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107화 (62/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107화

26. 콜렉터(1)

다음 날.

약속했던 대로 프랑스 파리로 향했다.

저번에 왔을 때 오르세 미술관을 제대로 구경하지 못해서 다시 들르고 싶지만, 우선은 앙리 마르소의 소장품도 구경하고 싶다.

특히나 라파엘로의 <어린 코퍼와 마돈나>라는 작품은 앙리 마르소의 개인 소장품인 만큼 이번 기회가 아니면 보기 힘들 테니까.

“꼭 가야겠어?”

할아버지가 웬일로 비행기 안에서 안 주무시고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셨다.

“오르세는 어떠냐? 저번에 제대로 구경 못 했잖아.”

앙리 마르소 집에는 정말로 가고 싶지 않으신 듯하다.

“영화 소품 구하는 중요한 일이래요.”

명화를 구경할 수 있는 일이라니 이보다 좋은 일은 없을 거다.

“그럼 할아버지는 안 가련다. 아저씨랑 둘이 다녀와.”

“라파엘로 그림 보고 싶지 않으세요?”

“…….”

하지만 할아버지도 라파엘로 앞에서는 어쩔 수 없다.

괜히 헛기침하시곤 모른 척하신다.

한 시간 정도 흐르자 파리에 곧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아껴 먹고 있던 직원이 준 과자를 서둘러 입에 털어 넣었다.

공항 밖으로 나오니 마르소의 비서 아르센 뮈소가 공항으로 마중 나와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안녕하세요.”

아르센이 가지고 온 차는 다른 차들과 달리 밝은 갈색으로 나무로 만든 것처럼 보였다.

“오.”

할아버지와 방태호도 신기한 듯 자동차를 살폈다.

손을 대보니 나무는 아니다.

일반적으로 쓰는 물감 같지는 않은데 어떤 물감을 쓴 건지 착색과 발색이 뛰어나다.

이 넓은 범위를 고르게 칠한 솜씨나 무늬와 결 표현도 대단하다.

“이런 모델은 처음 보네요.”

“작가님께서 직접 도색한 차량입니다.”

방태호의 질문에 아르센이 미소 지으며 답했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노먼은 도착했어요?”

“내일 저녁에 도착한다고 연락받았습니다.”

영국에서의 일이 아직 다 해결되지 않은 모양이다.

<기암성>뿐만 아니라 올해 개봉작에 관련한 여러 일을 함께 진행하고 있는 노먼과 직원들이 그저 대단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이것을.”

아르센이 편지 봉투를 건넸다. 금박으로 화려하게 수 놓은 봉투는 밀랍으로 봉인되어 있었다.

밀랍이 한 송이의 백합처럼 굳은 걸 보면 마르소 가문의 문장인 듯하다.1)

“왕족이었어요?”

백합은 오래전부터 프랑스 왕실에서 사용하던 문장이다.

“그렇습니다.”

앙리 마르소의 성격이 왜 그 모양이었는지 궁금했는데 이제야 의문이 풀렸다.

대물림받은 성격인 듯하다.

아르센이 함께 넘긴 칼로 봉투를 열었다.

귀하를 본 마르소 가에 초대합니다라는 기품 있는 문구로 시작하는 초대장이다.

마르소가 쓴 건 아닐 것이다.

마지막 줄에 추신이 붙어 있다. 이건 본인이 직접 쓴 것 같다.

정 갈 데 없으면 오든가.

고개를 끄덕이며 초대장을 봉투에 넣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노먼이 잡아 준 숙소가 있어요. 그쪽으로 갈게요.”

“알겠습니다.”

방태호가 스마트폰을 펼쳐 노먼 프로덕션이 예약해 준 호텔 주소를 알려주었다.

앙리 마르소가 보낸 차는 외부 소음이 조금도 들리지 않고, 작은 둔턱을 넘어도 흔들리지 않아서 편히 이동할 수 있었다.

“그럼 내일 오전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언제쯤 괜찮으시겠습니까?”

할아버지와 방태호를 번갈아보며 답을 구하니 방태호가 입을 열었다.

“너무 일찍 가면 실례가 될 테고. 10시쯤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마르소에게도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네.”

* * *

앙리 마르소가 귀빈실을 둘러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와 같이 말끔하게 정리된 방에서 막 나서려던 차 창밖으로 애마가 돌아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앙리 마르소가 옷깃을 정리하곤 느긋하게 발을 옮겼다.

2층 복도를 지나 중앙 계단을 내려갈 즈음 비서 아르센이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앙리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있어야 할 녀석이 안 보였다.

“다녀왔습니다.”

아르센이 고개를 숙였다.

“고수열 경은?”

앙리가 고수열을 찾자 아르센이 벗은 모자를 옆구리에 끼며 답했다.

