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태어난 반 고흐-105화 (60/454)

다시 태어난 반 고흐 105화

25. 포스터(8)

고훈이 출연한 쉬민케 홍보 방송이 큰 화제를 끌었다.

최근 휘트니 비엔날레에서 <가면>을 공개하며 세계적 인지도를 쌓고 있는 천재 소년을 향한 애정과 기대가 여실히 드러난 순간이었다.

미술 애호가들은 고훈이 시청자로부터 실시간으로 요청받아서 그린 에 감탄했다.

잠든 고양이 네 마리를 해바라기처럼 배치한 는 고양이의 교태로운 자태와 따스한 색감에 치유되는 듯했다.

한국 팬들은 를 <냥바라기>로 자체 번역하고, 한글 자막도 달아서 해당 영상 링크를 여러 게시판에 게시했다.

└그림도 대단한데 난 왜 이렇게 그냥 웃기짘ㅋㅋㅋ

└귀뚜라미 먹는다는 채팅 봤을 때 표정 진짴ㅋㅋㅋㅋ

└세상 무너진 줄 알았음ㅋㅋ

└그 귀여운 애를 왜 먹냬ㅋㅋㅋㅋ

└아, 진짜 개인 채널 만들었으면 좋겠다. 그림 그리면서 소통하는 방송 많잖아.

└그러게? 예술가들 다 SNS든 뉴튜브든 하던데. 고훈은 안 하나?

└굳이 해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다들 인지도 높이려고 해. 홍보용으로. 이름값=작품값이니까.

└화가들한테는 진짜 중요한 거야. 자기 홍보 안 하면 금방 잊힘.

└고훈은 안 해도 계속 기사 뜨던데.

└쟤가 좀 별난 거지 유명한 사람도 다 함. 앙리 마르소도 있어. 페르디난도 곤잘레스도 있고.

└훈이도 SNS는 하잖아.

└훈이 SNS는 그림 홍보가 아니라 자기가 먹은 거 자랑하는 용도 아님? ㅋㅋㅋ

└근데 예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왜 훈이만 저렇게 잘 되지?

└애가 타고 났음.

└재능?

└그림 잘 그리긴 하지. 아이디어도 좋고.

└ㄴㄴ 아님.

└그럼 뭔데?

└어그로.

└뭐래.

└예술가는 어그로를 잘 끌어야 해.

└뭔 소리얔ㅋㅋㅋㅋㅋ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진짜로. 화제가 될 만한 일을 해야 유명해지고, 작품 가치도 올라가. 앙리 마르소 봐봐. 미친 짓 계속하더니 지금은 누가 뭐라 해도 최고잖아.

└그럼 장미래는?

└장미래 국전에서 우수상 받고 시상식장에 물감 뿌렸잖아.

└?

└심사위원들 빨갛게 빨갛게 물들어서 아주 봉숭아였어.

└ㅋㅋㅋㅋㅋㅋ장미래 어렸을 때 한 성깔 했짘ㅋㅋㅋㅋ 결국 나중에 부정 심사였던 거 드러나서 국전 망했잖앜ㅋㅋㅋㅋ

└상장 찢은 거 이후로 유명해지긴 했는데. 고수열이랑 이수진 아니었으면 매장당했을 수도 있었음.

점심시간에 밥을 먹으며 인터넷 반응을 살피던 차시현이 빙그레 웃었다.

여러 사람이 친구를 칭찬하고 좋아하니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약속했던 시간보다 훨씬 더 오래 돌아오지 않은 게 서운했지만, 영화나 방송을 통해 자기 일을 해나가는 게 자랑스러웠다.

예전처럼 학교에서 혼자 지내게 되었지만, 방과 후에는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기대감과 쉬는 시간마다 볼 수 있는 친구의 소식에 외롭지 않았다.

점심을 서둘러 먹은 차시현이 스케치북과 색연필 세트를 챙겼다.

제1교정 뒤편에 난 정원으로 가 벤치에 앉았다. 주변이 수풀로 가려져 있어서 종종 시간을 보내던 곳이었다.

“한 장밖에 안 남았네.”

차시현이 마지막 장을 펼치기 전 괜히 그동안 그림을 살폈다.

파란 잎이 무성한 나무가 서로 다른 형태로 계속 이어졌다.

