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123화 (78/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123화

29. 해바라기씨(6)

“그런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이인호가 펜을 돌리며 물었다.

그녀의 말대로 협회와 평단 그리고 일부 예술가들은 큰 권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언론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 장미래가 한 말을 기사화하여 그녀에게 좋을 리 없었다.

장미래가 싱긋 웃었다.

“안 괜찮아요.”

이제 고작 만 31살.

앳된 얼굴을 이제 막 벗어난 젊은 예술가는 160㎝도 되지 않아 보였다. 체구도 작고 마른 편이었다.

“힘들어도 싸워야죠.”

이인호가 마른침을 삼키며 장미래를 바로 보았다.

“지금도 생계 때문에 한 끼 챙겨 먹지도 못하는 사람이 많아요. 아는 사람 중엔 굶어 죽은 사람도 있어요.”

2028년에 다른 이유도 아니고 굶어 죽는 사람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아르바이트라도 하면 되지 않느냐 하고 생각할 수 있는데. 글쎄요. 일단 빠르면 초등학교부터 늦어도 고등학교부터 대학 졸업할 때까지 예술만 해온 사람이 평범한 직장을 얻긴 쉽지 않아요.”

이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바이트도 마찬가지예요. 그것도 서른 먹기 전 일이지 그 이후로는 아르바이트 구하는 것도 쉽지 않아요. 결국 공장이나 물류센터처럼 몸 쓰는 일 해야 하는데, 하루 나가면 몸이 진짜 부서질 것처럼 힘들거든요.”

이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라에서 그런 예술인들을 위해 마련한 기금이나, 국전 같은 기회가 애먼 사람에게 가니까 싸워야죠. 당연히.”

장미래의 목소리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예전에는 제가 그 기회를 박탈당해서 그게 너무 분해서 들이박았는데.”

이인호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지금은 저랑 같이 공부한 사람들,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있잖아요. 아무것도 안 하면서 어떻게 그 사람들을 볼 수 있겠어요.”

말을 마치고 씩 웃는 장미래가 그보다 커 보일 수 없었다.

* * *

“맙소사.”

콘셉트 아트를 수령하고자 고수열의 자택을 방문한 방태호 대표가 입을 벌렸다.

고훈이 준비한 작품은 두 점으로 각각 <함정>과 <총탄>이란 제목이 붙어 있었다.

방태호는 <총탄> 앞에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정면으로 쇄도하는 황금빛 총알 표면에 드러난 등장인물들의 감정이 그대로 전해졌다.

레이몽드의 결의, 뤼팽의 당혹, 이지도르의 경악과 헐록의 절망이 절절히 드러나 있었다.

그가 알고 있던 콘셉트 아트가 아니었다.

<총탄>은 한 예술가가 혼을 담아낸 듯한 아우라를 풍기고 있었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고훈의 화풍이 또 한 번 달라졌다는 점이었다.

작년 <해바라기>가 한국 전통화 기풍이 접목된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했다면 <서리 밀밭>은 탈인상주의가 한껏 농후해진 느낌이었다.

<가면>은 행위를 더함으로써 새롭게 보였는데 어디까지나 고훈의 기반은 질감과 색감을 강조하는 유화였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조부 고수열을 연상시키는 듯했다.

사실적인 표현에 왜곡을 얹어 새로운 의미를 부여, 그 의미를 명확히 하는 방식이었다.

‘어떻게 이런 발상을.’

<서리 밀밭>부터 <가면>, <총탄>에 이르기까지 고훈은 매 작품 그를 놀라게 했다.

방태호는 확신했다.

노먼 프로덕션과 한 계약 내용대로 영화 상영에 맞춰 <기암성>의 컨셉트 아트 전시회가 열리면 미술계가 또 한 번 발칵 뒤집힐 거라고.

“또 한 번 해냈구나.”

방태호가 기쁜 마음을 가득 담아 축하를 전했다.