“노먼 감독이 잡아준 숙소로 모셨습니다.”

“초대장은?”

“고훈 군에게 전했습니다.”

“그걸 읽고도 안 왔다고?”

“네. 내일 오전 10시에 모시러 가기로 했습니다. 고훈 군이 차량을 보내주어 고맙다고 전해달라 했습니다.”

앙리가 입술을 씰룩였다.

자신의 수집품을 자랑하고자 아침부터 전시실과 귀빈실 단장을 직접 감독하고 기다렸거늘.

더욱이 친필 초대장까지 써서 보냈음에도 고훈이 하루를 더 기다리게 하니 그의 심기가 몹시 불편했다.

한차례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눠 조금은 마음을 열었던 게 후회되었다.

앙리 마르소가 옷자락을 휘날리며 뒤돌았다.

아르센이 의아해하던 차 식사를 준비하던 앙리 마르소의 유모 셰리 가도가 밖으로 나섰다.

“혼자 왔어? 손님들은?”

“예?”

아르센이 눈썹을 들어 올리며 되물었다.

“앙리가 손님 오니까 음식 준비하라고 했는데.”

“초대장은 전했습니다만 내일 오겠다고 했습니다.”

“어쩜 좋아. 바로 올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너도 알다시피 걔가 친구 들이는 거 처음이잖니. 아침부터 난리던데.”

“하하.”

그러고 보니 저택을 나설 때와 분위기가 달랐다. 카펫도 새것이었고 화분도 늘어나 있었다.

“앙리, 앙리!”

셰리 가도가 중앙 계단을 오르며 앙리 마르소를 불렀다.

서재로 들어선 셰리가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앙리를 보곤 등을 때렸다.

“약속한 것도 아니면서 음식을 준비하라고 하면 어떡하니? 저 많은 걸 누가 먹으라고.”

“집안에 사람이 한둘이야?”

“얘는. 그걸 어떻게 다 먹니?”

앙리 마르소의 씀씀이를 탓하던 셰리 가도가 앙리 마르소의 옆모습을 보고 입을 막았다.

“어머. 혹시 상처받았니? 친구 안 왔다고?”

“무슨 소리야!”

“세상에. 우리 앙리가 속상해하기도 하구나. 내가 너무 무심했네. 괜찮아. 그럴 수도 있는 거야. 내일 온다고 하잖아.”

“시끄러워! 할 일 없으면 누워서 TV나 봐!”

“얘, 내가 왜 할 일이 없니? 아침부터 네 친구 맞이하려고 요리하느라 허리가 빠지겠구만.”

“그걸 왜 유모가 해! 내가 일하지 말랬지!”

“다들 고생하는데 어떻게 안 하니?”

“허리 아프다면서!”

“그래도 아직은 내가 주방에 있어야지. 나 아니면 네 까다로운 입맛을 누가 맞춰주니?”

앙리 마르소의 말문이 잠시 막혔다.

“시끄럽고 앞으로 일하지 마. 경고했어.”

“아직은 괜찮아. 일 안 하면 심심하기만 하지.”

셰리 가도가 앙리 마르소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빙그레 웃으며 엉덩이를 팡팡 두드렸다.

“우리 앙리 다 컸네? 걱정도 다 해주고.”

“걱정은 무슨. 심심하면 나가서 쇼핑이라도 해. 마사지를 받는 스파를 하든. 카드는 받아놓고 왜 안 써?”

“어휴 됐어. 그래서? 내일은 확실히 온대?”

“몰라!”

* * *

라파엘로의 작품을 본다는 생각에 잠을 뒤척였다.

아침이 밝아올 즈음에야 잠들어서 할아버지가 깨우는 소리에 겨우 일어났다.

직원이 가져다준 빵과 샐러드를 먹는데 눈꺼풀이 자꾸만 감긴다.

질 좋은 버터 냄새를 한껏 풍기는 빵이라 안 먹으면 후회할 것 같아 눈을 감은 채 먹고 있으니 할아버지가 웃었다.

“이 녀석아, 접시에 코 박겠어.”

“졸린 걸 어떡해요.”

“잠을 못 잤어?”

고개를 저어 잠을 쫓아냈다.

“라파엘로 그림 본다고 생각하니까 잠이 안 와서 스마트폰으로 찾아봤어요.”

“자기 전에 핸드폰 보면 안 좋다니까.”

“맞아요.”

이걸 찾아보면 저게 궁금하고.

궁금한 것도 없으면서 괜히 아무거나 열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다.

인터넷이라는 건 참으로 무서운 거다.

“그래도 하나 알아낸 게 있어요.”

“뭘?”

“빈센트가 아팠던 이유요.”

어제 명화를 검색하다 보니, 어떤 사람이 쓴 ‘빈센트 반 고흐를 힘들게 한 몇 가지’라는 글에 도달했다.