누군가에게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고, 단지 반복해 그릴 뿐이라 눈에 띄게 나아지진 않았다.

그러나 차시현은 그리는 행위 자체가 즐거웠고 본인이 그린 것을 다시 보는 것이 행복했다.

검은색 색연필을 꺼낸 차시현이 삐뚤빼뚤한 선을 그었다. 그런 다음 그 선의 끝에서 시작해 그 아래에 또 삐뚤게 선을 그었다.

눈에 띄게 짧아진 파란색 색연필을 꺼낸 차시현은 두 선이 만나는 지점 부근에 나뭇잎을 작게 그렸다.

그 옆에는 조금 다른 형태로 그렸다. 꼭 하나씩 그리고, 하나씩 색을 칠했다.

어디가 어딘지 구분할 수 없게 된다는 걸 지난 몇 차례의 경험에서 깨달은 차시현은 힘을 조절하는 것으로 진하기가 달라짐을 익혔다.

나뭇잎 윤곽은 힘을 주어서 꾹꾹 그렸고 나뭇잎 안쪽은 힘을 빼고 칠했다.

그러면 열심히 그린 나뭇잎이 하나하나 다 보였다.

“아.”

그저 그리는 데 정신이 팔렸던 차시현이 고훈이 해준 말을 떠올랐다.

{나뭇잎을 잘 관찰해 봐.}

{초록색인 것 같아도}

{다 같은 초록색은 아니야} 20:11

{파랑이 좋은데.}

20:11 {다른 색도 써야 하는 거야?}

{아니}

{답은 없어}

{파란색도 여러 가지니까 한 번씩 써보라는 말이야} 20:12

20:12 {응!}

20:14 {근데 언제 와?}

{모르겠어. 한 달 정도?} 20:15

20:15 {ㅇㅁㅇ 그렇게나 오래?}

{ㅇㅁㅇ가 뭐야?} 20:15

20:16 {놀란 얼굴}

{……오. 그러네.} 20:20

20:21 {귀엽지ㅋㅋㅋ}

“근데 난 파란색이랑 하늘색밖에 없는데.”

차시현이 하늘색과 파란색 색연필을 살폈다.

하늘색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태블릿에서는 색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었는데 색연필은 종류가 몇 없었다.

60색 크레파스는 파란색 계열이 좀 더 많았지만 부피가 너무 커서 가지고 다니기 불편했다.

“색연필은 없나?”

차시현이 인터넷에 파란색 종류를 검색해 보았다.

정리된 색상표를 보곤 눈을 빛냈다.

청색, 벽색, 천청색, 담청색, 취람색, 벽청색, 양람색, 청현색, 감색, 군청색, 삼청색, 흑청색, 청벽색, 청자색 등 푸른 계열로 나온 색연필이 너무나 많았다.

‘이번 시험 백 점 맞으면 새 스케치북이랑 파란색 색연필 사 달라고 해야지.’

차시현이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그리던 그림을 마저 칠하기 시작했다.

* * *

프랑스로 가기 전.

독일에서 하루를 쉬기로 했다.

방송을 두서없이 해서 걱정이었는데 쉬민케 직원들의 표정이 밝아서 안심했다.

“무슨 소리야. 완전 잘했는데.”

방태호도 나를 추켜세웠다.

너무 좋아하니까 과장이 섞여 있겠지만, 결과가 좋다니 다행이다.

돈을 받아두고 제대로 못 했으면 다음 일이 들어오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말인데, 훈아. 이런 거 가끔 해보는 게 어때?”

“방송이요?”

“응. 그림 그리면서 팬들하고 소통도 하고.”

‘대화를 나눠요’에 나갔을 때보다 확실히 편했다.

오늘 팬티 무슨 색이냐고 물어보는 정신 나간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내가 하는 말을 귀담아 들어주는 것 같았다.

그림이 어느 정도 형태를 갖추었을 땐 놀라거나 좋아하는 것도 기뻤다.

“요즘엔 다들 하더라.”

할아버지도 거들었다.

“할아버지도 하세요?”

“흐흐. 아니. 할아버지는 그런 거 잘 못 해. 미래 이모는 잘하더라. 구독이라고 하나?”

“네. 맞습니다.”