“이번에도 고생깨나 했을 것 같은데. 정말 멋지다. 밤 새우고 그런 건 아니지?”

“네.”

방태호가 의아히 고개를 돌렸다.

이런 작품을 그려내고도 고훈은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도리어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왜 그래? 고민 있어?”

고훈이 고개를 저었다.

“부탁드릴게요. 잘 보내주세요.”

“어, 그래. 걱정 마.”

고훈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캔버스 앞에 앉았다. 고훈이 즐겨 그리는 해바라기 몇 송이가 피어 있었다.

소년을 걱정스레 보던 방태호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훈아.”

“네.”

고훈이 붓을 든 채 대답했다.

“혼자 고민하다 보면 놓치는 일이 생기더라고. 털어놓으면 의외로 쉽게 해결될 문제도 있고.”

“…….”

“그렇다고 고민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야. 그냥 내가 널 언제든 도와주고 싶다는 것만 말해주고 싶었어.”

“고마워요.”

“그래. 내가 아니면 할아버지께 말씀드려도 돼. 그분이야말로 널 가장 사랑하시잖아.”

고훈이 눈을 감았다.

방태호는 고훈이 무슨 고민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누구보다도 생각이 깊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충분히 고민할 수 있도록 자리를 피해 주려고 했다.

“아저씨.”

막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고훈이 그를 불렀다.

“응.”

방태호가 반갑게 답했다.

부르는 목소리가 고민을 털어놓으려는 듯했다. 고훈이 자신을 믿어준다면 방태호는 어떤 일이든 팔을 걷고 나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작품 활동에 관련한 고민일까.

아니면 진로와 관련한 걸까.

그것도 아니면 학교 성적이나 교우 관계 때문일지도 몰랐다.

방태호는 나름대로 소년의 고민거리를 추측하며 고훈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땅 사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어?”

예상했던 여러 고민이 아니었다.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방태호가 잠시 당황했다.

“땅?”

“네. 할아버지 댁에서 멀지 않고 조용한 곳이면 좋겠어요. 산이나 들이 있으면 좋고 시내나 강이 있으면 더 좋고요.”

방태호가 자리에 앉았다.

“작은 밭도 있으면 좋겠어요. 해바라기를 키울 수 있는.”

고훈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11살 소년이 땅을 사는 것으로 고민할 줄은 몰랐던 방태호는 그가 진심이라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찾아보면 있을 거야. 사는 것도 문제 될 리 없고.”

고훈의 개인 자산으로는 힘들겠지만 현금 100억 원 이상을 보유한 법인이 구입한다면 문제 될 리 없었다.

그러나 갑자기 땅을 사려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해바라기는 훈이네 집 정원에서도 키울 수 있잖아.”

고훈이 칼로 팔레트 위 물감을 펴기 시작했다.

“언제까지고 할아버지 댁에서 살 순 없을 테니까요.”

방태호가 눈썹을 좁혔다.

처음에는 고훈이 ‘우리 집’을 ‘할아버지 집’이라고 말하는 게 외국에서 자란 영향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언젠가는 나가서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걸 들으니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고훈이 아직 고수열을 완전한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왜 같이 살 수 없어.”

고훈은 방태호의 의문에 정직하게 답할 수 없었다.

“나이 먹고 하면 독립해야 하니까요. 다들 그러잖아요.”

그렇긴 한데.

방태호는 왠지 그 말이 고훈이 어른스럽거나 성숙하기에 하는 말이 아닌 것 같았다.

* * *

“그럼 갈게.”

“네. 조심히 가세요.”

방태호를 배웅했다.

할아버지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후로 그림 그린다는 핑계로 작업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함께 있으면 뭔가 물어보실 것 같아서 억지로 일을 만들었다.

조금 있으면 퇴근하실 시간.

빨리 작업실로 돌아가려는데 거실 테이블 위에 쓰레기가 어지럽게 놓여 있다.

