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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반 고흐-108화 (63/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108화

26. 콜렉터(2)

그나저나 밥을 먹으니 더더욱 졸음이 몰려든다.

옷은 갈아입어야 하겠는데 나도 모르게 고개를 떨어뜨리게 된다. 10분 만이라도 자야겠다 싶어서 침대에 누우니 할아버지가 부르신다.

“훈아, 양치해야지.”

“……네.”

일어나야지. 10시에 보기로 약속했으니까. 그런데 굳이 일어날 필요가 있을까. 아니지. 라파엘로를 보러 가야 하는데 일어나야지. 혹시 지금이라도 연락해서 1시간 정도 약속을 늦추자고 하는 건 괜찮지 않을까.

“…….”

“요놈.”

어느새 또 잠들었던 모양. 할아버지가 나를 번쩍 드는 바람에 깨고 말았다.

할아버지가 칫솔에 치약까지 묻혀 주어서 어쩔 수 없이 입에 물었다.

매운맛 때문에 잠이 조금 물러나는 듯하다.

할아버지가 안타깝게 바라보신다.

“왜요?”

“피로가 쌓여서 그래. 이번 일 마치면 할아버지랑 며칠 푹 쉬자.”

“네.”

확실히 하루 정도 잠을 뒤척였다고 이만큼 피곤하진 않을 거다.

어린 몸으로 한 달을 쉬지 않고 달린 데다 지구 이곳저곳을 다녔으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피로가 누적된 듯하다.

할아버지 말씀대로 며칠 정도 쉬는 게 좋겠다.

“이제 나가야겠구나.”

할아버지가 로션을 짜 내 얼굴에 펴 발랐다. 얼굴이 뭉개지는 와중에 양말을 신자 마침 방태호가 문을 두드렸다.

호텔 밖으로 나서니 앙리의 비서 아르센이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한 시간보다 2분 먼저 내려왔는데, 미리 와 있었던 모양이다. 잠들었으면 무척 미안해질 뻔했다.

“안녕하세요.”

아르센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모두가 평등한 세상인데, 11살인 내게도 이렇게 대하는 게 조금은 불편하다.

“피곤해 보입니다.”

“네. 푹 못 잤거든요.”

아르센이 걱정스럽게 바라본다.

우선 그가 열어준 문으로 자동차에 올라탔다. 마음 씀씀이가 따뜻한 남자가 차를 몰기 시작했다.

“괜찮으시다면 회복실을 이용해 보시는 게 어떠십니까.”

“회복실이요?”

“네. 두 시간 정도 보내면 훨씬 나아질 겁니다. 그런 뒤 식사하시고 노먼 감독과 함께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워낙 피곤해서 그러자고 하려던 차 할아버지가 먼저 대답하셨다.

“그럼 부탁 좀 드려요.”

“네. 두 분께서도 함께 받아보시길 바랍니다.”

“아뇨. 전 괜찮습니다. 학장님과 훈이만 부탁드릴게요.”

“나도 괜찮아요.”

방태호와 할아버지가 거절하신다.

체격이 좋고 건강해서 나보다는 덜하겠지만 두 사람도 이번 여행을 함께한 만큼 피로가 쌓였으리라.

이런저런 일을 도맡아주기도 했고.

회복실이라는 게 정확히 무엇을 해주는 곳인지는 몰라도 안 받는 것보단 나을 거다.

“같이해요. 할아버지도 아저씨도 피곤하시잖아요.”

“네. 부담 갖지 마시길 바랍니다. 작가님께서 극진히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마르소가?”

할아버지가 고개를 갸웃하신다.

아르센이 왼쪽 귀를 툭툭 두드리곤 회복실을 준비해 달라고 했다.

스마트폰을 꺼낸 것도 아니고 혼잣말하는 줄 알았는데, 귓구멍에 넣은 것으로 전화를 걸 수 있는 모양.

참으로 신기한 세상이다.

“아.”

깜빡하고 말았다.

아무리 마르소를 찾아간다고 해도 예는 지켜야 하는 법.

“가는 길에 잠깐 꽃집에 들를 수 있어요?”

“꽃집?”

방태호가 고개를 갸웃한다.

“하하. 괜찮습니다. 작가님께서는 격식을 중요하게 생각지 않으십니다.”

“지킬 건 지켜야죠.”

할아버지를 올려다보니 고개를 끄덕이신다.

“선물 가져가는 것도 알아?”

“뉴튜브에서 배웠어요.”

인터넷과 뉴튜브를 알고 나서는 모든 의문이 이 대답으로 해결된다.

가는 길에 꽃집에서 작은 화분과 카드를 샀다.

* * *

“으어어어.”

“쿠르르. 컥. 쿠르륵. 컥.”

“……피자.”

마르소 저택의 집중회복실에 고훈, 고수열, 방태호 나란히 누웠다.

30분간 센슈얼 마사지를 받고.

