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반 고흐 109화
26. 콜렉터(3)
영국에서의 일을 마친 노먼 일행은 곧장 프랑스로 향했다.
그들이 파리 세나르 숲에 위치한 마르소 저택에 도착했을 때는 12시 30분에 시작한 점심 식사가 3시간이나 흐른 뒤였다.
고훈은 모든 식사를 마친 뒤에도 생전 처음 먹어보는 다양한 음식에 빠져 있었다.
그런 소년을 위해 셰리 가도는 끊임없이 디저트를 가져다주었고.
덕분에 앙리 마르소, 고수열, 방태호는 식사를 끝내고도 한참을 자리를 지켜야 했다.
“합.”
“어때?”
“너무 맛있어요. 이렇게 맛있는 블루베리 타르트는 처음이에요. 어떻게 이렇게 바삭해요? 할아버지, 아저씨도 빨리 먹어보세요.”
고훈이 셰리 가도의 블루베리 타르트를 찬양했다.
잘 구운 쿠키처럼 바스러지는 식감 뒤에 커스터드 크림이 눅진하게 터져 나왔다.
그 달콤함에 신선한 블루베리 향이 감돌고, 과육과 파이가 어우러져 씹을 때마다 달라지는 식감이 즐거웠다.
‘빌어먹을. 식사 처음 해? 굶었어? 며칠 굶어 죽은 귀신이야?’
식사를 마치고도 고훈이 식사하는 모습을 1시간가량 지켜봐야 했던 앙리 마르소가 치밀어 오르는 욕을 간신히 억눌렀다.
격식을 신경 쓰는 편은 아니었으나 집주인으로서 귀중한 식사 시간을 방해할 순 없는 노릇.
그는 차마 어제 냉장고에 들어갔던 음식까지 해치우는 고훈을 뭐라 하지 못했다.
“합.”
고훈이 블루베리 타르트를 마저 입에 넣자 앙리 마르소와 고수열, 방태호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기나긴 식사 시간에 끝이 보였다.
“어때? 더 줄까? 망고 샤베트도 있는데.”
셰리 가도가 넙죽넙죽 맛있게 먹는 고훈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물었다.
“네.”
“아니야. 훈아. 그만 먹어.”
처음에는 복스럽게 먹는 손자를 사랑스레 지켜보던 고수열이 나서서 말렸다.
“샤베트만 먹을게요.”
“아니야. 더 먹으면 배 터져서 죽어.”
고훈이 할아버지의 만류에 아쉬워하던 차, 비서 아르센이 만찬회장에 들어섰다.
“작가님, 노먼 감독 일행 도착하셨습니다.”
노먼 감독이 찾아왔단 소식에 고훈이 드디어 수저를 내려놓았다.
소년이 냅킨으로 입 주변을 닦자 앙리 마르소와 고수열, 방태호가 그제야 반색했다.
고수열은 탈이 나진 않을까 걱정되어 볼록 튀어나온 손자의 배를 쓰다듬었다.
“크흠.”
앙리 마르소가 기침하여 이목을 모았다.
“전시실로 가시죠.”
앙리가 아르센에게 시선을 보내 사람들을 안내하라고 지시했다.
* * *
<기암성> 제작진이 도착하는 바람에 식사를 마치진 못했지만, 훌륭한 하루였다.
생각지도 못한 방식의 휴식과 다시 맛볼 수 있을까 싶은 셰리 가도의 음식 덕분에 더할 수 없이 행복하다.
할아버지는 자꾸 내 배를 문지르며 괜찮냐고 물으신다.
“정말 괜찮아요.”
“아프면 꼭 말해. 응?”
처음에는 라지 사이즈 피자를 한 조각만 먹어도 배가 터질 듯이 불렀는데 지금은 곧잘 먹는다.
내게 식탐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맛있는 음식을 향한 집착이 없진 않은 모양이다. 아무래도 성장기인 것도 어느 정도 영향을 받는 듯하다.
앙리 마르소를 따라 저택 밖으로 나섰다.
아주 작은 자동차를 타고 2~3분 정도 달리니 또 다른 건물이 나왔다.
