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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반 고흐-113화 (68/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113화

27. 비밀(2)

미셸 플라티니의 눈이 고장 난 세탁기처럼 요동쳤다.

“무, 무슨 말이야? 방해한 거 없는데?”

고훈은 필사적으로 미소를 유지하는 미셸을 안심시켰다.

“괜찮아요. 비밀이에요?”

“응? 뭐가?”

고훈이 미셸과 앙리를 번갈아 보았다.

그 명확한 시선에 미셸이 얼굴을 꿈틀거렸다.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두 사람 일이요.”

“일? 나, 난 훈이가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는데.”

미셸 플라티니가 앙리 마르소를 쏘아봤다. 멍청하게 가만있지 말고 뭐라도 하라는 신호에 앙리 마르소가 입을 열었다.

“꼬맹이.”

고훈이 고개를 돌렸다.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몰라도 그런 거 아니니까 입 다물어.”

“둘이 만나는 거요?”

“아니야!”

앙리와 미셸이 동시에 외쳤다.

‘왜들 이러지?’

고훈은 성인 두 사람이 만나는 걸 죄라도 되는 양 반응하는 앙리 마르소와 미셸 플라티니를 이해할 수 없었다.

또한 남이 숨기고 싶은 사정을 억지로 파헤치고 싶지도 않았다.

“걱정 말아요. 아무한테도 말 안 할 테니까.”

“아니라고 했잖아!”

앙리 마르소가 버럭 소리 질렀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다른 쪽으로 납득시켜야만 했다.

“사람이 없으니 저녁 차려주려고 왔을 뿐이야. 알아들어?”

“굳이 왜요?”

직원에게 휴가를 줄 생각이었으면 교대로 보내면 될 터였다. 굳이 스무 명이 넘는 직원에게 같은 날에 휴가를 줄 이유가 없었다.

고훈의 질문에 앙리가 당황했다.

소년은 대화가 이어질수록 그들을 압박하게 됨을 깨닫고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일단 진정해요. 거짓말하지 않아도 돼요. 숨기고 싶으면 말 안 한다니까요?”

“아니라고!”

앙리 마르소가 필사적으로 이유를 찾았다.

굳이 모든 직원을 내보내고 미셸 플라티니가 혼자 방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내야 했다.

앙리 마르소가 고훈에게 다가갔다. 소년의 두 팔을 부여잡고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말했다.

“……비밀 지켜.”

“그래요. 걱정하지 말라니까요.”

앙리 마르소는 차분히 자신이 쓴 소설을 읊기 시작했다.

“플라티니에게 빚이 있어. 그걸 갚으려고 여러 일을 하는 게 안쓰러워서 저녁 차리라고 하고 보수를 주고 있는 거야.”

미셸이 연인을 벌레 보듯 보았다.

두 사람이 만나고 있다고 생각한 고훈은 너무나도 진중한 앙리 마르소의 태도에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빚이요?”

앙리 마르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무슨 이유가 좋을까.

그녀 주변을 욕되게 할 순 없고, 빚이 생길 수밖에 없는 이유를 떠올린 앙리 마르소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도박중독이야. 저금이고 집이고 다 날리고도 정신을 못 차려석!”

미셸 플라티니가 앙리 마르소의 뒤통수를 냅다 때렸다.

잠시 후.

마르소 저택 접견실에 고훈, 앙리 마르소, 미셸 플라티니가 삼각형을 이루고 앉아 있었다.

한동안 침묵이 흐른 뒤.

앙리 마르소가 다시 한번 고훈을 속이려고 시도했다.

“아까 때리는 거 봤지? 그 정도로 숨기고 싶은 거야. 그러니 너도.”

“닥쳐 봐. 좀.”

미셸 플라티니가 앙리 마르소의 말을 끊어냈다. 지끈거리는 이마를 꾹꾹 누르며 생각을 정리하곤 고훈에게 사실대로 고했다.

“맞아. 저 인간이랑 만나고 있어. 사정 때문에 비밀로 하고 있고.”

“그래요. 걱정하지 말아요.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으니까.”

미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꼭 부탁해?”

* * *

아르센이 고훈을 데리고 퇴근하고도 저택에 단둘이 남은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믿을 수 없어. 대체 무슨 생각이야? 미리 연락이라도 했으면 이런 일 없었잖아.”

“그럴 생각이었어.”

앙리가 입술을 샐쭉거렸다.

고훈에게서 뜻밖의 말을 듣는 바람에 연락해야 한다는 생각을 까맣게 잊어버렸을 뿐이었다.