고압산소가 유지되는 회복 캡슐 안에서 파라핀 목욕을 하는 세 사람은 은은한 자스민 향에 취했다.

외부 소음을 줄이기 위해 낀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에서는 수면 유도에 효과를 보인 바이올린 소나타가 흘러나왔다.

세상과 완전히 단절되어 안락함을 맛보던 세 사람은 금세 잠들고 말았다.

1시간가량 숙면하고 일어난 고훈은 가뿐한 몸에 감탄했다. 정신이 또렷하여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캡슐이 열리자마자 고개를 돌려 할아버지를 찾았다.

“할아버지, 하나도 안 피곤해요.”

“그러게나 말이다.”

고수열도 고훈과 마찬가지로 적잖이 놀랐다.

목 근육이 항상 뭉쳐서 만성 피로를 느꼈는데, 간단한 마사지와 1시간 정도 잠든 것만으로 몸이 풀리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이쪽으로.”

마르소 저택의 회복실 관리인이 직원들과 함께 그들을 안내했다.

몸에 붙은 파라핀을 떼어내고 다시 한번 마사지를 해주니 고수열, 고훈, 방태호는 몸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마르소 저택의 직원이 찬물로 샤워를 하고 가운을 두르고 있는 세 사람에게 특제 케일애플 주스를 가져다주었다.

달콤하면서도 청량한 음료에 고훈이 눈을 크게 떴다.

“와. 이거 진짜 좋은데. 선생님, 어떠세요?”

“확실히 신기하구만. 가뿐해.”

졸음과 피로를 한순간에 씻어낸 고훈이 큰마음을 먹었다.

작품 활동에 드는 비용을 제외하곤 근검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회복 캡슐은 구입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밤을 새워 그림을 그려도 고작 한두 시간 만에 개운해질 수 있으니 꼭 하나 장만하고 싶었다.

“할아버지, 우리도 그 캡슐이란 거 사요.”

“으음.”

고수열이 갈등했다.

60대 적지 않은 나이에도 근육질 몸매를 유지하는 그는 건강을 위해서는 운동이 최고라고 여겼다.

건강 관련 상품은 대부분 허위, 과장된 물건이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체험하고 나니 하나쯤 집에 두어도 괜찮겠다 싶었다.

“그거 사면 밤새 그림 그려도 되잖아요.”

고훈이 갈등하는 할아버지를 한 번 더 설득했다.

“피로가 누적되면 효과가 줄어들어요. 그런 용도로 구입하면 실망하실 거예요.”

회복실 관리인의 말에 고훈이 낙담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가끔 쓰기엔 좋겠는데요. 얼마나 해요?”

“구입 당시 3만 유로였습니다.”

관리인이 알려준 회복 캡슐 금액에 방태호가 눈을 크게 떴다. 그가 타고 다니는 차보다 비싼 가격에 사고 싶은 마음을 접었다.

고훈도 생각 이상으로 큰 금액에 고민했다.

‘법인에서 한 달에 220만 원씩 나오니까 19개월…….’

본인 소유의 법인 ‘고훈’에서 매달 220만 원의 월급을 타고 있는 고훈에게도 너무나 부담스러운 금액이었다.

19개월 동안 어떤 간식과 음식도 먹지 못하고 모아야 살 수 있단 생각에 케일애플이 든 컵을 만지작댈 뿐이었다.

“할아버지, 법인에 있는 돈은 못 써요?”

“왜 못 써? 쓸 수 있지.”

“그림이랑 상관없는 건 못 쓴다고 하셨잖아요? 그럼 저 캡슐 못 사는 거 아니에요?”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달렸지. 직원 복지를 위해서 샀다고 하면 되는데. 왜. 그렇게 사고 싶어?”

고훈이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그래. 한번 생각해 보자꾸나.”

관리인의 말대로 회복 캡슐만을 믿고 무리하면 안 되겠지만, 가끔 이렇게 쌓인 피로를 풀어낼 수 있다면 장만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손자가 법인계좌에 묶인 돈을 쓰고 싶을 정도로 원하니 다음 달 1일에 돌아오는 생일 선물로 괜찮겠다 싶었다.

‘태호도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으니 격려차 하나 선물하고.’

고수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쉬고 계시면 식당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고생하셨어요.”

고훈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처음 마르소 저택에 들어올 때도 생각했지만, 그가 직접 본 어떤 건물보다 고풍스러웠다.

18세기 프랑스에서 잠시 성행했던 로코코 양식으로 건축된 거대한 성은 외부가 빈틈없이 보수되어 있었다.

푸른색 외벽과 새하얀 기둥.

섬세하게 조각된 장식물이 도금되어 사치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안으로 들어서면 사물이 비칠 정도로 광이 나는 대리석 바닥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이런 곳에서.’

고훈은 어린 나이에 어지간한 성 규모의 대저택의 주인이 된 앙리 마르소가 유년 시절을 어떻게 보냈을지 상상할 수 없었다.

“식사 준비되었습니다.”

