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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반 고흐-124화 (79/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124화

29. 해바라기씨(7)

법률사무소에 들렀다가 오니 훈이가 이상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붙잡고 물어도 말이 없다.

“훈아, 왜 그래. 응?”

이대로 두면 안 될 듯해 끌어안자 고사리 같은 손으로 밀어내려 한다.

몹시 불안해한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품 안에서 떨고 있으니 당황스럽다.

등을 토닥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생각할 거리가 많아 지저분했던 집안이 제법 정리되어 있다.

‘저건.’

수진이 일기가 바닥에 떨어져 있다.

정돈하던 중에 발견한 듯.

집 청소를 게을리해서 훈이가 엄마 일기를 본 것이다.

사고 당시 충격이 떠오른 걸까.

기억이 조금은 돌아온 걸까.

그래서 이렇게 힘들어하는 걸까.

나를 밀어내려고 하던 녀석이 어느새 꼭 껴안겨 끅끅거린다.

“괜찮아. 괜찮아.”

우선은 안심시켜야 한다.

“……죄송해요.”

훈이가 서럽게 읊조렸다.

울어서 설움을 토해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럴 수만 있다면 그 눈물에 빠져 죽더라도 기꺼우리라.

“뭐가 죄송해. 그럴 거 하나 없어.”

통곡하기 시작한 훈이를 안고 한동안 그렇게 있었다.

얼마나 흘렀을까.

훈이를 무릎에 앉히고 뒤에서 안았다. 이제는 펑펑 울었던 게 부끄러운지 심통이 나 있다.

“이제 놔주세요.”

“안 돼, 이 녀석아.”

“안 울게요. 도망가지 않고.”

“안 돼.”

가만있더니 슬쩍 돌아서려 한다.

손에 힘을 풀자 나를 보다가 고개를 숙인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고개를 든다.

총기와 호기심으로 가득하던 눈이 불안과 두려움에 떨고 있다.

평소에는 무슨 일이든 똑 부러지게 하던 아이가 왜 이러는지 알 수 없다.

“훈아.”

손을 잡았다.

“말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해도 돼.”

훈이가 고개를 젓는다.

“만약에 꼭 해야 하는 말이 있으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 할아버지는 항상 네 편이니까.”

고개를 숙인다.

얼굴을 감싸니 갑자기 와락 달려든다. 파르르 떠는 몸으로 꼭 끌어안는다.

마치 곧 어디론가 갈 것처럼.

이별을 고하는 듯한 행동에 당혹스럽다.

“사랑해요.”

귓가에 전한 훈이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떨어져 앉아서, 여전히 불안한 얼굴로 힘겹게 입을 뗀다.

“저는. ……고훈이 아니에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훈아?”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린다.

“저는. 할아버지가 생각하는 고훈이 아니에요. 할아버지.”

알 수 없는 말을 하던 훈이가 목이 잠긴 듯 침을 삼킨다.

“……손자가 아니에요.”

순간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눈물을 그렁대는 눈을 지켜볼 뿐이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그런 말이 어딨어!”

훈이 앞에서는 되도록 화를 내지 않으려고 했건만 그런 다짐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다.

“누가 그러디? 응? 어떤 놈이 그딴 말을 해? 기자들이 그래?”

고개를 숙이고 젓기만 할 뿐이다.

가슴이 옥죄는 듯하다.

“말을 해야 알 거 아니냐. 할아버지 죽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내가 일찍 죽을까 봐.

세상에 혼자 남는 걸 무서워하는 훈이에게 해선 안 될 말을 뱉었다.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훈이가 한 말이 너무 충격이라 말이 앞선다.

“……알고 계시잖아요.”

훈이가 주먹을 꽉 쥔 채 입을 열었다.

겨우 꺼낸 말도 이해할 수 없다.

“뭘 알아? 응?”

“전 스펀지빵도 안 좋아하고. 포테이토 피자 좋아하고. 그림도 잘 그리고.”

“……어?”

얘가 뭘 잘못 먹었나.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다가 문득 수진이의 일기가 생각났다.

