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119화 (74/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119화

29. 해바라기씨(2)

저녁을 먹고 다시 작업대에 앉았다.

비단 에두아르 마네의 <폴리 베르제르의 카페>가 아니라고 해도 시점은 모든 화가의 고민거리다.

관람객에게 무엇을 보여줄지.

사물의 어떤 면을 드러낼지.

나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지.

모든 의도가 시점을 어떻게 잡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나 지금 내가 그리려 하는 것은 영화 <기암성>의 콘셉트 아트.

뤼팽을 지키기 위해 레이몽드가 자신을 희생시킨 비극을 온전히 보여야 한다.

뤼팽과 레이몽드, 보트를레, 숌즈를 전부 표현해야 한다.

만약 이것이 나만의 작업이었다면 레이몽드를 끌어안고 있는 뤼팽의 시점에서 그렸으리라.

초점 잃은 눈으로 올려다보는 레이몽드를 내려다보는 뤼팽의 시야.

가득 차오른 눈물이 방울져 떨어지는 그의 시야를 관람객과 공유하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보트를레와 숌즈가 드러나지 않는다.

생각하자.

어떻게 하면 영화 제작진의 요구를 수용하면서 동시에 만족스러운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연필을 들었다.

고민만 해서는 어떠한 진전도 없다.

캔버스가 두려워지는 이유는 막연함 때문이다.

사고의 흐름과 손을 멈춰서는 안 된다. 머릿속 심상을 수백 번 갈아엎는 것보다 단 한 번 스케치가 나은 법.

그리자.

가장 무난한 방법은 각도를 살짝 틀어보는 일이다.

옆에서 그리는 것보다 표정을 보여주기 수월하고 인물을 비교적 자유롭게 배치할 수 있다.

‘아니야.’

이렇게 해서는 상황을 전달할 순 있지만 효과적이지 못하다.

설정화는 렘브란트가 그린 <야경>과 같이 여러 인물의 특징을 확실히 보이면서 극적으로 표현해야 한다.

다수의 초상화를 한 장면에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

역시 쉽지 않다.

그러나 렘브란트와 마네도 그러한 작품을 하루아침에 그려냈을 리 없다.

고민하고 그려보고 지워내고 다시 그리길 반복해야만 비로소 작품을 완성할 수 있다.

나는 천재가 아니다.

처음부터 그래왔으니 조급해할 이유는 조금도 없다.

이번에는 총알에 피격된 순간 놀란 뤼팽과 고통스러워하는 레이몽드를 정면에 둔다.

보트를레와 숌즈는 맞은편에 있어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두 사람의 표정을 억지로 그리게 된다.

허용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작위적이다.

이런 구도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리 없다.

조금 더 틀어볼까.

시야를 왼쪽 아래에서 오른쪽 위로 향하도록 유도해보자.

왼쪽에 보트를레와 숌즈를 크게 그리고 소실점에 뤼팽과 레이몽드를 배치하면 좀 더 역동적으로 보인다.

경악에 찬 보트를레와 숌즈의 표정과 자세가 완전히 드러남으로써 상황이 잘 전달될 수 있다.

이 구도는 다듬어 볼 만하다.

“…….”

만족스럽지 않다.

좀 더 극적으로 표현할 방법이 있을 터.

이것을 전시한다고 생각하면, 액자에 넣어 레이몽드의 가슴팍에 해당하는 유리 부분을 깨는 것도 괜찮겠다.

총알이 지나간 것처럼.

하지만 어디까지나 콘셉트 아트.

그림만으로 표현해야 한다.

그러한 부가적인 효과는 노먼에게 그림을 건네며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하리라.

* * *

자정이 가까웠을 때.

고수열은 손자가 걱정되어 작업실 앞을 서성였다.

휘트니 비엔날레에 출품한 <가면>이 고작 두 달 전 일이거늘 또다시 불이 붙고 말았다.

본인도 한번 몰입하면 주변에서 무슨 일이 나든 신경 쓰지 않기에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한창 성장할 나이에 너무 무리하는 건 아닌가 싶었다.

망설이던 고수열이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대여섯 장 정도의 도화지를 추리는 손자를 볼 수 있었다.

작업실을 정리하는 듯했다.

“안 주무셨어요?”

고훈이 물었다.

“그래. 이제 자려고?”

“네. 오늘은 여기까지 하려고요.”

고수열은 안도했다.

늦은 시간이긴 하지만 밤새워 일하는 것보단 나았다. 알아서 적당히 하려고 하니 걱정이 다소 누그러졌다.

“그새 많이도 그렸네.”

고수열이 고훈의 스케치를 보며 말했다.

저녁 식사를 하고 다섯 시간 정도 흘렀을 뿐인데 스케치가 여섯 장이나 되었다.

“생각나는 대로 그려보고 있어요. 마음에 드는 건 없지만.”

고수열이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뛰어난 작가라고 해도 그릴 때마다 좋은 작품을 만들 순 없었다.

작품 하나를 완성하기까지 99번의 실패와 번복을 거듭해 100번째를 완성하는 자세가 예술가로서 갖춰야 할 첫 번째 덕목이었다.

어린 탓일까.

겁이 없는 덕일까.

손자는 그 과정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좋은 구상이 떠오르지 않아도 생각하길 포기하지 않았다.

에두아르 마네의 작품을 찾아본 것처럼 자발적으로 참고 자료를 찾기도 하면서 또 하나의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고자 했다.

“그래. 어서 씻고 자.”

“네.”

“양치랑 로션 잊지 말고.”

“네.”

벌써 졸린 듯 눈이 풀린 손자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았다.

고수열이 웃으며 고훈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손자가 화장실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고수열이 작업실 전등을 껐다.

서재로 들어서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버뱅크에 위치한 아들 부부의 집 처분을 더는 미룰 수 없게 되었다.

