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111화
26. 콜렉터(5)
“이건?”
방태호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사람 실루엣이 다양한 색으로 겹쳐 표현한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실루엣은 방향도 키도 형태도 제각각인데 40F 캔버스에 빈틈이 없을 정도로 빼곡하다.
작품 아래 마티아스 조르도라는 사람의 <지구>라고 안내되어 있다.
색채감이 아주 독특하다.
밑에 깔린 사람은 채도가 높은 색을 쓰고 가까운 사람일수록 어두운색으로 칠한 것이 묘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져다주는 사람들 저편에 밝은색을 배치한 것으로 작가 마티아스 조르도가 주변 사람을 어떻게 느끼는지 추측해 볼 수 있다.
누굴까.
어떤 작품을 그리는 사람일까.
마르소가 이렇게 훌륭한 액자에 넣어두고 자신이 아끼는 전시실에 걸어 둘 정도면 대단한 작가가 분명하다.
그만한 작품이기도 하고.
“어떤 작품 하는 사람이에요?”
방태호에게 물었다.
“모르겠어.”
내가 아는 누구보다도 박식한 방태호가 모르는 작가가 있다고 하니 의아하다.
“어때.”
앙리 마르소가 다가왔다.
“좋아요. 독특하기만 한 게 아니라 자기 시선을 잘 담았어요. 색채감도 좋고.”
“그래.”
“마르소 씨.”
방태호가 질문만 하고 돌아가려는 앙리 마르소를 불러 세웠다.
“처음 보는 작품인데 어떻게 발견하셨습니까? 작가도 처음 보고. 혹시 다른 작가가 이름을 바꿔서 발표한 작품인가요?”
방태호의 질문에 앙리가 고개를 저었다.
“피렌체 시뇨리아 광장에서 샀습니다.”
“광장이요?”
“그림 몇 점 가지고 나와서 초상화 그리던 사람인데. 아르센, 이거 얼마 주고 샀지?”
“1,200유로로 기억합니다. 학교를 못 다니는 소년이었죠. 지금쯤 성인이 되었겠네요.”
앙리 마르소가 이제 됐냐는 표정과 함께 어깨를 으쓱이고는 뒤돌았다.
히에로니무스 보스, 라파엘로, 장 프랑수아 밀레, 클로드 모네 그리고 할아버지까지.
당대를 넘어서 역사에 기록될 작품들을 모아둔 앙리 마르소가 이름 없는 화가의 작품을 이렇게 소중히 보관하고 있을 줄이야.
“그럼 이것은?”
방태호가 그 옆에 있는 그림을 가리켰다.
이번에도 처음 보는 작품이다.
화려하게 장식된 붉은 시계탑인데 꼭대기는 녹색으로 칠하고 별을 달아두었다.
꼭 크리스마스트리 같은 건물이다.
<스파스카야 탑>이라는 제목과 나탈랴 이바노프라는 생소한 이름이 소개되어 있다.
“이건 작년 모스크바에서 구입하셨습니다. 미대생인데 학기 중에는 일을 못 하니 거리에 나와서 그림을 그린다고 하더군요.”
아르센이 이번에도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제3전시실 왼쪽 벽면에 전시된 작품은 대부분 무명 화가의 작품이라고 한다.
“창고에 보관하는 작품도 많지만 작가님이 특히나 좋아하는 것을 선별해서 전시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정말 미술을 사랑한다.
개떡 같은 성격은 문제지만 적어도 이런 사람 덕분에 미술계가 여태 버티지 않았을까 싶다.
작품을 사는 것으로 신인 작가들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고 다음 작품에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준 것이다.
밀레 스승의 작품을 사 주었던 루소처럼 말이다.
“…….”
앙리 마르소 덕분에 알게 된 마티아스 조르도의 <지구>와 나탈랴 이바노프의 <스파스카야 탑>에서 눈을 뗄 수 없다.
다시 봐도 앙리 마르소가 살 만한 작품이다.
독립된 자신을 어떻게 보여야 하는지 깊이 고민한 흔적이 묻어나온다.