아마도 별관인 듯한데 이 역시 만만치 않다.
노먼 일행이 보인다.
“노먼.”
“잘 지냈어? 얼굴이 좋은데?”
반갑게 인사하자 노먼이 날 살피며 반겼다. 일행도 며칠 못 본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며 인사를 나눴다.
“방송 잘 봤어. 잘하던데? 밥 로스 같았어.”1)
“밥 로스?”
노먼이 처음 듣는 이름을 언급했다. 고개를 갸웃하는데 방태호가 설명해 주었다.
“미국 화가신데 미술의 대중화에 엄청나게 공헌하신 분이야. 아마 한국에서는 피카소, 반 고흐만큼이나 유명할걸?”
할아버지도 고개를 끄덕이시는 걸 보니 대단한 사람 같다. 내 방송을 보고 그런 작가가 떠올랐다고 하니 멋진 일이다.
또 어떤 사람이길래 노먼과 방태호가 이리도 극찬하는지 궁금하다.
“지금도 작품 활동 해요?”
“아니. 돌아가셨어. 그래도 미술관은 남아 있고 또 방송도 있으니 찾아볼 수 있을 거야.”
영상으로 남은 기록이라는 건 참 대단하다. 과거 명장의 목소리를 듣고 표정과 작업 과정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착각하지 마.”
앙리 마르소가 정색하고 나섰다.
“밥 로스는 사람들이 쉽게 그림을 접할 수 있게 한 위인이야. 네가 그린 고양이 해바라기를 일반인이 어떻게 따라 그려?”
“내 방송 봤어요?”
바쁜 와중에 챙겨봤구나 싶어 물어보니 앙리 마르소가 움찔했다.
“……들어가지.”
대답도 없이 들어간다.
화려한 문으로 들어서자 조금은 더운 밖과 달리 실내는 쾌적했다. 습도와 온도도 적당하고 여러 미술관에서 보았던 스마트 LED도 눈에 띈다.
이만한 작품을 보관하고 있으니 무리도 아니다.
“세상에.”
방태호가 감탄했다.
그뿐만 아니라 노먼과 제작진들도 입을 다물지 못한다.
“이곳 제1전시실은 르네상스 시대를 포함한 그 이전 작품을 모아 전시하고 있습니다.”
비서 아르센이 앙리 마르소를 대신해 설명했다.
“허.”
모퉁이를 돈 할아버지가 탄식했다.
어떤 작품을 보고 놀라셨나 싶어 걸음을 재촉하니 나 또한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말도 안 돼.”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이다.2)
천국과 속세 그리고 지옥이 분리된 그곳에는 인간의 욕망과 죄악이 모두 담겨 있다.
특히나 지옥을 표현한 방식은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우측 하단에 인간을 잡아먹는 파리 형상의 베엘제불. 좌측 만돌린에 박힌 하프에 매달린 죄인.
상단에 도망치려는 이들을 활로 쏘아 죽이려는 악마.
어떻게 이러한 밀도로 작품을 완성할 수 있는지 모를 일이다. 대충 가로로 4m 세로로 2m에 달하는 이 대작의 어느 곳을 보더라도 심상이 밀려든다.
현대를 조금이나마 경험한 나조차 떠올리기 힘든 이미지들에 말문이 막히고 만다. 천재적인 발상이라는 말 이외에는 이 작품을 설명할 길이 없다.
또한.
이런 대작을 어떻게 한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지 황당하기 짝이 없다.
“맙소사.”
아트 디렉터 네이선 에반스도 깜짝 놀랐다.
“마르소 씨, 이걸 대체 어떻게 소장하게 되셨습니까?”
앙리 마르소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자 비서 아르센이 대신 설명해 주었다.
“유래가 어떻게 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18세기경부터 마르소 가문에서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물려받았단 소리다.
국보급 작품을 물려받았다고 하니 이 또한 황당무계한 말인데, 왕족이었다고 하니 또 그럴 수 있나 싶기도 하다.
<서리 밀밭>을 1,400만 달러에 살 때만 해도 미쳤구나 싶었거늘 상상 이상으로 부유하다 싶다.