할아버지 말씀으로 대충 납중독에 걸려 병을 얻었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는데.

글을 읽어 보니 확실히 아플 수밖에 없었다.

“간질 치료제가 도리어 더 안 좋았대요.”

“그게 무슨 말이냐?”

“디곡신? 발작을 억제하는 물질이 들어 있었는데 그게 가슴을 심하게 뛰게 하고 불안증을 높였대요.”

“흠. 확실히 당시 의료 수준이면 잘못 처방했을 수도 있겠구나.”

할아버지가 20세기 초에는 감기 걸린 사람에게 모르핀을 주었다고 한다.

“모르핀이 뭐예요?”

“마약이야.”

“……아픈 사람한테 마약을 줘요?”

“보기에는 얌전해지니 괜찮아졌다고 생각한 거지.”

환자를 편하게 하는 게 아니라 주변 사람을 편하게 하는 처방이다.

“그리고 와인 때문이라고 하셨잖아요.”

납중독 이야기다.

“그랬지.”

“저는 압생트 때문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실제로 압생트를 마시면 이유를 알 수 없이 정신이 또렷해졌다. 연거푸 마시면 기분이 묘해지면서 환각을 보는 듯했으니 몸에 안 좋은 걸 알면서도 많이 마셨다.

“실제로 압생트를 마시면 주변 색이 더 밝게 느껴진대요. 그런데 그 때문이 아니었어요.”

할아버지가 흐뭇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셨다.

“1990년에 밝혀진 내용인데, 압생트에 들어 있는 테르펜, 투존이라는 물질을 장기간 복용하면 시신경이 파괴될 수 있대요.”

“그러면 압생트 때문에 고생한 게 맞았구나.”

고개를 저었다.

“테르펜이 몸에 오래 남는 물질은 아니래요. 만약 압생트에 들어 있는 테르펜 때문에 문제가 생기려면 2g 이상을 먹어야 부작용이 생긴대요.”2)

“2g이면 엄청 적은데?”

“네. 근데 압생트 1L에 테르펜이 6mg이 들어 있었대요.”

대충 압생트 때문에 내 몸에 문제가 생기려면 333L를 마셔야 한다.

신체에 오래 남는 물질도 아니니까 그것도 단기간에 마셔야 한다.

아마도 그전에 배가 터져 죽고 말 거다.

내가 느꼈던 ‘환각을 보는 듯한 기분’은 압생트의 각성 효과다.

지금은 커피에 들어 있는 성분보다도 아주 소량의 각성 성분이 들어 있었는데.

당시만 해도 각성제에 노출이 적었던 나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엄청난 효과를 불러일으켰던 거란다.

“그래서 집안 내력으로 물려받은 간질이 잘못된 약과 술에 섞어 먹던 납 성분의 감미료, 물감을 먹는 것 때문에 심해졌다고 해요.”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관련한 이야기가 또 하나 있단다.”

열심히 아는 척을 했는데 할아버지는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내가 말할 수 있게 적당히 맞춰주신 거다.

“뭔데요?”

“압생트에 대한 이미지는 사실 많은 점이 부풀어 있단다. 마약 성분이 들어 있어서 수입할 수 없다, 지금은 그 마약 성분을 제거했다는 이야기도 돌고 있어.”

현대에도 압생트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술인 모양이다.

“19세기와 20세기에 퍼진 압생트에 관한 나쁜 소문은 대부분 와인을 만드는 사람들이 퍼뜨린 거란다.”

“왜요?”

“사람들이 값싸고 취하기 쉬운 압생트를 마시니까 와인이 잘 안 팔렸거든.”

확실히 나만 해도 압생트를 마신 건 값이 저렴하고 구하기 쉽기 때문이었다.

돈이 없으니까 쉽게 취할 수 있는 술을 찾은 거다.

정말.

숨겨진 진실을 알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지 새삼 느낀다.

1990년에 밝혀진 일을 가지고.

지금도 압생트에 관련한 의심이 완전히 거둬지지 않았으니까.

* * *

1)플뢰르 드 리스.

성 삼위일체의 상징. 프랑스 부르봉 왕가를 비롯해 많은 가톨릭 문화권에서 문장으로 활용하였다.

생김새로 추론해서 아이리스(붓꽃)이란 설도 있다.

2)CGS 단위계는 1832년 프랑스에서 제창되었다.

당시 사람들에게 널리 전파되지 않았지만 캔버스의 규격화 등 점차 사람들의 일상으로 파고들었다.

1890년에 사망한 빈센트 반 고흐가 비교적 지식인이었다는 걸 감안하고, 캔버스 규격 등 CGS 단위계에 노출이 많았던 입장이었으니 현대 도량형에 익숙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