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115화
28. 생일(1)
오랜만에 등교했다.
“다녀오겠습니다.”
할아버지와 인사하고 교실로 향했다. 아직까지는 유급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정작 수업에 따라갈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일반 과목은 어떻게든 따라갈 수 있지만 오후에 한 시간씩 배우는 내용은 몹시 난해하다.
더군다나 휘트니 비엔날레를 준비한 기간과 여행까지 7주나 수업을 안 들었으니 이해할 수 있을 리 없다.
차시현이 중간중간 보내준 노트를 읽어보는 정도로 따라가긴 힘들 거다.
교실문 앞에 서자 문이 열렸다.
이 자동문이라는 것도 처음에는 정말 신기했는데 어떻게 동작하는지 궁금하다.
사람이 다가가면 움직이는 설치예술품도 있을까?
문과 가장 가까운 쪽에 차시현이 엎드려 있다. 처음 봤을 때와 똑같은 자세다.
다른 아이는 아직 안 온 듯하다.
일어날 생각이 없는 것 같아서 쿡쿡 찌르자 움찔한다.
녀석이 겁먹은 얼굴로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반가운 마음에 웃었는데, 벌써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그간 혼자 지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안녕.”
“흐이으잉.”
“울지 마. 왜 울어.”
차시현이 가방에서 공책을 꺼냈다. 내가 선물했던 색칠놀이다.
“다 했는데. 끕. 다 했는데. 옛날에 다 했는데.”
“하나 더 줄 걸 그랬나.”
“끄으흡. 너 미워.”
차시현 책상 앞에 쭈그려 앉았다.
녀석의 색칠놀이 책을 한 장씩 넘기는데 정성껏 칠했다.
장미는 빨간색으로만.
펭귄은 남색으로만, 스펀지빵은 노란색으로만 필압 조절도 없이 그저 두텁게 칠했을 뿐이나 선을 넘지 않게 공들인 티가 난다.
파란 나무를 그리던 색채감이 드러나진 않았지만 아마 그건 ‘정답’을 찾는 버릇 때문이리라.
“열심히 했네.”
“응.”
“장미는 왜 빨갛게 칠했어?”
“빨갛잖아?”
“분홍색도 있고 흰색도 있잖아. 노란 장미도 있고.”
차시현이 눈물을 훔쳤다.
“그러네.”
“파란색으로 칠해도 되고 초록색으로 칠해도 돼. 정해진 건 없어. 네 파란 나무처럼.”
“응.”
“그래도 꼼꼼하게 선도 안 벗어나고 칠한 거 보면 잘했다.”
“정말?”
“정말.”
녀석이 활짝 웃는다.
그림으로 외로움을 달래던 아이에게 명암을 주고, 여러 색을 쓰는 게 무에 중요할까.
경험상 괜히 가르치려 들어서 좋은 일 하나 없다.
색을 칠하는 데 집중해서 마음에 평화를 찾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왜 왔다고 말 안 했어.”
“어차피 오늘 볼 건데. 뭘.”
차시현이 솜보다도 부드러운 주먹을 휘둘렀다.
“자. 나도.”
차시현이 주었던 문제집을 꺼냈다.
열심히 풀었지만 너무 어려워서 얼마나 맞혔을지 모르겠다.
“이걸 다 했어?”
차시현이 페이지를 넘기며 물었다.
“시험 잘 보려면 해야 한다며.”
“거짓말인데.”
“뭐?”
“이거 시험에 안 나와. 중학교 형들이 공부하는 거야.”
어이가 없어서 이 영악한 녀석을 바라보고 있으니 히힛 하고 웃는다.
“우리 아버지가 공부 열심히 해야지 훌륭한 사람 된다고 하셨어.”
이 녀석 딴에는 날 생각해서 한 거짓말인 듯하다.
“거짓말하면 안 된다는 말씀은 안 하셨어?”
