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116화
28. 생일(2)
“짠!”
장미래도 선물을 주었다.
가로로 긴 육면체의 상자인데 무엇인지 모르겠다.
“감사합니다.”
“풀어 봐.”
장미래가 나보다 더 흥분해서 눈을 빛낸다.
아를로 간 이후로는 생일은 나와 테오만의 기념일이었기에 이 상황이 조금 낯설다.
포장지를 뜯자 파란색 전자기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운데에 P와 B가 겹쳐서 그려져 있다.
“플레이박스잖아?”
방태호는 아는 듯하다.
“이게 뭐예요?”
“게임기. 요즘 엄청 인기라고 하던데?”
놀이를 위한 전자기기인 모양이다.
상자를 이리저리 보지만 어떻게 노는 건지 감이 안 잡힌다.
“플레이박스가 비주얼 이후 10년 만에 내놓은 휴대용 게임기야. 유니가 자체 규격이란 자존심까지 버리고 만든 야심작인데. 지금 품절이라 구하기 힘드셨을 텐데.”
“그러니까 말이에요.”
방태호의 설명을 들어보니 잘은 몰라도 대단히 귀중한 물건 같다.
장미래가 내 코끝을 쿡 누르며 웃었다.
“공부도 좋고 그림도 좋지만 노는 것도 중요해. 친구 사귀는 것도.”
맞는 말이다.
아를의 자연 풍경은 내게 영감을 주었지만 시골이었던 만큼 교류가 없었다.
당시 미술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었다.
그곳에서 살았던 것을 후회하진 않지만 정보와 소통의 중요성을 간과했던 거다.
테오를 통해서 큰 소식을 접하기는 했지만 나는 당시 어떤 명작이 탄생했는지, 누가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다.
그것이 내 개성을 지켜주고.
더욱 성장할 수 있는 원동력이자 나를 완전히 독립시키긴 했으나 좋은 작품을 만나볼 기회가 적었던 것도 사실이다.
타인과의 대화가 부족하고 일방적으로 이야기할 뿐이었으니, 살아생전 인정받지 못한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동생 테오와 제수씨 요한나가 내 편지와 작품을 통해 ‘빈센트’를 부단히 알렸기에 지금의 ‘빈센트 반 고흐’가 있을 수 있었던 것.
나와 세상을 잇는 테오와 요한나가 없었다면 빈센트 반 고흐는 그대로 잊혔을 거다.
정보를 얻고 공감대를 형성하려면 최소한 함께 즐길 수 있는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문화다.
영화라는 문화를 접하기 시작하면서 몰랐던 사실을 너무나 많이 깨달았기에 이 시대의 놀이 문화도 경험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장미래도 그런 생각으로 조언하는 것이리라.
“도움이 되겠어요.”
그런 생각을 전하니 장미래가 진지하게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너답기도 하지만 살다 보면 그럴 때가 있어.”
“그럴 때?”
“막 열심히 작업하다가 몸이 힘들 때가 오잖아? 이유 없이 쉬고 싶을 때도 있을 거고 그냥 작품이 안 나올 때도 있고.”
“네.”
“그럴 때는 좀 쉬어야 하는데 취미도 직업도 그림이다 보니까 막상 쉬어야 할 때 뭘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구.”
몸이 아파도 그림을 그리고.
쉬고 싶어질 때는 게으른 나를 꾸짖었다.
그날 완성하기로 한 작품을 끝마치지 못하면 벌로 추운 날 옷을 벗고 나가서 찬물을 끼얹기도 했다.
작품 구상이 안 되면 될 때까지 캔버스 앞에 앉아 있었다.
그런 내게 장미래가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다.
“건강하게 작업하려면 꼭 쉬어야 해. 몸도 마음도. 좋은 거 먹고 잠을 푹 자는 것도 중요하고 머리를 식힐 겸 잠시 그림을 잊는 것도 좋아.”
“이모 말대로 잘 쉬어야만 좋은 작품을 할 수 있단다.”
할아버지도 한마디 거드셨다.
“작업할 때는 집중해야 하지만 그렇게 자신을 몰아붙이기만 해서는 오래 못 살아.”
휴식이 죄가 아니라고 말하는 할아버지와 장미래가 조금 낯설다.