치울 생각도 못 하실 정도로 바쁘시거나 아니면 저것도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일이 있다는 뜻일 터.

“…….”

시계를 확인하니 평소 퇴근하시는 시간까지 아직 30분 정도 여유가 있다.

쓰레기통을 가져와서 거실 테이블을 정리했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일 것 같아 주방으로 가니 설거지할 그릇이 잔뜩 싸여 있다.

의자에 올라서서 물로 그릇에 묻은 음식물을 대충 헹궈내고 싱크대에 뜨거운 물을 받았다.

세제를 짜내고 굳은 음식물이 불어나길 기다릴 겸 할아버지의 서재에 들어갔다.

역시 엉망이다.

식사는 같이하니까 그래도 드시는 것 같은데 이런 걸 보면 답답해진다.

딱히 버릴 것은 없고 정리만 좀 해둘 생각으로 어지럽게 널린 책과 서류를 추리기 시작했다.

큰 공책을 덮으려는데 한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훈이가 스펀지빵을 좋아한다.

처음 보는 필체다.

얼마나 좋아하는지 빽빽 울던 아이가 스펀지빵만 틀어주면 눈도 깜빡이지 않고 모니터를 본다.

이건.

다급히 공책 앞뒤를 살폈다. 아마도 ‘어머니’ 이수진이 쓴 일기 같다.

‘고훈’을 키우며 쓴 이야기인데 바다 밑에 사는 노란 스펀지를 좋아했던 모양.

‘고훈’이 발악하면 스펀지빵을 틀어주었다고 한다.

“…….”

혹시.

할아버지가 이것 때문에 병실에서 깨어난 내게 스펀지빵을 보여주었고, 가방도 필통도 우산도 우비도 지갑도 스펀지빵이 그려진 것으로 사주셨나 싶다.

그걸 그렇게 싫어했으니 할아버지가 의심할 만하지.

몇 장 더 넘겼다.

학교 때문인지 훈이가 피자나 치킨 같은 건 먹지 않는다. 김치나 나물이 더 좋다고 하니까 좋은 건가 싶으면서도 안쓰럽다.

“…….”

어머니 이수진의 기록 위에 포스트잇이 붙어 있다.

할아버지가 덧붙인 글이다.

이 글을 좀 더 일찍 봤으면 피자를 먹이지 않았을 텐데. 할애비가 사 줬다고 싫어하는 걸 맛있게 먹어 왔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다.

최근에 쓴 것처럼 잉크가 선명하다.

그러고 보니 노먼과 <기암성> 촬영지 답사를 다녀온 이후로 할아버지가 포테이토 피자를 주문하신 적이 없다.

그냥 해외에 오래 계셔서 한국 음식을 그리워하시는 줄로만 알았는데.

아무래도 귀국한 이후에 이 기록을 읽으신 듯하다.

“…….”

“다녀왔다.”

할아버지 목소리에 깜짝 놀라 수첩을 내려놓았다.

서둘러 방에서 나서려는데 할아버지와 마주하고 말았다.

“으잉?”

할아버지의 놀란 얼굴을 올려다보니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도망치고 싶었다.

이분이 나를 당신의 손자가 아니라고 의심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내 욕심으로 애써 억눌렀던 ‘고훈’을 향한 미안함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무엇보다도 할아버지와 함께했던 지난 1년 동안의 행복한 시간이 더는 이어질 수 없다는 게.

내게는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1년이 할아버지에게는 속았던 일로 치부될 것이 두려워서. 너무나 두려워서 도저히 얼굴을 들 수 없었다.

“훈아, 왜 그래. 울어?”

할아버지의 억센 손이 상냥하게 볼을 감쌌다.

“아니에요.”

몸을 비틀어 손길을 피했다.

“왜 그래. 응? 훈아. 훈아!”

작업실로 도망치려고 한 순간.

할아버지가 손을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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