿게 되죠.”
“…….”
“하지만 크게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 보여요.”
“어떻게 걱정을 안 하겠어요.”
김희원이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고수열을 안심시켰다.
“이야기 들어보니 대처를 잘하셨어요. 훈이 생각을 부정하지 않으시고 대화를 이어가셨잖아요? 훈이도 교수님을 부정하는 건 아니고.”
“네.”
“훈이에게는 자기를 증명할 존재가 교수님뿐인 거예요. 어제 대화로 할아버지의 손자라는 포지션을 인지하게 되었으니 차차 나아질 겁니다.”
고수열은 안도하면서도 걱정을 완전히 덜어낼 수 없었다.
“혹시 걱정되신다면 한번 검사를 해보도록 해요. 훈이가 교수님과 이성적인 대화가 가능하니 제 생각엔 크게 문제가 없을 것 같은데 혹시 또 모르니까요.”
“어떤 검사를…….”
“혹시 정신질환이 있는 건 아닌가 걱정하시는 거죠? 망상 장애라든가.”
“모르겠어요.”
고수열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훈이가 정신적으로 이상하다곤 생각하지 않아요. 다만, 그 애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게 제 문제는 아닐까 하고……. 환경이라든가.”
고수열은 문제의 원인을 본인에게서 찾았다.
김희원은 그런 그를 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작년 두 사람이 서로를 대하는 모습을 지켜봤던 터라 큰 문제가 있으리라곤 생각지 않았다.
“그러진 않을 거예요.”
“네.”
고수열이 한숨을 내쉬곤 물었다.
“그 망상이라는 게 병이 되기도 합니까?”
“네. 질병으로 분류되어 있어요.”
“다른 일은 전혀 문제가 없는데도?”
“일상에서 딱히 문제 되는 건 아니에요. 대부분 자기 생각이 옳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자각하지 못하고 심해지면 문제가 생길 수 있죠.”
김희원이 불안해하는 고수열을 다시 한번 안심시켰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검사는 해봐야겠지만 훈이에겐 큰 문제가 없는 것 같아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해결될 문제라는 걸 증명하는 검사라고 생각하세요.”
고수열이 눈을 감았다.
손자에게 정신과에 가보자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많은 부모가 같은 마음이기에 김희원이 고수열을 위로했다.
“단어는 잘 선택하시되 솔직하게 말씀하시는 게 제일 좋아요. 괜히 생각해서 거짓말로 데려오면 배신감을 느끼기도 하거든요.”
고수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가 괜찮습니까?”
“편한 시간에 방문해 주세요. 혹시 몰라서 말씀드린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요.”
* * *
1)2020년, 11월 3일. 네덜란드 그로닝겐대학 메디컬 센터 연구팀은 국제조울증저널(UBD)을 통해 빈센트 반 고흐의 자살을 급성 기질성 뇌증후군에 의한 행위라고 주장했다.
네덜란드 그로닝겐대학 메디컬 센터 연구팀은 빈센트 반 고흐가 급성 기질성 뇌증후군을 두 차례 겪었다고 밝히며, 기존 그가 경계성 인격 장애 및 조현병을 앓았다는 정설을 반박했다.
급성 기질성 뇌증후군은 과음과 영양실조, 수면 부족, 정신적 고갈 등으로 뇌의 기능 장애가 발생하는 증후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