“그건 얼마 전에 하셨어. 과자 하루에 두 개 먹은 거짓말해서 혼났어.”
“…….”
귀엽기는 한데 묘하게 열 받아서 얼굴을 손가락으로 볼을 쿡쿡 찌르니 웃는다.
금방 밝아지니 다행이면서도.
초등학교 3학년들이 배우는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 쩔쩔매던 게 억울하다.
“그럼 계속 한국에 있어?”
“일단은. 영화 일 끝내면 할아버지랑 여행 다니면서 공부도 하고 그림도 그리려고.”
“맞아. 뭐 했어? 재밌었어?”
“엄청 재밌었어. 너 백악 절벽이라고 알아?”
“몰라. 어디에 있는데?”
“영국.”
스마트폰을 꺼내서 그때 찍은 사진을 보여주자 차시현이 입을 떡 벌렸다.
“우와. 이런 데가 진짜 있어? 그래픽 아니고?”
“응. 대단하지? 화가들이 그림도 많이 그렸대. 일 때문에 그러진 못했는데 방학에는 이런 곳 찾아다니면서 그리려고.”
“재밌겠다.”
차시현이 눈을 빛낸다.
가고 싶은 기색을 조금도 숨기지 않는 걸 보면 어지간히 부러운가 보다.
“부모님께 말씀드려 봐.”
“미국 다녀온 지 얼마 안 됐는데. 허락해 주실까?”
“방학 때 가면 되잖아.”
“아, 맞다.”
차시현이 시무룩하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어머니가 방학 때 유럽 여행 가자고 하셨어. 가족끼리.”
“좋잖아. 가족끼리 오순도순 여행하는 거.”
“응. ……근데 할아버지는 없는걸.”
“돌아가셨어?”
차시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랑 싸우신 것 같아. 아버지는 할아버지 엄청 싫어하셔.”
모든 일은 양쪽 말을 모두 듣고 판단해야 하지만.
차시현에게 들은 이야기로 따지면 차시현의 아버지는 지극히 상식적인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부친을 증오한다면 문제가 아주 없진 않을 것이다.
차시현도 정확한 상황을 모르는 듯하니, 아마 어린 아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듯하다.
“그럴 수도 있어. 중요한 건 아버지랑 어머니가 널 사랑하는 거잖아.”
“……응.”
“아. 할아버지가 너 놀러 오랬어.”
“정말?”
그냥 놀러오는 게 기쁜지 이유는 궁금하지도 않나 보다.
“응. 이번 주 목요일 저녁. 올래?”
“갈래. 나 물감도 샀다?”
“물감?”
“응. 아버지한테 색연필 다른 색도 가지고 싶어요라고 했는데 갖고 싶은 거 다 말하라고 하셨어. 우리 아버지 멋지지.”
“엄청 멋진데.”
“히힛.”
“근데 네가 그리던 것처럼 하는데 잘 안 됐어.”
“나처럼은 못 하지. 내가 그렇게 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얼마나?”
“10년? 아니 11년?”
“거짓말. 너 11살이잖아.”
“그 정도로 노력했단 뜻이야.”
차시현이 고개를 젓고 스마트폰을 꺼냈다. 사진첩에 들어가 아버지에게 선물 받은 물감 세트를 자랑했다.
“이거. 색 엄청 많지.”
15㎖ 튜브 서른두 개가 두 줄로 가지런히 놓여 있다. 아이가 쓰기엔 과하다 싶지만, 좋은 게 좋은 거겠지.
“수채화 물감이네?”
“수채화?”
“응. 물이랑 섞어 쓰는 거야. 농도 조절하면서. 나 먹 갈아서 쓰는 것처럼.”
“그냥 바르면 안 돼?”
“안 되는 건 없어. 그러면 수채화 물감 쓰는 이유도 없어지지만.”
“뭐가 다른데?”