‘훈이를 데리고 가야 하나.’

고수열이 종이 상자를 바라보았다. 아들 부부의 사고 차량에 있던 물건을 모아둔 것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상자를 열었다.

더는 쏟아낼 눈물이 없다고 생각했건만 아들과 딸처럼 여겼던 며느리의 흔적을 눈에 담자 감정이 북받쳤다.

고수열이 애써 가슴을 쓸어내리고 며느리 이수진의 수첩을 꺼냈다.

스케치하는 용도로도 사용했던 만큼 제법 큰 수첩이었다.

그것은 이수진이 남긴 스케치와 일기, 가족사진 그리고 고훈이 부모에게 선물한 그림으로 가득했다.

갑작스레 손자를 키우게 된 고수열은 고훈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떻게 성장했는지, 혹시 앓고 있던 병은 없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수 차례 며느리의 기록을 들췄었다.

훈이가 말문이 트였다.

불어는 또 언제 배웠는지 오늘은 옆집 바르도 씨와 이야기를 했다.

연세가 많은 분께 배워서 그런가?

중간중간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섞어 쓰길래 물어보니 바르도 씨도 모르는 말이라고 한다.

스펀지빵에서 나오는 말인가?

“…….”

기억을 잃는 증상도 여럿이었다.

기억을 잃었대도 언어 능력에 크게 지장이 없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이상한 점은 이수진이 이것을 기록한 시기가 고작 3년 전이라는 것.

고훈은 1년 전 깨어나자마자 프랑스어를 현지인처럼 구사했다.

아무리 배움이 빨라도 3년 전에 더듬더듬 말문을 튼 아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하나 더.

어렸을 적부터 만화영화 스펀지빵을 좋아하던 고훈이 지금은 그리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즐겨 보던 것을 보여주면 기억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 자주 보여주었지만 꺼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기억을 잃으면 취향도 달라지는가?

고수열이 페이지를 훌쩍 넘겼다.

이번에는 일전에 한 번 읽어 본 기록이었다.

재작년 일이었다.

상담 교사를 만났다.

훈이가 수업 시간에 질문을 많이 한다며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단다.

그 미친년의 머리끄덩이를 쥐어뜯었어야 했는데.

가끔 영어도, 불어도, 한국어도 아닌 이상한 말을 하기도 하지만, 마음만은 누구보다도 따뜻한 아이다.

요즘 밥을 잘 먹지 않던데, 어쩌면 학교에서 받는 스트레스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왜 이제야 눈치챘을까.

교사까지 나서서 훈이를 그렇게 취급하니 반 아이들은 어땠을까.

그 여린 아이가 말도 못 하고 혼자 마음고생 했을 거라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

“…….”

고수열이 이수진의 수첩을 한 장 더 넘겼다.

기가 막혀서.

훈이가 어떻게 지내는지 보려고 학교를 찾아갔더니 급식으로 포테이토 피자 한 조각과 콜라 한 잔을 주고 있었다.

영양사를 찾아가 항의해도 무엇이 문제냐고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식단에는 일주일 내내 피자와 콜라가 예정되어 있었다.

훈이에게 물어보니 맛이 없어서 안 먹었다고 한다. 그러지 않아도 입이 짧은 아이에게 그딴 걸 주니 그럴 수밖에.

교장과 학교를 고발했다.

더는 그 학교에 보낼 수 없다. 당분간은 일을 쉬더라도 훈이와 함께 있어야겠다.

미국에서 살 때의 일이었다.

미국 급식 환경이 좋지 않은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대상이 손자라는 사실에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수진은 본인과 남편의 일 때문에 아들이 너무나 고생하는 것 같아 한국으로 돌아올 것을 고민하고 있었다.

질문을 많이 한다고 정신에 문제가 있는 아이로 여기는 것은 명백한 차별이었다.

며느리의 기록을 본 고수열은 그가 아는 최고의 환경에서 손자를 두고자 마음먹었다.

본인과 아들 부부도 졸업한 한국 초등학교라면 학교와 관련한 안 좋은 기억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다시 보니 의아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포테이토 피자는 고훈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인데, 맛이 없어서 먹지 않았단다.

조리를 못 했기에 맛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입이 짧다는 건 의아했다.

처음에는 먹는 양이 적긴 했지만, 적어도 음식을 먹는 데 망설이지 않았다.

이상한 점은 포테이토 피자, 식욕, 스펀지빵, 언어 구사력뿐만이 아니었다.

고훈이 엄마아빠를 위해 그린 그림은 좋은 말로도 잘 그렸다고 할 수 없었다.

이수진이 소중하게 보관하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랑하는 아들이 선물한 그림이기 때문.

“…….”

자꾸만 치미는 의구심이 고수열을 곤란하게 했다.

처음에는 단지 기억이 없을 뿐이라고 여겼던 일들이 며느리의 기록을 살필수록 의심스러워졌다.

재능을 물려받고 부모로부터 교육을 잘 받은 덕분이라고 이해한 그림 실력도 의문이었다.

2년 만에 늘었다고 설명할 수준이 아니었다.

그뿐일까.

한창 엄마아빠를 그리워할 나이에 부모님을 보고 싶다는 말 한마디 꺼내지 않았다.

유럽에 가서는 빈센트 반 고흐의 죽음을 둘러싼 비밀을 밝혀내기도 했다.

정말 기억이 없는 탓일까?

아니. 기억이 없다면 정말 가능한 일인가?

“끄응…….”

고수열은 반년 전부터 쌓아 온 의구심을 더는 부정하지 않았다.

정확히 뭐라고 설명할 순 없어도 그 사고를 기점으로 손자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다고 인정했다.

사고를 당하기 전 손자와 지금의 손자는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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