그림을 그리지 않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무 의미 없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런 생각 때문에 작업을 하지 않으면 불안해지고 아무리 아프고 힘들어도 붓을 놓을 수 없었다.
쉬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쉬고 싶었지만 동생에게 생활비를 얻어다 쓰는 못난 내가 감히 쉴 순 없었다.
비정한 사회에 눌린 노동자와 터전을 잃어가는 소작농을 위해 붓을 든 내가 고작 그런 이유로 쉴 수 없다고 생각했다.
* * *
장미래는 고훈이 자랑스러우면서도 안타까웠다.
<가면>을 준비할 때는 몇 주간 하루도 쉬지 않고 몇 시간씩 캔버스 앞에 붙어 있었다.
처음에는 천재들이 보이는 집착 같은 거라고 여겼지만, 고훈은 조금 달랐다.
캔버스 앞에 앉은 소년은 치열했다.
위태로워 보였다.
고작 11살 먹은 아이가 밥도 거르고 잠도 이루지 않은 채 화구를 다루는 게 과연 정상일까.
집중해서 노력하는 일이 나쁜 건 결코 아니었다.
여러 작품을 감상하고 공부하는 모습이 기특했고 고훈도 그 과정을 즐기는 듯했지만.
작품을 만들 때만큼은 정상이 아니었다.
그 광적인 집착이 <해바라기>나 <서리 밀밭> 같은 작품을 그릴 수 있는 원동력일지도 모르겠으나, 결코 고훈에겐 좋은 일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경험으로 얻은 지식이었다.
철이 들 무렵부터 멋진 그림을 그리기 위해 쉼 없이 달려온 장미래는 어느 순간 망가졌다.
작품 활동에만 집중하여 불규칙해진 생활로 심각한 수면 장애와 위장장애를 얻었다.
그뿐일까.
잊을 만하면 불거지는 미술계의 부정에서 장미래도 자유로울 순 없었다.
당시 주목받기 시작했던 장미래는 호기롭게 미술대전에 참가했지만 심사위원의 아들과 제자들이 대상과 최우수상을 휩쓸었다.
울분에 차 작약꽃을 그렸던 물감을 플라스틱 통 가득 짜내어 심사위원석에 던졌다.
그 때문일까.
협회와 연관된 평론가들은 장미래가 사람들을 위로하고자 몸과 혼을 다하여 그린 작품을 비평이란 이름으로 조롱했다.
그래도 굴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노력한 천재는 결국 협회와 언론의 견제 속에서도 가장 사랑받는 화가로 세계에 이름을 떨쳤다.
일부 평론가가 여전히 비아냥거리고 그에 동조한 많은 사람이 장미래를 욕했지만 응원하는 사람이 있기에.
그녀는 기꺼이 멍과 상처를 감추고 웃으며 지냈다.
그러던 차.
SNS에서 자신을 욕하는 계정이 실은 같은 대학 동기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인정받지 못해 힘들어하는 친구를 응원하고 위로했는데.
그녀는 더 이상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
정신적, 실질적 상처 속에 자리 잡은 스트레스로 공황장애를 겪었다.
사람과 엮이면 상처만 받으니까 주변과의 연락을 모두 끊었다.
그림도 싫었다.
그렇게 혼자 남게 되니 문득 무엇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림만 그리며 살았는데 막상 붓을 놓으니 뭘 하면 좋은지 알 수 없었다.
친구와 놀아본 기억도 없고 혼자서 뭘 하며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우선은 잔뜩 어질러진 집을 치우기 시작했다. 며칠 고생한 끝에 정리가 끝나면 또 할 일을 찾았다.
하지만 쉼 없이 움직이는 와중에도 불안이 없어지진 않았다.
그럴 때.
지도 교수였던 고수열이 손을 내밀었다.
“그림 안 그리면 뭐 큰일 나니?”
장미래가 고훈에게 물었다.
소년이 답하지 못하자 그녀는 싱긋 웃으며 게임기가 든 상자를 열었다.
“열심히 하는 거 좋아. 다만 언젠가 훈이가 누군지 돌아보게 되는 날이 올 거야. 그때 외롭지 않으려면 이것저것 해두는 게 좋아. 친구도 사귀고 다른 취미도 만들고.”