대저택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이 성도 그렇고.
“라파엘로는 어디 있어요?”
“복도 반대편.”
앙리 마르소가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세속적인 쾌락의 동산>에게 받은 충격과 라파엘로의 <어린 코퍼와 마돈나>를 향한 기대를 모두 잊고 말았다.
“미친.”
이것은 전율이다.
나도 모르게 비속어가 나왔지만, 내게 예쁜 말을 쓰라고 반복해 말씀하시던 할아버지조차 신경 쓰지 못했다.
“대영박물관이야?”
방태호의 말에 심히 공감한다.
이곳이 루브르나 오르세의 일부라고 해도 믿을 수 있다.
장 프랑수아 밀레 스승의 <양치는 소녀와 양떼>가 눈앞에 있다.3)
저 노을.
저 성스러운 빛이 끝없이 펼쳐진 들판을 가득 비추고 있다.
밀레 스승의 탁월함은 지평선을 표현함부터 드러난다.
완전한 직선이 아니라 살짝 곡면을 이루고 그 아래 길들이 조금씩 방향을 틀어, 양이 들판 면적을 대부분 차지하고 있음에도 광활해 보인다.
두건을 쓴 소녀의 기도하는 모습은 또 얼마나 고결한가.
거룩한 은혜의 빛 아래 평화롭게 풀을 뜯어 먹는 온순한 양과 야훼의 순종적인 양이 함께하고 있다.
밀레 스승은 태양과 빛, 구름과 들, 양과 소녀에게서 야훼를 찾은 것이다.
나는.
일찍이 이분의 작품에 이끌려 붓을 들게 되었다.
“…….”
누구 하나 먼저라고 할 것도 없었다.
<양치는 소녀와 양떼> 앞으로 한 명씩 모여들고 얼마간 우리는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밀레 스승과 같은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만큼은 그와 우리가 이어져 있었다.
한두 세기 전에 위대한 화가가 남긴 감정과 시선을 공유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아.”
순간 다리가 풀려 주춤거리자 할아버지가 등을 받쳐주었다.
“어때?”
앙리 마르소가 의기양양하게 턱을 들고 물어본다.
“부러워요.”
솔직한 심정이다.
이 그림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볼 수 있는 그가 부럽다.
“흥. 어제 올 걸 그랬지?”
“네?”
뭔 말이야 또.
“정말 너무 멋져요. 저 들판 좀 보세요. 민들레 하나, 풀잎 하나까지 완벽해요. 저 양들은 어떻고요. 생김새가 전부 다르잖아요. 구름은 또 어떻고요.”
“여자애 표정도 훌륭해.”
“맞아요. 어떻게 저 작은 공간에 앳된 얼굴과 겸허함을 함께 표현할 수 있지?”
“빛이 절묘하게 표현했어. 밀레 말고 저렇게 쓰는 사람 봤어?”
“아뇨. 세상에 양털마다 하나하나 깃들어 있잖아요. 붓털을 하나하나 움직일 수 있던 게 분명해요.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리겠어요.”
“양털뿐이야? 공기를 채웠잖아. 허공을 그림 전체에 빛이 안 깃든 곳이 없어. 형태가 없는 것까지 그려내는 사람이야.”
성격은 거지 같아도 밀레 스승에 대해서는 조금 안다.
처음으로 그와 말이 통했다.
* * *
1)밥 로스(본명 로버트 노먼 로스, 1942~1995).
미국 출신 화가로 국내에는 1994년 EBS에서 방영한 <그림을 그립시다>로 알려졌다.
전 세계적으로 그림을 대하는 자세와 즐기는 방법을 알리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어때요. 참 쉽죠?”라는 클로징 멘트로 유명하다.
반려동물 청설모가 귀엽다.
2)<세속적인 쾌락의 동산> 지옥 일부, 히에로니무스 보스, 캔버스에 유화 물감, 1504년 추정. 프라도 미술관 소장.
3)<양치는 소녀와 양떼>, 장 프랑수아 밀레, 캔버스에 유화 물감, 1864, 오르세 미술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