“어떻게 할 거야? 훈이가 혹시 실수라도 하면 어떻게 설명할 건데?”

미셸이 속상한 마음을 쏟아내려던 차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인에 엄마라고 적혀 있었다.

미셸이 검지를 입술로 가져가 앙리에게 주의를 주곤 전화를 받았다.

“응, 엄마.”

-어디야?

“일 때문에 잠깐.”

-얘는 엄마 쉴 때마다 바쁘대. 밥은 먹었고? 블루베리 타르트 맛있게 됐는데.

“이제 먹으려고.”

-많이 바빠?

“아니. 뭐. 왜?”

-어제 훈이라는 애 만났거든. 네가 저번에 얘기했던 애 맞지? 앙리처럼 그림 잘 그린다던.

“어? 어. 어. 했지.”

-어쩜 그런 애가 다 있니? 그 작은 애가 먹는 것마다 하나하나 어떻게 맛있다고 설명하는데 얼마나 귀여운지. 꼭 앙리 어렸을 때 보는 것 같더라.

“그랬어?”

-그래. 참. 오늘 앙리 기사 보니까 욕이 엄청 달렸더라. 걔들은 할 일이 그렇게 없다니?

“그러게.”

-너라도 잘 지켜줘. 앙리한테 너만한 사람이 있니? 걔가 말은 험하게 해도 넌 누나처럼 따르잖아.

“누, 누나?”

-그럼. 가족이나 다름없지? 아니, 이런 가족도 드물다 너? 대학까지 같이 나오고 같은 직장에서 일하기 쉬운 게 아니야.

“……그렇긴 한데. 가족은 아니지.”

-얘, 너무 그러지 마. 앙리한테는 우리가 가족이니까. 그런 말 들으면 서운해할걸? 너도 알다시피 걔가 은근히 여리잖니.

미셸이 딴청 부리고 있는 앙리를 노려보았다.

-엄마한테 서운했던 거 알아. 항상 말하지만 엄마한테는 네가 최고니까 앙리를 아들처럼 생각한다고 너무 속상해하진 않았으면 좋겠어.

“언제 적 이야기야. 어릴 때 잠깐 그런 거 가지고.”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고 미안하고 그래. 어머나. 내 정신 좀 봐. 내가 너무 오래 붙잡았나 보다. 그럼 우리 딸 일 열심히 하고. 사랑해~

“응…….”

-사랑해~

“사랑해…….”

셰리 가도와 전화 통화를 마친 미셸이 얼굴을 감쌌다.1)

사춘기 때는 엄마가 친딸인 자신보다 앙리 마르소를 사랑하는 것 같아서 속상하기도 했다.

엄마가 앙리와 같이 놀라고 할 때마다 괜히 심술이 났다.

그렇게 유년 시절을 데면데면하게 보내고 같은 고등학교에 들어간 뒤에야 미셸은 앙리 마르소와 마주하게 되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앙숙처럼 지내다가 서로의 능력을 인정하게 되어 사업 파트너가 되었고.

4년 전부터 사귀게 되었다.

고민하던 미셸이 고개를 들었다.

“안 되겠어.”

언젠가는 닥칠 일이었다.

더 이상 숨겼다가는 죄책감을 느낄 것 같았다.

말해야 하는데.

“…….”

그러나 앙리를 친아들처럼 여기는 엄마가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생각하면 막상 용기가 나지 않았다.

“싫지 않다고…….”

그때 앙리가 중얼거렸다.

미셸이 고개를 돌렸다.

“무슨 말이야?”

“이상하긴 하지만 싫지 않다고 했어.”

미셸이 눈을 깜빡였다.

“말했어?”

분명 평범한 관계는 아니었다.

앙리는 어렸을 적부터 자신을 키워온 유모 셰리 가도를 친어머니처럼 생각했고, 그것은 셰리 가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엄격히 따지면 아무런 관계도 아니었다. 이상하게 느끼는 건 지금까지 보내왔던 세월 탓.

엄마 셰리 가도라면 도리어 이 상황을 더 좋게 받아들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못내 숨겨왔던 이야기를.

앙리가 나서서 물어봤다고 하니 걱정을 덜 수 있었다.

“뭐래? 응? 뭐라고 했는데.”

“별나다곤 생각해도 생각해 보면 남에게 피해 주는 것도 아니래.”

“그러니까!”

미셸이 펄쩍 뛰었다.