“농도를 조절해서 그리는 게 달라. 수채화는 투명하게 표현할 수 있고 물감을 일부러 번지게 쓸 수도 있어. 유화는 붓 터치를 활용해서 질감을 활용할 수 있고. 수채화랑 다르게 덧그리는 것도 가능하고.”
수채화는 많이 쓰지 않았다.
야외에서 물을 가지고 다니는 게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기도 했고 또 내가 원하는 그림은 유화 물감을 써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 특유의 분위기 때문에 언젠가는 꼭 제대로 다뤄볼 생각이다.
“둘 다 쓰면 안 돼?”
“둘 다?”
“생각 안 해봤는데. 안 될 건 없지? 잘 쓰면 다 좋아.”
“뭐든 안 되는 거 없대.”
“정말이라니까. 정말 답을 찾고 싶으면 하나 말고 가능한 여러 답을 찾아봐.”
“아.”
무엇이든 틀리지 않다고 말하는 것보다 답이 여러 개라고 하는 게 더 와닿는 모양이다.
정말 이상한 녀석이다.
“그럼 이거 가지고 놀자.”
“그래.”
“과자는 뭐 가져갈까? 고래칩?”
“안 먹어 본 거. 고래칩도 맛있지만 일단 하나씩 다 먹어 볼래.”
“그럼 거북이밥?”
“……너네 회사 과자 이름은 다 왜 그런 식이야?”
“귀엽잖아.”
고래가 먹는 칩과 거북이가 먹는 밥이라니.
이름만 보고 걸렀으면 후회할 뻔했는데 작명 감각이 아쉽다.
* * *
목요일.
차시현을 기다리며 작업실에서 사과를 소묘하고 있는데, 갑자기 불이 꺼졌다.
암막 커튼을 쳐둔 곳이라 갑자기 눈앞이 컴컴해졌다.
당황해서 불을 켜려고 몸을 돌리던 차, 할아버지와 장미래, 방태호, 차시현이 노래를 불렀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장미래가 초를 꽂은 케이크를 들고 있다.
“사랑하는 훈이의 생일 축하합니다.”
“축하합니다.”
얼떨결에 손뼉을 치며 어물어물 따라 불렀다.
“뭐예요?”
“뭐긴. 훈이 생일이잖아.”
오늘이 며칠이었더라.
6월 1일이었나?
파팡!
“악!”
방태호가 뭔가를 잡아당기더니 뭔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놀랐잖아요!”
깜짝 놀라서 비명을 지르니 차시현과 장미래가 꺄르르 웃는다.
뭔가 억울한데 사람들이 웃는 얼굴을 보니 괜스레 웃음이 나온다.
6월 1일이 내 생일이었던 모양.
“훈아, 촛불 불면서 소원 빌면 돼.”
너무 놀라 일단 시키는 대로 할아버지 건강하게 오래 살게 해달라고 빌며 촛불을 껐다.
방태호가 비닐로 포장한 선물을 건넸다.
“축하해, 훈아.”
제법 묵직하다. 크기도 크고 20F 캔버스 정도로 비교적 크다.
“감사합니다. 풀어봐도 돼요?”
“그럼.”
포장지를 뜯자 내가 그렸던 <별이 빛나는 밤>의 일부가 보였다.
[빈센트 반 고흐 명화집]
“…….”
“하핳. 마음에 들지 모르겠네. 반 고흐 좋아하니까 자주 보고 싶지 않을까 싶어서 샀어. 해설도 잘 적혀 있고.”
생각지도 못한 선물이다.
세상에나. 내 그림이 이렇게나 잔뜩 모여 있다.
내 그림이. 평생 보았던 내 그림이.
“…….”
“혹시 마음에 안 드나? 다른 작가 걸로 바꿀까?”
“아니요. 정말정말 좋아요. 정말로 평생 가지고 싶었어요.”
이 책을 만든 사람은 내 그림을 어떻게 보는지 알 수 있고.
또 가끔은 추억을 떠올리는 쪽으로 쓸 수도 있고 아무튼 그럴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