당장 휘트니 비엔날레에 전시된다고 해도 나는 아무런 위화감을 느낄 수 없을 것 같다.
이렇게나 재능 있는 화가들이 지금도 지구 곳곳에서 인정받지 못한 채 거리에서, 골방에서 꿈을 이어나가고 있다니.
참으로 안타깝다.
“저기는 뭐예요? 비어 있는데.”
빈 곳을 가리키자 아르센이 웃으며 답했다.
“해바라기와 서리 밀밭을 걸어두었던 곳입니다. 아시다시피 지금은 휘트니 미술관에서 전시하고 있죠.”
“아.”
내 그림도 걸어두고 있었구나 싶어서 고개를 끄덕이던 차 의문이 들었다.
“손님은요?”
지금까지 연대순과 작가명에 따라 작품을 분류해 두었는데 <손님>이 빠져 있으니 의아하다.
휘트니 비엔날레에 <손님>을 걸어준 걸 보면 앙리가 사 준 게 확실하거늘.
어떻게 된 일인가 싶다.
창고에 넣어두었나?
“손님은 반대편 벽에 걸어두었습니다. 저기.”
“아.”
고개를 돌리자 <해바라기>와 마주 보는 곳도 비어 있다.
“작가님의 그림자는 이곳에서 해바라기와 손님을 어떻게 걸어둘지 구상하다가 기획하게 된 작품입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 궁금했는데 뜻하지 않게 앙리 마르소가 <그림자>를 어떻게 구상했는지 알게 되었다.
“마르소.”
그런 생각을 하던 차 할아버지가 앙리 마르소를 불렀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리자 다들 같은 생각이었는지 이목이 집중되었다.
할아버지가 뜻밖의 말을 꺼내셨다.
“내가 자네를 잘못 보고 있었던 듯하네.”
앙리 마르소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훈이 이번 일 끝나면 한번 들르게. 몇 점 골라둘 테니.”
앙리 마르소가 눈을 크게 떴다.
제3전시실에 있던 사람 모두 깜짝 놀랐지만 나는 할아버지와 비슷한 생각이라 크게 놀랍진 않았다.
할아버지는 앙리 마르소를 천박하게 여겼다. 작품을 투기 목적으로 사는 수집가로 여겼다.
항상 관심을 끌고자 행동했기에 할아버지에게 작품을 사고 싶다고 연락했던 것도 다른 목적이 있다고 생각하셨다.
오랫동안 거래가 중단된 ‘고수열’의 작품을 사면 큰 화제가 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이름 없는 작가들을 찾아내고, 작품을 사는 것으로 후원하는 그가 달리 보인다.
아마 할아버지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시리라.
“돈은 필요 없네. 자네가 미술관을 운영해서 나는 수익으로 더 많은 작품을 사들이는 것으로 족해.”
앙리 마르소가 드물게 반응하지 않았다.
눈치 보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던 그가 이번에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죠.”
앙리 마르소는 한참을 뜸 들이곤 답했다.
할아버지의 작품이 집에만 있는 게 안타까웠는데 이번 기회도 전시하게 되니 나로서도 기쁜 일이다.
“정말 대단하네요. 갤러리뿐만 아니라 미술관을 세운다니.”
소품 관리인 에밀리 러버가 감탄하자 다들 한마디씩 건넸다.
노먼도 나서서 팔짱을 낀 채 모른 척하는 마르소에게 물었다.
“그 미술관에 무명 화가의 작품도 전시할 계획인가요?”
“걸 만한 작품입니다.”
노먼이 살짝 미소 지었다.
“규모가 상당하겠네요. 연대 별로 없는 작품이 없겠어요. 중세부터 현대까지. 수집하는 목적이 원래 미술관 건립을 위함이었나 보죠?”
앙리 마르소는 부정하지 않았다.
이것이 앙리 마르소가 생각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인가.
그는 역사적 가치가 있는 걸작부터 진흙 속에 파묻힌 진주까지 수많은 미술품에 가치를 부여하는 듯하다.
아르센이 나섰다.