아마 스펀지빵을 좋아하고, 포테이토 피자를 안 먹는단 이야기를 본 것 같다.

어렸을 때 그린 그림도 봤겠지.

사고를 겪기 전 자신과 지금이 너무나 다르기에 이러는 건가 싶다.

“저는. 할아버지가 아는 고훈이 아니에요. 저는.”

“훈아.”

눈물을 닦으며 달랬다.

“유럽 여행 갔다가 돌아왔을 때 생각나?”

고개를 끄덕인다.

“할아버지가 말했지. 기억이 있든 없든 할아버지 손자라는 건 변치 않다고.”

“그게 아니라.”

“훈아.”

이 아이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모른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차차 들어주면 될 일.

이 아이를.

불안과 두려움으로 떠는 훈이를 안심시키는 것이 우선이다.

“기억이 없는데 어떻게 똑같겠어. 좋아하고 싫어하는 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어. 할아버지도 예전엔 기름진 음식 좋아했어.”

훈이가 고개를 세차게 젓는다.

“그래도 네가 내 손자라는 게 달라져? 내가 네 할애비인 게 달라져?”

답답한 듯 말을 하려다가 삼키길 반복한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아서 기다리니 겨우 입을 연다.

“전 훈이가 아니에요.”

“그럼 누구야.”

* * *

각오한 일이다.

나를 놓아주지 않고 꽉 끌어안아 주셔서 그 품이 너무나 따뜻해서 더는 속일 수 없었다.

그래서 굳게 마음먹었는데 막상 누구냐는 질문을 받으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비록 우연으로 얻었을지라도 내 생에 가장 큰 행복을 저버리는 게 쉽지 않다.

할아버지를.

이분을 거짓으로 대할 수 없다.

“……빈센트. 빈센트 반 고흐예요.”

차마 할아버지를 볼 수 없어 고개를 숙였다.

믿을 리 없다.

나조차 이 기적 같은 상황을 이해할 수 없으니, 아마 미쳤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른다.

한동안 그렇게 아무런 말 없이 있으니 할아버지가 뺨을 감싸 들었다.

내가 누구라고 밝혔을 때 할아버지가 어떻게 나오실지 지난 며칠간 상상해 보았다.

정신병원에 데려가진 않을까.

꿀밤이라도 먹이며 웃진 않으실까.

헛소리 취급하시겠지.

어쩌면 화를 내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할아버지는 평소와 같은 얼굴이었다.

“훈아.”

“…….”

“할아버지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당연하다.

죽은 손자의 몸에 백 년도 전에 죽은 남자가 깃들었다고 누가 상상이나 해봤을까.

내가 말을 꺼내지만 않았다면 할아버지는 사랑하는 손자와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거다.

숨기고 살면 될 것을.

그저 죄책감을 안고 살고 싶지 않다는 욕심으로 할아버지에게 또 다른 상처를 준 거다.

“그래도 훈이가 하는 말이니까 이해해 보려고 해.”

“……네.”

할아버지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훈이가 기억 잃기 전이랑 지금이랑 다르다는 건 할아버지도 알고 있어. 엄마 일기랑 다르더라. 그림만 봐도 그래.”

얼핏 들으면 나와 고훈을 분리해서 생각하시는 것처럼 들리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편의적인 해석이다.

할아버지 입장에서는 나와 고훈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같은 사람인데 기억을 잃었기 때문에 다르다고 생각하시는 거니 이렇게 말씀할 수 있는 거다.

“모르겠다. 네 말대로 설사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모르겠어.”

할아버지의 말씀에 고개를 들었다.

“병원에서 깨서 할아버지랑 밥도 같이 먹고 잠도 자고. 그림도 그리고 여행도 다니고 책도 같이 읽던 것도 네가 아니었어?”

그건 나다.

분명 나다.

고개를 끄덕이니 할아버지가 또 한숨을 푹 내쉰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이해하려고 필사적이시다.

“할아버지랑 같이 살았던 건 네가 맞지?”

그렇긴 한데 나조차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이 녀석아, 말을 해야 할 거 아니야.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러고 있으면 뭐가 해결돼?”