고훈 일행이 직원의 안내를 받아 만찬회장으로 향했다.

* * *

한편.

하루를 꼬박 기다리고도 두 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던 앙리 마르소가 턱을 괸 채 고훈을 기다렸다.

<어린 코퍼와 마돈나>를 비롯해 자신의 수집품을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기에 고훈의 늑장이 몹시 마음에 안 들었다.

게다가 어제 유모 셰리 가도가 정성스레 만든 요리가 그대로 냉장고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앙리 마르소는 고훈이 또 한 번 무례한 짓을 저지르기만을 벼르고 있었다.

때마침 고훈이 만찬회장에 들어왔다.

사람을 두 번이나 기다리게 해놓고 해맑게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는 모습이 가증스러웠다.

앙리 마르소가 어른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환영합니다, 고수열 경. 방태호 대표.”

“큼. 초대해 줘서 고맙네.”

“덕분에 푹 쉬었습니다.”

고수열과 방태호가 앙리 마르소와 인사를 주고받았다.

‘흥.’

앙리 마르소는 인사를 건네주지 않은 고훈이 스스로의 잘못을 깨닫고 지금이라도 사과한다면 너그러이 용서해 줄 요량이었다.

“초대해 줘서 고마워요.”

그러나 고훈은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하고 자리에 앉았다.

“…….”

인사해 주지 않아 난감해하는 모습을 기대했던 앙리가 다소 당황했다.

‘뭐, 적어도 고마운 건 아니까.’

앙리 마르소가 손짓했다.

비서 아르센이 종을 울려 요리를 들이라는 신호를 보냈다.

잠시 후 마르소 저택의 직원들이 술잔을 가지고 들어왔다.

고훈이 유리잔 안에 은은하게 감도는 노란빛과 탐스러운 과육을 뽐내는 오렌지에 시선을 빼앗겼다.

식전주로 나온 릴레 블랑이 모든 사람 앞에 놓였다.

“…….”

다만 고훈 앞에는 무가당 오렌지 주스가 놓일 뿐이었다.

“드시죠.”

앙리가 잔을 들었다.

프랑스의 식전주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방태호가 술 냄새를 맡아보곤 조심스레 입을 축였다.

“와. 이거 좋은데요?”

방태호의 솔직한 감상이 고훈을 흔들리게 했다.

지독히도 술을 좋아했던 그는 지난 생 그를 괴롭게 했던 술을 다시는 입에 대지 않기로 마음먹었으나.

막상 보기에도 아름다운 술을 눈앞에 두니 납이 들어 있지 않은 술은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다만 어린아이라 차마 달라고 하지 못할 뿐이었다.

“그건 마셔도 돼요?”

고훈이 고수열에게 물었다.

“음?”

“납 없어요?”

“하핳. 그래. 요즘 술에 납이 들어가진 않지. 무슨 맛인지 궁금해?”

“네!”

“안 돼.”

“…….”

고훈이 실망하는 기색을 보이며 오렌지 주스를 마시자 앙리가 그제야 만족스럽게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작은 승리감일 뿐.

자신을 기다리게 한 것과 유모가 정성스레 준비한 음식을 냉장고에 들어가게 한 죄는 반드시 치러야 했다.

마르소 저택의 급사장이자 앙리 마르소의 유모이기도 한 셰리 가도가 음식을 내왔다.

그녀와 주방장들이 준비한 아뮤즈 부쉬(amuse-bouche: 입을 즐겁게 하는 음식. 전채)는 버터와 와인으로 조리한 전복과 연어 타르타르, 푸아그라 테린 그리고 한국인인 고훈 일행을 위해 준비한 한국식 두부구이였다.

“반가워요. 셰리라고 해요. 한국에서 오셨다고 해서 두부를 구워봤는데 입에 맞을지 모르겠어요.”

고훈이 두부를 한입에 넣고 소란을 피웠다.

“맛있어요. 겉은 바삭한데 씹으면 고소한 향이 올라와요. 이건 에스파뇰 소스예요?”

“어머. 잘 아는구나. 맞아. 우리 목장에서 직접 만든 버터랑 소고기 육수로 만들었는데.”

“정말 최고예요. 이렇게 맛있는 에스파뇰 소스는 처음이에요. 두부랑 너무 잘 어울려요.”

“홓호홍홓홓. 어쩜. 이렇게 말도 예쁘게 하니? 좀 더 줄까?”

“네. 부탁드릴게요, 마담.”

“어머. 어머. 세상에. 예의도 바르지. 그래 아줌마가 바로 가져다줄게.”

“아, 그리고 이거. 멋진 식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훈이 종이가방에 넣어두었던 작은 화분을 꺼냈다. 보랏빛 아이리스 세 송이가 싱그럽게 피어 있었다.

“정말 예의 바른 아이구나. 앙리가 널 왜 그렇게 괴롭혔는지 모르겠구나.”

“…….”

앙리 마르소가 눈썹을 꿈틀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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