“작가님께선 질 들뢰즈의 말을 가슴 깊이 새기셨습니다.”
모든 화가는 각자의 방식으로 회화의 역사를 요약한다는 유명한 말이다.
나 또한 그 말에 깊이 동의한다.
어쩌면 앙리 마르소 미술관은 질 들뢰즈의 말을 속뜻이 아니라, 말뜻 그대로 이루기 위한 사업일지도 모르겠다.
“과거부터 현재. 나아가 미래의 미술품을 전시함으로써 작가님의 위치를 증명하려고 하셨죠.”
“……?”
갑자기 예상 밖의 말이 튀어나와 순간적으로 이해를 못 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방태호가 묻자 앙리 마르소가 아르센을 대신해 입을 열었다.
“내게 영향을 준 작품과 나의 세례를 받은 작품을 한곳에 전시하는 게 목적입니다.”
신부 외에 세례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은 처음이다.
“앙리 마르소 미술관에 전시되는 모든 작품이 나를 구성하는 요소니까.”
“…….”
“어……. 그러니까 미술관조차 하나의 작품처럼 여기신다는 말씀이세요?”
소품 관리인 에밀리 러버가 물었다.
“이해가 빠르군.”
미술관을 자신의 또 다른 자화상처럼 여긴다는 대답에 나도 방태호도 노먼 감독과 제작진도 황당해서 아무 말도 못 했다.
미술계에 활력을 주기 위해서.
무명 화가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기 위해서.
역사적인 의의를 위해서 등등 여러 의미가 있는 일이었거늘.
앙리 마르소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꺼냈다.
회화의 역사를 모두 자기를 중심으로 여기는 발상은 오만한 것을 넘어 황당하기까지 한데.
지금까지 내가 본 앙리 마르소라면 충분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진심으로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무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대단해 보인다.
“방금 했던 말은 못 들은 걸로 하게!”
할아버지가 크게 소리쳤다.
* * *
노먼 감독이 앙리 마르소와 소장품 대여에 관련한 계약을 진행 중일 때.
나는 할아버지, 방태호와 함께 셰리 가도 씨가 준비한 간식을 먹을 수 있었다.
배가 좀 부르긴 하지만 크렘브륄레의 달콤함을 포기할 순 없다.
“상상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이었네요. 앙리 마르소.”
방태호의 말에 할아버지가 노발대발했다.
기분 나쁘다며 당장 돌아가겠다고 하시는 걸 겨우 말렸는데, 다시 시작되었다.
“사람이 어찌 그렇게 오만할 수 있어? 태호 자네도 들었잖은가! 뭐? 세례? 작품? 난 그런 곳에 내 그림 줄 수 없네!”
할아버지를 진정시켰다.
“의도는 이상하지만 수단은 좋잖아요? 적어도 그 사람 덕분에 많은 화가가 작품 활동을 계속할 수 있으니까.”
“의도가 불순하니까 하는 말이야!”
할아버지는 앙리 마르소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듯싶다.
확실히 나도 앙리 마르소 미술관에 내 그림이 일부가 되는 게 꺼림칙했다.
내 작품이 마르소 미술관이라는 작품의 일부가 되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러나 사실 생각해 보면 그렇게 기분 나쁘진 않다.
“마르소가 제 작품에 영향을 받았단 뜻이잖아요? 할아버지한테도요.”
“……그렇지.”
“전 그 사람이 자기 외에는 아무도 인정 안 하는 사람인 줄 알았거든요. 근데 차라리 솔직하니까 아, 그런 사람이구나 싶어요.”
본인에게 영향을 받은 작가들이 세례받았다고 표현한 건 어이없지만 그들을 부정하진 않는다.
도리어 높이 평가하니 신기할 따름이다.
“완전히 자기를 중심으로 두는 거예요. 나한테 영향을 준 사람, 내게 영향을 받은 사람. 그 모든 게 자기를 표현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이 세상이 자기 위주로 돌아간다고 보니까 그런 행동을 하는 거예요.”
말을 뱉고 나니 이상하다.
“이상하지?”
할아버지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해요.”
속을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