항상 누나처럼 대해라, 가족처럼 여겨라, 불쌍한 아이다, 착한 아이다라는 말을 귀에 딱지가 붙을 정도로 했던 엄마가 그렇게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마음의 짐을 짊어지고 있었던 미셸에게 이보다 반가운 소식은 없었다.

“왜 말 안 했어. 그럼 숨길 필요 없잖아.”

“뭘?”

앙리가 고개를 들었다.

“뭐냐니.”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엄마한테 우리 일 말했다며.”

“안 했는데.”

미셸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럼 아까 한 말은 뭐야. 이상하지만 싫지 않다며.”

“아.”

앙리 마르소가 정신을 차렸다.

“아까 나한테 그러더라. 별나긴 해도 피해주는 것도 아니고 싫지 않대. 드디어 그 녀석이 나를 제대로 보기 시작한 거지.”

“무슨 말이야?”

“고훈.”

“죽어!”

미셸이 앙리 마르소의 얼굴에 쿠션을 집어 던졌다.

* * *

공항에서 <기암성> 제작진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럼 잘 부탁해.”

“맡겨 주세요.”

손을 잡으니 노먼이 씩 웃으며 신뢰를 보내주었다.

그간 함께한 일로 <기암성>의 콘셉트 아트를 방향성을 확정한 덕분에 미국에서 지낼 필요가 없어졌다.

영상 통화도 있고 필요한 이야기는 언제든지 나눌 수 있으니 각자 위치에서 활동하기로 했다.

내가 그린 <기암성>을 가지고 이들이 어떤 소품을 만들고, 마을은 어떻게 조성할지 궁금하지만, 완성된 영화로 만나볼 수 있으니 조금 더 참기로 했다.

“참. 그리고.”

헤어지려는데 노먼이 손뼉을 쳤다.

“혹시 여유 있으면 작업하는 모습 영상으로 찍어 줄래?”

“영상이요?”

“응. 가급적이면 다양한 각도에서. 바쁘면 안 해도 괜찮아.”

“어디다 쓰려고요?”

“음. 일단은 구상일 뿐인데. 네이선이 말하더라고. 훈이 네가 작업하는 영상이 홍보하기에 좋지 않겠냐고.”

“그게 재밌어요?”

“아주 흥미로울걸? 방태호 대표님,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어려운 일 아니니까요. 어차피 개인방송 준비할 생각이라 어렵지 않을 겁니다.”

노먼이 자세를 숙여서 나를 눈높이를 마주했다.

아무 말도 안 하고 그저 빤히 바라보기에 무슨 일인가 싶다.

“예전에.”

“네.”

“어린아이랑 같이 일한 적이 있어.”

나처럼 어린아이를 색안경을 끼고 보지 않은 이유가 따로 있었던 모양이다.

내 나이 또래에 뭔가를 하는 일이 쉽지 않을 텐데.

완벽주의자 크리스틴 노먼의 뮤즈가 누구였는지 신기할 뿐이다.

“누군데요?”

“배도빈. 아마 지금 너보다 조금 더 어렸을 거야.”

처음 듣는 이름이다.

“베를린 필하모닉 지휘자인데. 그 아이랑 일할 때는 정말 놀랐어. 처음부터 완성되어 있었거든.”

완성되어 있었다니.

노먼 같은 사람이 지금 내 나이보다 어린애에게 할 말이 아니다.

노먼이 내 뺨을 쓰다듬었다.

“그런데 널 보고 있으면 다른 의미로 놀라워. 고작 한 달 같이 있었는데 성장하는 게 보이거든.”

그래야만 한다.

나는 아직 더 많은 것을 배워야 하니까.

“정말 멋진 시간이었어. 앞으로도 잘 부탁해. 어린 반 고.”

노먼이 고개를 저었다.

“고훈 작가님.”

그녀의 미소는 언제나 멋지다.

“저도 잘 부탁해요. 노먼.”

* * *

1)의문을 가지실 분을 위한 설명.

프랑스 정부에서는 여성의 신분증을 갱신할 때 남편의 성을 추가하는 행위를 법으로 금지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정부 홈페이지에서는 여성은 법적으로 자신의 성을 간직하고, 모든 공식 서류에서 반드시 본래 성을 사용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추가로 일상에서 결혼한 여자는 자신의 성과 남편의 성 또는 두 성을 모두 사용할 수 있다고 밝히며, 남성의 경우도 자신의 성과 아내의 성을 추가할 수 있다고 소개합니다.

남편의 성을 따르는 관습이 남아 있음도 함께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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