“…….”

할아버지 말씀이 맞다.

할아버지를 잃는 게 두려워서 잠시 잊고 있었지만, 다가가지도 않고서 서로를 이해할 방법은 없다.

차시현에게는 잘난 척하며 조언한 주제에 정작 나는 그 아이보다 못하다.

“맞아요.”

목이 잠겨 겨우 대답했다.

“그래.”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볼을 감싼다.

“할아버지는 훈이랑 같이 살아서 너무 좋은데. 훈이는 싫어?”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럼?”

내가 빈센트라는 걸 증명할 방법은 없다.

설령 이야기를 합리적으로 풀어낸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까? 나조차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일을?

빈센트라고 직접 말씀드렸음에도 이렇게 반응하실 수밖에 없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귀신 들렸다는 걸 생각할 리 없으니까.

“할아버지랑 같이 살았어요. 병원에서 깬 뒤로 쭉. 너무 행복했어요. 만약 지금처럼 살 수 있으면 뭐든 할 거예요. 그런데. 저는 할아버지 손자가 아니에요.”

상식적인 선에서 내가 설명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자꾸 헛소리할 거야!”

할아버지의 노성에 깜짝 놀랐다. 나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다.

“네가 내 손자가 아니면 뭐야. 같이 밥 먹고! 웃고! 등 밀어주고 했던 넌 누구냐고!”

“빈센.”

대답을 마치기도 전에 할아버지가 내 팔을 부여잡고 흔들었다.

“훈아, 내가 누구야.”

할아버지의 얼굴이 너무나 필사적이라서 너무나 슬퍼서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

“누구냐고!”

“……할아버지.”

“그래! 네 할애비다. 네가 꿈을 꿨든 뭘 어쨌든 너랑 같이 산 할애비라고. 내 이름이 개똥이든 홍길동이든 할애빈 할애비야!”

“…….”

“그래. 설령 네가 훈이가 아니라고 치자. 그런다고 너랑 내가 함께한 시간이 달라져?”

아니다.

난 적어도 진심으로 대했다.

“할아버지는 정말 모르겠어. 훈이가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 진짜 모르겠어.”

너무 힘들어하셔서 혹시 쓰러지진 않을까 걱정된다.

“할아버지가 훈이 엄청 오랜만에 본다고 했지?”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랑 아빠랑 싸웠다고 말한 적 있지? 그래서 할아버지는 훈이가 말하는 것도 제대로 못 들었어. 그렇게 평생 못 만날 줄 알았어.”

“…….”

“기억할 거야.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에 집착하지 말자고 했지? 즐거운 일도 행복한 일도 쌓아나가자고. 그게 가족이라고.”

“…….”

“할아버지가 얼마나 기쁜 줄 알아? 너 밥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고 하는 게 그냥 하는 말 같았어? 할아버진 훈이 위해서는 뭐든 할 수 있어. 그게 혈육이라서 그래? 할아버지는 아들도 안 보고 살았어!”

“…….”

“네가 사랑스럽고 자랑스럽다고. 가끔 엉뚱한 짓 하는 것도 귀여워. 눈에 넣어도 안 아파! 할아버지 숟가락에 고기 얹어주는 것도 낑낑대면서 등 밀어주는 것도 조잘조잘 이야기하는 것도 너무 좋아. 처음 깨어났을 때보다 오늘 더 사랑하고 내일은 더 사랑할 거야.”

“할아버지.”

“그래!”

이분은.

정말로 나를 이해하려고 하신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꺼내는 꼬맹이의 말을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게 아니라, 피가 이어져 있지 않다는 가정을 두고 말씀하신다.

모르겠다.

말씀으로나마 피가 이어져 있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할 수 있는 게, 그럴 리 없다는 믿음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나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하지만.

“내가 네 할애비라고. 그럼 넌 뭐겠어?”

적어도 난 이분을 내 할아버지로 여기고 있다.

장미래를 속으로는 이모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방태호를 아저씨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과 달리.

이분만큼은 진실로 그리 생각한다.

“……할아버지 손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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