“구독하는 사람이 90만 명이나 된대. 미래 이모는.”

“방송 보는 사람이요?”

생각지도 못한 숫자가 나와서 깜짝 놀랐다. 대체 어떻게 하면 그렇게나 많은 사람이 방송을 볼 수 있는지 모를 일이다.

“하핫. 모든 구독자가 방송을 보진 않아. 장미래 작가님 방송은 가끔 들어가는데 5,000명 정도 보더라고.”

그것도 많다.

“부담 가지지 말고 혼자 그리기 심심할 때 틀어서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재미 붙이면 편집자도 구해서 영상도 올리고.”

집중해서 작업할 때는 안 하는 편이 좋겠다.

워낙 정신 사나우니까.

하지만 방태호의 말대로 가끔 찾아오는 적적함을 달래기에는 적합하겠다.

“그럴게요. 근데 카메라 사야 하는 거예요? 저 카메라 못 하는데.”

“걱정 마. 준비해 볼게.”

역시 방태호. 믿음직스럽다.

“시간이 남는데. 훈아, 미술관 갈까?”

“미술관이 있어요?”

“그럼. 많이 있지.”

“쿤스트 팔라스트랑 뒤셀도르프 현대 미술관 K20도 있고. 인젤 홈브로이히라고 조용하고 분위기 좋은 곳도 있어.”

뭔가 잔뜩 나온다.

내일이면 파리로 가야 하는데, 이번에도 하루뿐이라 잘 선택해야 한다.

“어디가 좋아요?”

“쿤스트 팔라스트에 동준 선배 작품이 있었지, 아마?”

할아버지가 고개를 갸웃하셨다. 긴가민가하신 듯하다.

“그렇습니다. 훈이 백동준 선생님 알아?”

“몰라요. 화가예요?”

“예술가가 정확한 표현이야. 비디오 아트라는 장르를 개척하신 분인데, 우리나라에서 휘트니 비엔날레를 열기도 하셨어. 그걸 바탕으로 광주 비엔날레도 함께 만드셨고.”

“휘트니 비엔날레를 어떻게 열어요?”

휘트니 미술관이 주최하는 휘트니 비엔날레를 우리나라에서 열었다고 하니 이해가 잘 안 된다.

“그때만 해도 휘트니 미술관이 미국 중심의 전시회였거든.”

할아버지가 숨을 내쉬곤 말씀하신다.

“당시 휘트니 미술관이 해외 전시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백동준이란 분이 서울로 하자고 하셨어. 주제가 경계선이었고 휴전선으로 분단된 한반도가 적합하다는 이유로.”

“우리나라가 휴전 중이에요?”

할아버지와 방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부신 도시가 전쟁 중인 나라의 수도였다니. 믿을 수 없다.

그건 그렇고 백동준이란 사람도 참 대단하다.

“여기서 교수도 했었지.”

할아버지가 과거 일을 회상하듯 말씀하셨다. 선배라고 할 정도니 개인적 친분이 있었던 모양이다.

“백동준 선생님 작품 말고도 루벤스도 있어.”

루벤스라면 프랑스에서 국가적으로 밀어주었던 대가다. 왕립 미술원의 모든 화가가 루벤스의 그림을 따라 그려야 했으니 말 다 했다.

“그럼 다른 곳은요?”

“K20이랑 K21이 있지?”

고개를 갸웃하자 20세기 미술품을 전시한 곳이 K20 주립 미술관이라고 한다.

K21 현대미술관은 말 그대로 21세기 작품을 모아두었단다.

“K20에도 백동준 선생님 작품은 있을 거야. 정말 대단한 분이시거든. 여기 뒤셀도르프랑 연관도 깊고.”

“K20이 좋겠구나. 후기 인상주의도 있고. 큐비즘도 있고. 칸딘스키랑 몬드리안도 있을 테니.”

오늘 생소한 단어를 너무 많이 듣는다.

머리가 아프다.

다음에도 올 기회가 있을 테니 오늘은 할아버지와 방태호가 극찬한 백동준 작가에 대해서 알아보고 싶다.

“백동준 작가 작품만 볼래요.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

“그래. 어쩌면 훈이 네가 고민하던 것에 방향을 잡을 수도 있겠구나.”

할아버지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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