고훈은 장미래를 빤히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모르겠지만 해볼게요.”
“그래. 뭐든 다 해보는 게 좋아.”
“어떻게 하는 거예요?”
“어……. 글쎄?”
고훈이 눈매를 좁히자 장미래가 호탕하게 웃었다.
“난 게임 안 해서 몰라. 요즘 애들이 좋아한다고 해서 샀지.”
“걱정 마, 훈아. 내가 다 세팅해 줄게.”
플레이박스를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방태호가 나섰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차시현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나는 선물 없는데…….”
평소와 같이 그림 그리며 놀 생각으로 온 탓에 생일이라고 말해주지 않은 고훈이 원망스러웠다.
생일인 걸 알았으면 용돈을 탈탈 털어서라도 가장 좋은 선물을 주고 싶었다.
고훈이 피식 웃었다.
“오늘 그린 그림 주면 되잖아.”
“그래도 돼?”
차시현은 앞서 아저씨, 아줌마에게 명화집과 게임기를 선물 받는 친구에게 정말 그림을 그려줘도 되나 싶었다.
“나 그림 못 그리는데?”
고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네 그림 좋으니까.”
“정말? 어디가? 어떤 점이?”
고훈이 잠시 망설였다.
차시현의 그림은 정직하고 꾸밈이 없었다. 고정관념이 남아 있긴 하지만 차시현만의 색이 있어 좋았다.
어렵고 진중한 작품을 보다가 문득 그 풋풋함을 접하면 기분이 좋아졌다.
“못.”
고훈이 말을 꺼내다가 순간 멈칫했다. 농담 삼아 한 말에 마음 여린 차시현이 상처받을까 봐 말을 돌렸다.
“색을 잘 쓰는 점?”
“못 그린다고 하려고 했지!”
차시현이 버럭 소리 질렀다.
속내를 들킨 고훈이 웃으며 친구를 달랬고 덩달아 웃음이 터진 고수열, 방태호, 장미래는 웃음 소리를 참느라 혼났다.
“자, 자. 밥 먹자.”
고수열이 아웅다웅하는 두 아이를 말렸다.
부엌에는 고수열이 준비한 생일상이 차려져 있었다.
고수열이 정성 들여 끓인 된장찌개와 1++ 한우 새우살, 소고기와 함께 사 온 명이나물, 샐러드, 물김치를 함께 차려두었다.
“세상에. 이걸 선생님 혼자 준비하셨어요?”
“파는 거 그냥 샀어요. 된장찌개는 내가 끓였고.”
“그래도 이게 어디예요. 히~ 훈아, 한우야. 한우.”
“한우?”
고훈이 눈을 깜빡였다.
“오랜만에 소고기네. 학장님, 제가 굽겠습니다.”
“괜찮아. 손님으로 왔으니 자리에 앉게.”
“그럴 수가 있나요. 이리 주십쇼.”
“어머. 선생님, 방 대표님께는 평대하세요?”
장미래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지내다 보니 그렇게 됐지요.”
“그럼 저한테는 왜 자꾸 존대하세요?”
고수열이 방태호와 시선을 맞추며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방 대표하고는 친하니까 그렇지요.”
“네?”
“하핳하하!”
“웃을 일이 아니잖아요. 어떻게 10년 넘게 알고 지낸 저보다 방 대표님하고 더 친하다고 하세요? 저 진짜 서운해요.”
고수열의 농담에 장미래는 그저 황당할 뿐이었다.
대학 새내기 때부터 은사였던 고수열이 대학 강단에 섰다는 이유로 존대하니 서운하기 그지없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요. 앉아요.”
“못 앉아요!”
“학장님, 제가 굽겠습니다.”
“대표님은 잠깐 빠져봐요!”
“하핳핳하. 장 교수가 가끔 이렇게 성질을 부려. 자네가 이해하게.”
“선생님!”
어른들이 다투는 도중.
고훈은 포장된 한우 새우살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맛있겠다.”
차시현의 말에 고훈이 고개를 돌렸다.
“이게 맛있어? 소고기 아니야?”
“응. 소고기. 엄청 맛있어.”
“……피자랑 짜장면보다?”
“아마 그럴걸?”
친구의 말에 고훈이 더더욱 고민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